智異山 登攀記 養正山岳部 崔 基 悳
1937년 3월 18일
등산에 대한 경험과 기술이 충분치 못한 우리로서는 한편 공포의 감을 느끼면서도, 감히 저 험준한 지리산 정복을 목표하고 3월 18일 오후 11시15분, 목포행 열차로 재교동창(在校同窓)들과 선배들 및 신문사 등의 친절한 전송리에 경성을 떠났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몸에 지나치는 성원을 받아 한편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수라장 같은 차 안은 어느덧 물 뿌린 듯이 고요해지고, 다만 기차 소리에 조자(調子:가락) 맞는 흔들림만이 우리의 잠을 훼방하였다. 그러나 극도로 긴장한 우리로서 잠이 든다는 것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1937년 3월 19일
조치원이 지나고, 대전이 가까워오도록 일행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덧 대전도 지나쳤다. 피곤할 대로 피곤하였던 우리는 그만 잠이 들었다. 한두 시간에 지나지 못하는 얕은 잠이었으나,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먼동 트는 이른 아침에 기차는 이리에 닿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여수행 기차로 바꿔 올랐다.
오후 4시반. 구례를 떠나 평탄한 길로, 지는 해(太陽)와 경쟁하여 저 연기 나는 수림 속의 화엄사를 건너보며 걸음을 빨리하였다. 위험하던 하늘은 기어코 샘을 시작한다. 견사(絹紗)와도 같은 맹춘(孟春)의 세우(細雨)가 땀난 얼굴과 손등에 떨어진다. 덥던 몸이 식는 듯도 하여, 시원하면서 한편 귀찮기도 하다.
날은 점점 어두워가고, 빗방울은 차차 수가 늘어간다. 그래도 길이 좋으므로 ‘핏치’는 빠르다. 도중 촌락에는 개나리꽃과 산수화(山水花)가 만발하여 아름다운 화원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봄의 본표정을 보았다. 북국(北國)에 사는 우리의 눈에는 놀라운 경치였다.
산록(山麓)에 다다름으로부터 수성(水聲)을 밝은 귀로 들으며, 송죽림 사이로 약 1킬로 올라가니(중간에 山門을 지남) 대본산 화엄사이다. 때는 오후 6시였다. 황혼과 운연(雲煙) 중에 은은히 보이나, 대규모의 고찰(古刹)임을 알 수 있다. 청청한 송죽림이 에워싼 고요한 절이었다.
당장 허기에 질린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할 나위도 없이 석반(夕飯)의 준비로 들어갔다. 오후 8시경 석반은 끝났다. 그러나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여전히 흐르는 물소리 위에 내리고 있다. 우리는 침침한 석유불 밑에 둘러앉아 내일 할 일을 두런두런 상의한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비는 여전히 계속하여 내린다. 곤하던 일행은 잠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매우 근심이 되어 잠은 들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경이 예민하여진다. 그리고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만일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나? 혹 비는 그치더라도 중복(中腹) 이상에는 눈이 있을 터인데, 길을 어찌 찾아갈까? 미끄럽지나 않을까?
밤은 이미 깊어졌다. 나는 들락날락하며 하늘을 원망도 하고, 또 하늘에 대하여 애원도 해보았다. 극도로 피곤하였던 몸인지라, 자정이 넘으니 더 견딜 힘이 없이 그만 잠에 잠기었다.
1937년 3월 20일
이튿날(20일), 눈이 떨어지자 나의 신경은 칼날같이 예민하여졌다.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나 안들리나 두려운 한편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물소리와 짐승들의 아침먹이(餌) 찾는 굶주린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것 같고, 또 있는 것도 같다. 의심과 불안이 가득찬 얼굴로 컴컴한 문 밖을 나서니 비는 개인 듯도 하나, 구름이 온 산을 덮었다. 날은 개인 것도 같고, 안 개인 것도 같다.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찬 개울물에 세수를 하고나니 피로에 감기었던 몸이 날을 듯이 가볍고 정신이 펄쩍 난다.
