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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名士교사가 뽑은
211개
수필논설선언문연설문시소설
"名文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어른들에겐 추억과 감동, 학생들에겐 최고의 논술
참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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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
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李御寧
1. 設問조사 / 名士와 敎師 100명이 추천한 211개 한국의 名文... 趙成寬
◎ 개인별로는 趙芝薰(11표), 徐廷柱(9표), 咸錫憲 외 5人(6표) 順
◎ 작품별로는 「메밀꽃 필 무렵」,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기미 독립선언서」順
◆ 名士와 논술교사가 말하는 좋은 문장을 쓰는 법
▷ 漢文을
배척해서는 名文이 나오지 않는다... 徐基源
▷ 쉬운 글은 遇衆을 생산하는 혹세무민이 될 수도... 朴鍾萬
▷ 사전을 곁에 두고
名文을 배껴라... 李萬基
▷ 古典을 깊이 있게 읽어라... 이석록
▷ 선진국의 글쓰기 교육 - 영국... 크리스 프라이스
▷ 선진국의 글쓰기 교육 - 프랑스... 권지예
2. 수필
▷ 길... 金起林
▷
山村餘情... 李箱
▷ 倦怠... 李箱
▷ 수필... 皮千得
▷ 인연... 皮千得
▷ 나무... 李敭河
▷
딸깍발이... 李熙昇
▷ 木槿通信... 金素雲
▷ 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 吳相淳 ▷ 방망이 깍던 노인...
尹五榮
▷ 바둑이와 나... 崔淳雨
▷ 淸貧禮讚... 金晋燮
▷ 무소유... 法頂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李御寧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申榮福
▷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 鄭雲暎
▷ 돌아가는 배...
金聖佑
3. 소설
▷ 달밤... 李泰俊
▷ 메밀곷 필 무렵... 李孝石
▷
나무들 비탈에 서다... 黃順元
▷ 三代... 廉想涉
▷ 불효자식... 蔡萬植
▷ 霧津紀行... 金承玉 ▷ 죽음의 한
硏究... 朴常隆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趙世熙
▷ 혼불... 崔明姬
▷ 눈길... 李淸俊
▷
金翅鳥... 李文烈
4. 詩
▷ 白鹿潭... 鄭芝溶
▷ 自畵象... 徐廷柱
▷ 국화
옆에서... 徐廷柱
▷ 바위... 柳致環
▷ 깃발... 柳致環
▷ 별 헤는 밤... 尹東柱
▷ 마음의 태양...
趙芝薰 ▷ 눈... 金洙暎
▷ 타는 목마음으로... 김지하
▷ 물캐똥이... 高銀
▷ 落花... 李炯基
▷ 너를
기다리는 동안... 黃芝雨
▷ 하늘에 쓰네... 高靜熙
▷ 잡초는... 金鍾泰
5.
기행문
▷ 山情無限... 鄭飛石
▷ 畵帖紀行... 金炳宗
▷ 거센 파도를 헤치고... 金在哲
6. 논설
▷ 나라의 운명은 운수보다 정치에... 李承晩
▷ 독립정신... 李承晩
▷
是日也放聲大哭... 張志淵
▷ 나의 소원... 金九
▷ 헐려짓는 光化門... 薛義植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咸錫憲
▷ 志操論... 趙芝薰
▷ 일부 軍人들의 탈선행동에 警告한다... 崔鍾采
▷ 학문의 길... 朴鍾鴻
▷ 韓國
近代文學의 理解... 金允植
7. 선언문기타
▷ 己未獨立宣言書... 崔南善
▷ 419 선언문... 서울대 학생회
▷
국민교육헌장... 朴鍾鴻 ▷ 李退溪銅像銘文... 朴鍾鴻
▷군사재판 법정 최후진술... 金大中
8.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 最高의 名文은 적중한 예언
亂中日記徐廷柱의 이승만 傳記대대장의 李秉衡 수기崔秉宇의 휴전조인식 기사崔南善의 한국 海洋史
서론李洛善의 군사文化 옹호론朴正熙의 「철부지 학생들에게」吳之湖의 한글전용 비판李御寧의 「벽을 넘어서」金賢姬와 申相玉의 名言비숍 여사의
예언三國史記조선일보社說:「金正日 물러나야」
設問조사 - 한국의 名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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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士와
敎師 100명이 추천한 211개의 수필․논설․선언문․연설문․소설․ 시
名文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趙 成 寬
月刊朝鮮 기자: maple@chosun.com
조사지원 李 相 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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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렵다』/ 내용만 좋으면 과연 名文인가?
주요내용
『너무 어렵다』/ 내용만 좋으면 과연 名文인가?
