에어컨 없습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에어컨 없습니다 매일경제 기사입력2010.08.20 15:28:38
얼마 전 가까이 사는 후배한테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토요일 저녁 시간 있으세요? 닭백숙과 소주 있습니다. 에어컨 없습니다.`
주말 저녁 초대 문자였다. 거실 바닥에 배 붙이고 누워 채널 바꿔가며 프로야구나 보고 있을 토요일 저녁, 누군가에게 초대를 받는다는 건 참 신나는 일이다.
나는 1분도 뜸 들이지 않고 `감`이라는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이번 주말도 사람에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위에 지쳐 시들시들하던 기분이 한결 시원해졌다.
그런데 문자 끝에 달린 `에어컨 없습니다`가 잔상에 남아 자꾸만 어른거렸다.
물론 복날 저녁 더위를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있으면 오라는 얘기다. 더워도 원망하지 말아달라는 용의주도한 예방주사 같은 얘기다.
하지만 그 얘기를 꼭 해야 했을까? 그 좁디좁은 문자판에 꼭 우겨넣어야 했을까? `꼭 오세요`나 `늦으면 빈 접시!` 같은 말들이 대신 들어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을까?
나는 그 한마디를 `사랑합니다`로 이해했다.
후배는 집에 불러주고, 술과 안주 다 준비해주면서도 집에 에어컨 없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조그만 불편도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느닷없는 그 한마디가 문자 끝에 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 한마디는 내게 `꼭 오세요`보다 더 꼭 가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에어컨 없습니다`로 표현한 `사랑합니다`는 문자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 뜻대로 고스란히 전달된 듯하다. `에어컨 없으면 안 간다`는 답을 누구도 보내지 않았으니까.
서너 가족이 모였다.
묵은 김치를 들고 온 사람, 와인을 들고 온 사람, 과일꾸러미를 들고 온 사람…. 모두들 초대 고맙다는 표현을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오는 것으로 대신하며 후배 집으로 모여들었다.
반바지와 민소매 옷으로 더위와 맞설 준비를 한 채.
그런데 그날 밤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배 집은 김연아가 추천하는 에어컨 몇 대를 한꺼번에 켜놓은 것처럼 시원했다. 모든 집들이 에어컨을 켜느라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어 갈 곳을 찾지 못한 바람들이 다투어 그 집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닭과 소주는 물론 자신이 들고 온 것들까지 차례로 비우며 조금씩 취해갔다.
그날 술상에 오른 화제는 단연 아이 잘 낳는 법이었다.
곧 첫아이를 낳는 후배의 부인에게 출산 선배들은 나름의 요령이나 비법을 전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배가 남산만큼 부른 몸으로 열 명이 넘는 여름 손님을 초대한다는 게. 그날이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그렇다면 그걸 알면서도 얼씨구나 하며 찾아간 우리는 심하게 뻔뻔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 자리가 조금도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자리도 `사랑합니다`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후배 부부는 오히려 만삭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이제 곧 아이를 낳으면 한동안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기 정말 어려워질 것이기에. 그래서 조금 무리다 싶은 자리를 만든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방법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 맨 마지막에 사용하라고 만든 말일지도 모른다.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바람에 취하고 `사랑합니다`에 취해 어느새 나는 그 집 소파에 등을 붙이고 말았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후배 부부는 엄마, 아빠가 된다.
엄마처럼, 아빠처럼 마음이 예쁜 아이가 그 바람이 시원한 집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날은 내가 먼저 축하 문자를 보내야지. 그리고 한두 달쯤 지나면 이런 문자를 보내야지.
`주말 저녁 시간 있니? 술과 안주 무진장 있음. 유모차 없음.`
[정철 카피라이터]
이럴 때 鄭松江 할아버지의
재 건너 成勸農 집에 술 익단 말 전해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희야! 네 勸農 계시냐 정座首 왔다 일러라
란 시조가 떠오르는 것과는 불과 1초의 차이도 없었다.
인생을 옴팡지게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스케치.
그것도 그렇지만 어쩜 이렇게 가슴 속의 생각들을
한 점 우수리 없이 오롯이 늘어 놓을 수 있을 까?
그 점이 또한 부러운 半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