뭉게뭉게 일어나는 구름이 다소 걷히기를 기다려 오전 9시에 화엄사를 떠나 동북쪽 운연(雲煙)에 가득찬 깊은 골짜기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양편에는 울밀한 송죽림이 우거졌고, 음습한 골짜기에는 소태류(蘇苔類)가 누적되어 있다. 이 컴컴하고 습한 골짜기를 지나면 잠깐 하늘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빽빽한 죽림이 올려보인다.
길을 계곡의 오른편으로 잡아 약 5분 가량 가면 다시 왼편으로 건넌다. 이곳에는 2~3호의 인가가 있다. 이로부터 앞으로는 비탈도 심하거니와, 소나무의 거목들이 마음껏 우거져서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화엄사와 구례읍을 부림(俯臨:숙여서 봄)함도 이곳을 지나고서는 몇 번의 기회가 없다. 점점(點點)히 구름에 가린 아침의 구례읍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봄과 같다.
어질게 울던 짐승의 소리는 햇빛으로 괴괴하게 가셔지고, 우리의 호각소리가 숲속의 적막을 깨트려간다. 물소리 요란한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인력이 미치지 못한 오직 자연만이 넘쳐흐르는 심림(深林) 사이를 구불구불 돌아오르니, 오르면 오를수록 넘어진 나무들로 또는 대나무들로 험악을 더할 뿐이다. 이끼류는 수목이나 암석이나 땅이나 사정(事情)없이 몇 켜로 덮어 쌌다.
오전 10시반경에 우리는 이 숲을 벗어나서 낙엽의 잡목이 엉켜 있는, 일광(日光)이 따뜻이 내리쬐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해발 4백50여 미터 되는 지점이다. 남면(南面)한 바위 밑에는 힘있게 새 풀싹이 돋아 있다.
또 이곳을 경계로 식물의 분포가 확연하게 둘로 갈라져 있다. 아래로는 상록수의 종류(주로 소나무)고, 위로는 낙엽수의 종류(이곳에서 부르는 써나무, 노가지나무, 다래넝쿨 등)이다. 대나무와 이끼류는 상하에 다 분포되어 있다. 이로부터는 계곡에 흐르는 물도 분량이 적고, 연봉(連峰)에는 백운이 덮혀 있다.
일광은 따뜻하나 바람은 대단히 냉랭하다. 해발 6백미터쯤 되는 데에서 개울은 좌우로 갈라진다. 바른편 개울을 따라 오르면, 바로 머리 위로 금잔디가 곱게 깔린 재(嶺)가 보인다. 이것이 노고단 서남에 있는 재(嶺)이다. 이 재 오르기 약 1킬로미터 전부터의 경사는 대단히 심하고, 험준하기도 말할 수 없다. 양장(羊腸)과 같이 구불거린 길은 매우 힘이 들었다.
우리는 10보(步)에 1식(息)으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영시(零時:정오를 말하는 듯) 반에야 재에 올랐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도 하였다. 노고단과 양인(洋人)피서지는 백설(白雪)에 덮히어 엄동(嚴冬)을 꿈꾸고 있었다. 앞으로는 계곡을 바라보고, 좌우 양편으로는 깨끗한 지리산 연봉이 용립(聳立)하여 보인다. 이 두 연맥(連脈)이 합한 곳에 노고단이 되어 있으니, 양인피서지는 서향(西向)의 삼태 안 같다.
우리는 서양인피서지가 잠시라도 더 보고 싶지가 않았다. 깨끗한 백설을 밟으며 노고단으로 올라간다. 불안에 싸인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백설은 고맙기 짝이 없다. 오후 1시20분, 우리는 노고단에 올랐다. 동으로는 구름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반야봉이 가까이 보이고, 그 뒤로는 운연(雲煙) 속에 천왕봉(主峰)의 웅자가 보인다.
우리의 가슴은 뛰고 기쁘다. 천봉만악(千峰萬嶽)의 내달은 곳은 어디인지도 모르게, 저●(低●)하는 운무에 가려서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망망하게 내려다보이는 무한한 운해! 점점히 뚫어진 곳으로 환연(渙然)하게 나타나는 풍경! 그것은 마치 대해(大海)상의 고도(孤島)와도 같다.
우리는 땀에 목욕한 몸을 햇빛과 바람에 말리며 사해(四海)를 감시(瞰視)한다. 그 순간의 우리의 심경이야 신선인들 맛볼 것인가?