金聖佑의 「돌아가는 배」
李御寧, 「山村餘情」 추천
黃順元-朴常隆-李文烈-崔明姬
洪命熹-金承鈺-趙世熙-李文求
趙芝薰의 志操論
徐廷柱의 自畵像
鄭浩承이 추천한
金洙暎의 詩 「눈」
李炯基의 落花
「山情無限」과 「畵帖紀行」
朴鍾鴻의 국민교육헌장
『金九의 「나의 소원」은 인류의
보편적 잣대』
李承晩의 논설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서울대 학생회의 4․19 선언문 / 名文 감상은 산림욕 효과
名文家 李御寧, 소설가 徐基源, 건축가 金洹의 名文 추천
月刊朝鮮은 5월 한 달 동안 각계의 名士(명사)와 전국의 유명 논술 교사(강 사)들을 대상으로 「20세기 한국의 名文(명문)」을 설문
조사했다. 名士 중 에서 추천 대상자를 선정한 기준은 자기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筆力(필력) 과 독서량을 인정받은사람을 중심으로 했다.
교사(강사)들의 경우 6大 도시 의 주요 고교와 학원과 방송 강좌(인터넷 웹사이트 운영 포함)를 통해 이름 이 알려진 사람을 선정했다. 이렇게
하여 200여 명을 선정, 이들에게 전화 나 팩스 혹은 이메일을 통해 詩 소설 산문 기행문 칼럼 서문 변론서 연설문 선언문 등 문학과 非문학을
총망라하여 평소 名文이라고 생각하여 즐겨 읽 었거나 지금도 읽는 대목을 세 개 이상 추천하고 간단하게 그 이유를 밝혀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이 설문지를 받은 이들 중 상당수가 『 너무 어렵다』거나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어떤 시인은
『젊은 날 名文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추천을 사양했다. 유력지의 칼럼니스트는 『여러 날
고민을 해보았는데 도저히 찾지를 못하겠더라』고 했다. 교사들도 못하겠다고 하기 는 마찬가지였다.
그랬다. 기자는 「名文 추천」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名文을 추천한다는 행위는 독서의 깊이와 양, 그리고 교 양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기에 몹시 조심스럽고 쑥스러운 일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名士 75명, 교사 25명 총 100명이 이번 조사에 응해 주었다(표 1, 2 참조).
이들이 수고스러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名文이 사라지고 非文과 誤文과 惡文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名文을 되살려 名文에 담긴 魂(혼)과 정신을 음미해 한국인의 정서를 순화시키자는 月刊朝鮮의 취지에 찬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일일이 書架(서가)를 뒤져가며 즐겨 읽는 구절을 찾아 보내주었다. 70代부터 30代까지 각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추 천한 名文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 名文들이 젊은 날 자신에게 커다 란 감동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그 감동의 餘震(여진)이 정신 세계의 深淵(심 연)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어떤 저명인사가 젊은 시절 어떤 글에 크게 영향을 받아 「오늘의 그」가 되었고, 「오늘의 그」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名文에 최소한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좋 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삶은 말하고 있었다. 기자의 개인적인 所感(소감)을 덧붙이자면, 이제까지 많은 조사를 해보았지 만 이번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작업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보내온 답안 을 이메일을 열거나 팩스로 받아볼 때 「이 사람은 과연 어떤 것을 명문으 로 생각하고 있나」하는 궁금증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답을 보내준 名士 75명 중에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에 의해 추천된 사람이 더 러 있었다. 많은 名文家들이 故人이 되었지만 생존 인물 중에는 皮千得, 徐廷柱, 李御寧, 申榮福, 金聖佑씨 같은 사람이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 추천 된 경우였다.
안타까운 일은 皮千得, 徐廷柱, 申榮福씨로부터 名文을 추천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未堂은 생존 인물 중 한국 최고의 名文家라는 사실이 이번 조사를 통해 다시 확인되었다. 편지를 보내고 여러 차례 전화를 넣었지만 老患(노 환)으로 병석에 있는 未堂은 전화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皮千得씨와 申榮福씨는 연락이 닿지 않아 추천을 받지 못했다. 조사 결과 시인 趙芝薰의 글을 추천한 사람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 음이 徐廷柱로 9명으로부터 추천되었다. 그리고 종교가 咸錫憲, 독립 운동 가 金九, 시인 尹東柱, 철학자 朴鍾鴻, 소설가 李孝石, 시인 李箱의 글이 각각 6명으로부터 名文으로 추천되었다. 수필가 皮千得과 한국학의 개척자 崔南善의 글을 각각 다섯 명이 골랐다.
단일 작품으로 보면, 李孝石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여섯 명의 추천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咸錫憲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와 崔南善의 「기미독립선언서」가 다섯 명으로부터 추천되었다. 趙芝薰의 「지조론」, 金九의 「나의 소원」, 金聖佑의 「돌아가는 배」도 각각 네 명이 골랐다.
내용만 좋으면 과연 名文인가?