바쁜 우리는 더 지체할 여유가 없이 백설에 고요히 잠든 양인피서지를 한번 더 내려다보고, 동으로 동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엄동을 꿈꾸는 눈 속의 좁은 길이나마 좌우의 수목들로 인하여 겨우 분별할 수가 있었다. 길은 연맥의 남록(南麓) 혹은 북록(北麓)을 양장(羊腸)과 같이 구불거렸다. 점점이 눈이 녹은 양지에는 낙엽에 발이 묻히고, 마른풀이 어지럽게 엉켜 있어 성하(盛夏)의 험악함을 상상케 한다.
오후 2시경, 우리는 춥고 험한 길을 벗어나 겨우내 백설에 눌리고 닦인, 고운 고초(枯草)가 깔린 춘국(春國)을 만났다. 내려쪼이는 햇볕도 유심히 따스하다. 불어오는 바람도 얼엇던 우리의 얼굴을 녹이는 듯하다. 우리는 한숨 돌리며 찬 점심이나마 기껍게 마쳤다. 남으로는 죽송(竹松)의 순서로, 계단과 같이 확연하게 늘어서 잇고, 북으로는 진달래 등등의 잡목이 빽빽하게 들어박혔다. 시계는 2시40분을 가리키고, 중천을 지난 해는 우리의 앞길을 재촉한다.
힘없는 다리를 끌면서도 앞에 보이는 반야봉의 웅자(雄姿)에 우리 일행의 어린 가슴에는 필설의 능(能)을 초월한 감회가 돋는다.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는 약 8킬로키터나 되고, 다소 험한 곳도 있으나 대체로 연맥을 따르는 길이라 사방에 조망이 풍부하므로 힘드는 것을 잊게 하는 좋은 길이다. 그러나 반야봉에 이르기 약 1킬로미터 전 지점으로부터는 수목도 많거니와 비탈도 급하며 맹수의 횡포하게 굴던 자리가 눈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어떠한 곳은 방금 파헤쳐진 곳도 있다.
우리는 한층 더 긴장하여 각기 허리의 단도(短刀)를 만져보며 호각으로 앞길을 경비(警備)하였다. 오후 4시반! 우리는 기어이 백설 덮힌 저 해발 1천7백51미터 되는 반야봉 위에 발을 두었다. 낙조에 가까운 해는 환희에 넘치는 우리의 “만세”를 기뻐하는 듯이, 연기 속으로부터 텝과 같은 오색의 영롱한 햇발을 무수히 던져준다.
노고단도 서쪽에 굽어보이며, 천왕봉도 동으로 묘연(渺然)하게 보인다. 반야봉의 서남록(西南麓)은 각종 초목이 엉켜 있고, 동북 기슭은 대체로 소나무류의 거목이 울밀하다. 잎도 없고 껍질도 없는, 다만 허연 줄기만 남은 고산지대의 독특한 풍치를 나타내는 고목(枯木)들도 많이 서 있었다. 오직 환희에 충만된 우리는 어절 줄을 모르고 웃고 떠들기만 하였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산(山) 장등을 넘으려 내려닫는다. 사납던 날씨도 수그러진 듯하다.
오후 5시경, 반야봉을 떠나 오르던 길을 돌쳐 약 15분에 산맥은 동남 양편으로 갈라지며, 동시에 길도 동남으로 갈라진다. 남으로 있는 것은 노고단에서 오르는 길이고, 동으로 놓인 것은 주봉에 연(連)하는 길이다. 우리는 동쪽 길을 잡았다. 대단히 험하고 복잡한 길이었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골짜기를 뒤덮은 선태류(蘚苔類)와 참천(參天 :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으로 높이 솟음)한 ●●와 쓰러진 나무 등등은 우리의 핏치를 방해하였다. 더구나 적설과 빙판도 우리를 농락하는 것 같다. 우리는 원숭이와 같이 암석과 수목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기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약 1.5킬로미터쯤 지나니 앞이 트이고 수목이 적은, 좁은 길이 십자가(十字架) 된 곳에 이르렀다.
시계를 보니 6시20분! 황혼은 사방에서 우리를 싸들어온다. 그러나 인가를 찾지 못한 우리 다섯 사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나그네의 괴로움을 유감없이 맛보는 우리들, 낙담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로서 낙망에 빠져 인가 찾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알고, 예정과 같이 칠불암으로 가려고 동남으로 뚫린 길을 접어들었다.
송죽이 창창(蒼蒼)한 컴컴하고 습한 계곡을 따라 짐승 퇴거령(退去令)의 호각을 불며, 마라톤 식으로 뛰어내린다. 얼마 안 되어 전신에 땀이 흐른다. 또 목이 말라간다. 호각소리도 차차 희소(稀疎)해지고 약해진다. 오직 산간의 정막(靜寞)을 깨트리는 것은 물소리뿐이다.
약 30분이나 내려오니 거목이 드물어지고,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 같으나마 창공이 나타난다. 시원하기 짝이 없다. 창문 없는 캄캄한 지하실에서 갑자기 광명한 천지로 나선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달이 해인 것도 같다. 점점이 보이는 성진(星辰)들도 이상하게 반짝인다.
오후 7시5분! 우리는 의외에도 외딴 집 한 채를 만났다. 이곳은 연동(蓮洞)이라는 곳이다. 이로부터 칠불암은 3~4킬로미터나 된다. 반갑고 고맙기 한량없다.
일박을 청하고, 마른 목을 축이려 우물로 가니 뚜렷한 달그림자가 쫏고, 찬바람이 땀난 뺨을 핥고 지나간다. 석반을 마치고나서 눈 속의 젖은 발을 말리면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종일 한 일을 되풀이하며 웃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다. 밤은 이미 깊어간다. 월광도 점점 명랑(明朗)해진다. 냉기도 차차 심한 듯하다.
1937년 3월 21일
우리는 칠불암을 다녀서 잔돌(細石)까지 가기로 하고, 힘있는 보조(步調)로 연동을 떠났다. 약 5분간 급한 언덕을 내려서, 계곡을 오른편에 두고 2~3채의 인가를 거쳐 동으로 향한 길로 약 1시간여를 올라내리면 고색이 창창한 칠불암에 이른다.
화엄사와 같이 크진 못하나, 웅장한 멋이 있다. 기둥의 굵은 것은 주위가 약 5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 석축의 댓돌은 파괴된 것이 많다. 이 절은 거금(距今) 1천8백26년 전 가라국(伽羅國) 시대의 창설(創設)로, 창설은 김해가락국 수로왕 아들 7인이라 한다. 수로왕자는 8인이었는데, 한 분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일곱 분은 다같이 이곳에서(지금에도 잔디밭이 남아 있음) 수도를 하여 칠불(七佛)이 되었다 한다. 이것이 칠불암의 기원이라 한다.
대웅전의 바른편 앞에 저 유명한 아자방이 있다. 이것이 이 고찰이 창건되던 당시에 놓은 방이라 한다. 즉 1천8백26년 전의 방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가수(加手)하지 않았으나, 의연히 옛과 한모양이라 한다. 건물만은 두 차례나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왕에는 70여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다 가버리고 단지 세 명의 노승이 있을 뿐이다.
오전 11시, 칠불암의 산문을 나서서 무릎이 넘치는 낙엽을 발로 헤치며, 조밀한 거목 사이로 동쪽을 향하여 내려가면 범왕리(凡旺里)에 이른다. 범왕리는 대개 밭이 많으나, 소수의 계단식 논도 있는 좀 넓은 벽공(碧空)을 올려볼 수 있는 마을이었다. 길은 동리 가운데로 지나, 동북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이 언덕이 ‘당재’라는, 비교적 인적이 많은 길이다. 좌우 비탈에는 밭을 일궈 감자를 심느라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분망(奔忙)중에 있다.
12시20분, 재에 오르니 눈 속의 잔돌(細石)과 천왕봉(주봉)이 뚜렷이 보여, 우리의 덥던 마음을 식혀 주는 듯하다. 우리는 천왕봉의 웅자에 가슴이 뛰어 빠른 핏치로 삼정(三政)을 굽어보며 당재를 내려갔다. 다시 물소리 요란한 계곡을 건너 조금 오르면, 삼정에 이른다. 지금은 오막살이 몇 집밖에 없으나, 옛적에는 삼정승, 육판서가 살던 곳이라 한다.
오후 1시반, 점심을 먹고 다시 올랐다. 삼정 마지막 주막에서 길을 동으로 틀어 약 60도나 되는 급경사를 오르면, 4시경에 덕평(德坪)에 이른다. 덕평은 간단히 말하면 지리산 속의 조그만 사막이다. 주위는 약 4킬로미터나 되어 보이는, 동남으로 좀 기울어진 곳이다. 점점이 초원도 있고, 오아시스도 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여섯 채의 산간 초옥이 둘러 있다. 얼른 보기에는 깨끗한, 그리고 고요한 마을 같으나, 그러나 살풍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나 하며 실컷 쉬고 싶었으나, 시간이 허(許)하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땀도 다 말리지 못하고 또 걷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곳으로부터 길을 동으로 잡아들었다. 얼마쯤 가니 길은 이상하게도 지도의 것과 맞지 않는다. 나는 그제야 길을 잘못 접어든 줄을 알았다. 그러나 시간으로 보아 오늘은 도저히 잔돌(세석)까지는 갈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덕평의 최종의 인가까지 가기로 하여 완완(緩緩)한 핏치로 길 없는 연봉(連峰)을 좇기로 하였다.
얼마쯤 가다보니 부지중(不知中)에 우리는 연봉의 동쪽 기슭을 걷고 있었다. 길은 길 같으나 역력치 못하고, 또 괴기한 암석이 정립(鼎立)하여 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다시 연맥(連脈)의 잔등을 오른다는 것은 용이치 못한 일이므로, 길을 따라서 걷기만 하였다. 일행은 모두가 극도로 피로하였다.
얼마쯤 가다가 우리는 짐승을 잡으려는 덫(혹은 차위)을 발견하였다. 아! 반갑다! 이로부터는 인가가 멀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길은 점점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지도를 조사하니, 우리는 대성리(大成里)로 강하하고 있는 중이다. 대성리도 우리 있는 지도에서 썩 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밤을 대성리에서 쉬게 되면 내일의 예정이 어그러질까 염려하고, 우리는 피로하였으나 덕평의 최상동(最上洞)의 인가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여, 없는 용기나마 사탕물 한 잔으로 다시 회복해 가지고 치밀한 대나무 수풀(竹藪)을 다리와 두 팔로 헤쳐가며 위로, 위로 올라간다.
힘드는 것도 모르고, 땀나는 것도 모르고, 다만 길 잃은 것만이 두렵고 불유쾌하다. 해는 차차 건너편 산과 거리를 가까이 하고, 우리는 걸을수록 점점 험하여갈 뿐이다.
오후 6시반! 우리는 기어이 험한 산(山) 잔등을 기어올랐다. 덕평 최상동인 다만 한 채의 낡은 집이 보인다.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우리는 미칠 듯이 반갑고 기뻤다. 넘어간 해도 그다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도 얼마 아니되어 고마운 줄을 잊게 한다. 땀은 들었으나, 땀에 젖은 옷은 척척하기 짝이 없다. 물론 힘든 땀도 있겠으나, 대부분이 공포의 땀일 것이다.
한숨 돌리고나니 그제야 배고픈 줄도 알겠다. 길 잃어 헤매던 곳을 의심과 조소(嘲笑)하는 낯으로 다시 한번 돌아보며, 인가로 갔다. 아! 우리는 결국 무엇을 찾았을까? 애석하게도 우리가 찾은 집은 인적이 끊긴 지 이미 오랜, 허물어져가는 한 채의 빈 집이었다. 실망! 절망! 우리는 어쩔 줄을 몰랐다.
황혼은 깊은 골짜기로부터 차차 펼쳐 나온다. 썩고 낡은 지붕, 허물어져가는 벽, 떨어져나간 창문, 가라앉은 방고래, 무너진 아궁이. 더구나 근처에는 물을 찾을 수 없다.
좀 무리인 듯도 하나,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덕평본동(德坪本洞)까지 내려가기로 하고 쉬려던 생각을 다시 수습하여 급한 걸음으로 황혼을 헤치며 은은히 보이는 덕평을 향하여 내려갔다.
비탈은 심하나, 방해하는 것이 적으므로 핏치는 빨랐다.
오후 7시20분! 덕평에 이르러 일박을 청하니 빈 방이 없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로부터는 다시 인가를 찾아갈 수도 없다. 영영 어찌 할 수 없으면 처마 끝에서라도 잘 각오로 샘(泉)을 찾아 저녁밥을 짓기 시작하였다.
달 그림자가 우물에 비친다. 하늘에는 엷은 달이 뚜렷이 박혔다. 점점이 박힌 별들도 이상하게 번쩍인다. 사막의 덕평! 정적(靜寂)한 덕평! 월광의 덕평! 고요한 달빛은 사막의 한촌(寒村)을 곱게곱게 비춰준다.
어느덧 밥은 끓는다. 그러나 먹을 자리는 어디며? 잘 자리는 어디인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는 것이 여객(旅客)의 한(恨)이라건만, 우리는 다행히도 오아시스도 찾고, 더구나 인가까지 만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일야(一夜)를 곱게 샐 수 없는, 가엾은 객이 되었다.
그네들은 그 거짓없는 눈으로 우리를 볼 수 없던 것이었다. 몇 가족을 이리저리 몰아서 겨우 한 칸 방을 우리에게 빌려준다. 천사와 같은 그네들! 진세(塵世)를 모르는 그네들! 솔직한 그네들! 깨끗한 그네들! 우리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고맙고 반갑기 짝이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백배사례(百拜謝禮)하고, 방에 들어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들의 눈은 이상하게도 커진다. 처음 보는 쌀밥! 오래간만에 보는 쌀밥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오직 감자만을 상식(常食)하는, 가련한 사람들이다. 어두운 등잔불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그 혈기 없는 안색과 힘없는 눈동자, 엉크러진 머리, 멀겋게 비치는 근육 등 모든 것이 가엾고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인자한 빛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서울은 구경(求景)이 좋고, 만주는 살기가 좋답디다! 이곳도 애초는 땅이 넓고 곡식이 잘 된대서 새로운 희망과 뜨거운 이상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1년을 지내고 보니 가족은 많고, 돈은 없고, 다시 세상을 찾아 나갈래야 그럴 힘조차 없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붙어 있다우! 어쩌다 해 사납지 않으면 겨우 연명이나 하고, 그렇지 못하면 끼도 빼놓은 날이 한두 날이 아니라우! 그래도 해마다 호세(戶稅)니, 지세(地稅)니, 교육비(敎育費)니 뭐니 뭐니 해서 내일부터 끼를 굶는 한이 있더래도 머나먼 산길에 무거운 감자를 지고 나간다우! 이런 서러운 데가 어디 있수! 이런 답답할 데가 어디 있수! 좋은 세상을 구경도 못하구!” 하며, 그들은 서울을 보고 싶어하고, 만주를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들에게 충분한 위안을 주지 못하였다.
1937년 3월 22일
이튿날(22일) 새벽, 눈이 떨어지자 나의 머리에는 천왕봉이 떠올랐다. 우리의 성패는 오늘 하루에 달렸다고 생각할 제, 나의 근육은 움츠러들고 정신이 펄쩍 난다. 오전 6시반에 조반은 끝났다. 문 밖을 나서니, 날은 다 새지도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기 짝이 없고, 벽공(碧空)에 점점히 박힌 별들은 힘없이 껌벅인다. 우리의 몸은 찬바람으로 인하여 잠깐동안에 얼어버렸다. 그러나 걸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열은, 충분히 찬바람에 대항할 수 있었다.
동북으로 향한 길을 잡어든 지 약 40분이 지나니, 오른쪽으로 일암(日岩)과 월암(月岩)이 굽어보이며, 동시에 길은 심울(心鬱)한 밀림 사이로 들어가며 동쪽으로 구부러진다. 이곳으로부터는 적설도 심하고, 거목이 썩어 넘어진 것도 많아서 걷기에도 매우 곤란하다. 대체로 길은 연봉의 북쪽 기슭을 돈다. 오르고내리는 변화가 대단히 심하여 그다지 가쁘지는 않다.
오전 9시경 정각에 우리는 잔돌(細石)의 최고봉에 도착하였다. 잔돌은 정남향의 금잔디로 덮히고, 이름 그대로의 잔돌이다. 부서져 있는 돌들은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깨뜨려놓은 것도 같다. 동서(東西)는 약 4킬로미터나 되고, 남북은 2킬로미터쯤 되는 타원형의 분지이다. 수목은 하나도 볼 수가 없고, 잡초만이 무성하였던 자취만을 알 수가 있다.
멀리 서남단으로는 고찰 영신사(靈神寺)의 옛터만이 내려다 보인다. 반야봉, 노고단 등의 웅자가 보이고, 천왕봉의 장엄한 모양이 눈앞에 가까이 보인다.
9시20분, 잔돌을 떠나 여전히 눈에 미끄러지고 땀에 멱 감으며 고산(高山) 풍치가 늠름한 고목(枯木)이 많은 가운데를 지나, '장두맥이'(재)에 이르니, 오전 11시였다.
조금 더 오르니 얼음과 바위 사이에서 맑은 샘이 졸졸 흐른다. 눈으로 몸을 식히려던 우리는 미칠 듯이 반가웠다. 그 옆에는 허물어진 빈 터만이 남아 있다.
이로부터는 비탈이 대단하다. 더구나 모두가 빙판이 되어 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거목이 창창한 심림(深林)을 벗어나니 길은 소봉(小峰)의 북쪽 기슭을 돈다. 눈은 길이 넘치도록 쌓여 있다. 기며, 뭉기며 소봉을 돌아드니 자연의 화강암으로 된 통천문(通天門)이 눈 속에 묻혀 있다. 천왕봉에 통하는 문이다.
우리는 이 문을 지나, 오전 12시 정각! 저 천왕봉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 순간 우리는 흐르는 땀도 억제할 수 없이, 있는 목소리를 다하여 “만세!”를 연달아 불렀다. 양정(養正)의 힘있는 교가(校歌)로 지리산상의 넓은 허공을 울리었다.
해발 1천9백15미터! 그 얼마나 높은 산인가! 우리가 그 얼마나 두려워하던 산인가! 우리의 숙망(宿望)은 오늘(22일)로써 유감없이 성취되고 말았다. 오직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광활한 벽공! 구불구불 엎드린 연맥(連脈)들! 혹은 혹한의 엄동을, 혹은 화창한 방향(芳香)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마치 최후의 승리를 획득한 패왕(覇王)과 같고, 첩첩이 엎드린 연맥들은 굴복을 드리우는 것 같다. 우리의 가슴은 한없이 벌어지고, 주위에 있는 만물들은 한없이 적어 보인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 우리는 섭섭하게도 천왕봉을 이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왕봉아! 잘 있거라! 길게 길게 잘 있거라! 천하만물 끝이도록! 부디부디 잘 있거라!”
우리는 동북으로 연한 산 잔등을 따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허리까지 빠지는 적설은 우리의 걸음을 용이하게 허(許)하지 않는다. 바람에 날리는 눈은 우리를 더욱 농락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용감한 우리 일행! 그들은 승리에 만족을 얻어, 이 모든 장해물을 힘있게 물리치며 역진(力進)! 또 역진!
천왕봉에서 약 3킬로미터쯤 되는 지점에 이르니, 역시 백설이 가득한 좀 넓은 곳에 이른다. 산맥은 좌우 양편으로 갈라진다. 식은 땀을 말리며, 마른 목을 눈으로 축이며 열기만만(熱氣滿滿)한 얼굴로 서로 바라보며 환희에 넘치는 웃음을 웃는다.
그러나 원망스런 해는 우리에게 그러한 즐거운 시간을 길게 주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른편 길을 잡아 강하! 또 강하!
눈은 내려갈수록 점점 더 깊게 빠진다. 따라서 길이라는 것도 전연 분별할 수 없다. 이로부터는 다만 연맥의 잔등을 따르기로 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우리는 잔등도 잃고, 우리의 위치까지도 잃어버렸다.
수목이 무성하여 서로 얽히고, 하늘까지 덮어버린 거수(巨樹) 속으로 들어갔다. 지도를 펼치니 그것도 무용의 것이었고, 자석도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여, 내려온 길을 다시 오를 수도 없었다. 대단히 위험하고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실색하여 사방을 둘러보며 눈이 커진다. 주위에는 오직 거수가 빽빽하고, 넝쿨들이 사면팔방으로 얽히었고, 백설이 허리를 지날 뿐이다. 하늘도 볼 수 없고, 흙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한 가지의 “인가를 찾지 못하면, 눈속에서라도 자는 수밖에 없다” 하는 결심으로 내려왔다. 길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요, 인가를 찾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심림(深林)을 벗어나자는 것뿐이다.
두 다리를 뻗고 ‘스키’ 없는 ‘스키’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얽혀진 넝쿨, 쓰러진 나무, 눈에 매몰된 암석 등등으로 훼방을 당하여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다가는, 륙색을 멘 채로 몇 번이라도 굴러내린다.
오후 4시경! 반갑게도 우리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근처에는 터만이 남은 막(幕)의 자취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숲속에 싸여 있었다.
땀을 말리며 눈을 먹는다. 우리는 여전히 ‘스키’를 지친다.
천명(天命)이다!! 우리는 그 급한 경사를 미끌어져 내리느라고, 빠른 속도로 듯터내리더가 돌연 7~8길이나 되는 빙산의 절벽을 눈앞에 맞게 된 것이다. 하마터면 우리는 이 절벽에 떨어졌을는지도 모르는 것인데, 다행히도 이것을 피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목숨은 산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몸에서는 진땀이 비오듯하고, 소름이 끼친다. 정신없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니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어디서 들리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물소리 나는 곳을 찾으려고 각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물소리는 다른 먼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바로 발 밑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개천을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두렵기 한량없었다. 앞에 있는 절벽은 폭포가 얼어붙은 것 같다.
아직도 사방은 수목이 울밀하다. 우리는 다만 내리기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오후 5시반! 우리는 은은한 길을 얻었다. 근심과 불안에 잠겼던 우리의 얼굴에는 새로운 활기가 떠돈다. 계속되던 침묵도 환성과 잡담으로 깨어진다. 우리는 길만 좇아 내려간다.
얼마 지나니 한둘의 촌가가 수목 사이로 내어다 보인다. 우리는 잃었던 길이 어디인가? 또 이곳이 어디인가를 알고자, 동쪽의 작은 언덕(小丘)으로 올라갔다. 사방으로 인가는 점점히 보인다. 또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은, 천왕봉으로부터 화림암(花林庵)으로 내려뻗은 연맥의 서쪽 계곡으로 내려선 데 원인(原因)함을 알았다. 우리는 그 고생한 골짜기가 이상하게도 자세히 올려다 보인다.
해는 낙조에 임박하였다. 잠깐 숨을 돌린 뒤에 곧 인가를 찾아 동쪽으로 내려가니 오후 7시20분에야 겨우 삼칸초옥의 세 집 동리를 찾아들었다. 이곳은 경남으로, 유평리(油坪里)라는 동리였다. 이로써 우리의 지리산 정복은 끝까지 잘 구현되고 말았다.
1937년 3월 23일
유평리에서 환희에 넘치는 하룻밤을 새우고, 23일 도보로 산청읍(약 14킬로미터)에 나오니, 흐렸던 하늘에서는 무지한 빗방울이 탄환과 같이 떨어진다.
오후 1시30분, 자동차로 진주에 이르니 비는 점점 더 쏟아질 뿐이다. 잠깐 진주의 이야기나 듣고, 오후 4시반 차로 진주를 떠나 부산에 하차하니 오후 9시25분이었다.
비는 역시 마찬가지로 내린다. 신문사의 친절한 안내로 춘여여관(春汝旅館)에서 1박하고, 24일 아침 일찍이 운하(雲霞)에 싸인 절영도(絶影島)와 오륙도를 바라보며, 해운대온천으로 향하였다.
여러 날 동안 피로하였던 몸을 온천에 말갛게 닦아버리고, 험준한 산악에 몹시 시달린 눈을 창랑(滄浪)과 백사(白砂), 청송(靑松)으로 위안하고, 즉일 오후 9시5분 부산역발 봉천(奉天)행 열차로 25일 오전 8시에 경성역에 무사히 귀착하였다
출처 : 작은이의 산
글쓴이 : 산신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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