李光勳 경향신문 논설고문은 『美文(미문)보다는 글에 魂이 담겨 있느냐를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까치글방 朴鍾萬 사장은 『소위 名文 이라고 알려진 것들 중에도 非文과 誤文이 많다』면서 『문장 형식에 맞춰 잘 쓴 것이라야 名文으로 본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30대 후반의 소설 가극작가인 朱仁錫(주인석한신대 교수)씨는 名文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名文은 大家(대가)의 몫이다. 범부가 때로 맛이 가서 꽤 빛나는 문장을 지어내 봤자 턱도 없다. 문장만으로 名文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다 . 名文의 언저리에는 저자의 이름 석 자가 후광처럼 어른거리고, 그 행간에 는 저자의 우뚝 선 생애가 네온처럼 반짝인다』
삼성경제연구소 崔禹錫 소장은 名文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좋은 글이란 내용도 좋아야 하지만 글 자체도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글의 장르나 대상 주제에 따라 문장 스타일은 달라질 수 있어도 기본은 마 찬가지일 것이다. 읽는 대상, 시대, 장소에 맞춰 的確(적확)한 힘과 어휘를 구사한 글이 좋은 글이며 글에 리듬이 있으면 더욱 좋다. 꾸준하게 좋은 글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쓸데없이 힘이 들어갈 땐 같은 분이라도 글이 떨 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보면 名文에 대한 定義(정의)가 설 것 같다. 名文이란 時空(시공)을 초월해 누가 읽어도 감동을 받는 글을 말한다. 80년 전에 나온 글도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본 것처럼 새롭고 신선하며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그런 글이 名文이다.
그렇다면 名文의 필요충분 조건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문장이 文法(문법)에 맞게 완벽하고 어휘 사용이 的確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朱仁錫씨의 말대로 문장만으론 名文이 될 수 없다. 여기에 내용이 좋아야 하 고 글쓴이의 魂이 담겨 있어야 한다. 美文이라고 해서 전부 名文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간혹 流麗(유려)한 문장을 읽으면서도 어딘가 허전 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글에 깊이가 없고 魂이 스며 있지 않기 때문이다.
金聖佑의 「돌아가는 배」
다음은 장르별로 어떤 글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名文으로 선정되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산문(수필) 분야에서 복수로
추천된 작품 위주로 살펴보자. 영문학자 이자 수필가인 皮千得(피천득)의 작품이 5명에 의해 추천되었다. 교과서에 도 실린 「인연」은
유영익(연세대 사학과 교수)씨와 윤갑희(경기 수리고 교사)씨가 골랐고, 「수필」은 이종덕(세종문화회관 총감독), 「산호와 진 주」는 소설가
박완서, 「맛과 멋」은 공명철(부산고 교사)씨에 의해 각각 추천되었다.
朴婉緖씨는 皮千得의 「산호와 진주」는 마음이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이 단 순하지 않다면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이라고 설명했다. EBS논술강사인 윤갑 희 교사는 「인연」의 맨 끝 문장,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 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하고」부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金聖佑 한국일보 논설고문이 1999년에 펴낸 책 「돌아가는 배」의 경우 名士 네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장, 송복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신봉승 방송작가가 그들이다. 盧在鳳 전 총리는 『이 책의 전체 문장이 전부 名文』이라고 말했다. 사극 작가이면서 현재 동해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로 있는 신봉승씨는 『한국어로 이렇게 아름다운 최고의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감동적이었다』면서 『 글의 시작 처음부터 10페이지 정도까지는 너무 압권이어서 그 어느 부분을 발췌해도 모두 名文』이라고 했다.
法頂(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성공회대 경제학과 申榮福(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각각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무소유」의 경우 박종만(까치글방 대표), 권영민(서울대 국문과 교수), 김정환(광양제 철고 교사)씨가 골랐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나는 한 송이 펜지꽃이 부끄럽다」는 시인 강은교(부산 동아대 교수)씨, 「書道의 관계론 」은 박종만(까치글방 대표)씨, 「여름 징역살이」는 허섭(배재고 교사)씨 가 각각 추천했다.
李敭河(이양하)의 작품도 세 명이 추천했다. 건축가이자 도서출판 광장 대 표인 金洹(김원)씨는 「나무의 威儀」, 부산 배정고 교사 송차수씨는 「나 무」, 서울대 국문과 교수 권영민씨는 「경이 건이」를 각각 뽑았다. 알려 진 대로 「경이 건이」는 현 서울시장인 高建(고건)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 를 쓴 것이다. 高시장의 부친과 친구 사이였던 李敭河 선생이 친구의 아들 형제(경이와 건이) 이야기를 쓴 것이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李御寧씨의 산문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윤금 초, 이인화)와 「흙 속에 저바람 속에」(송복)가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 시조시인 尹今初씨는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중에서 아래 부분을 특히 名文이라고 했다.
「의미- 그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 이전의 세계 그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세계이다. 하지만 등에 언어의 혹을 메고 다니는 인간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그런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음악만이 그 바늘귀로 자유로이 왕래한다」
수필가 金素雲(김소운)의 작품도 두 사람이 골랐다.「木槿通信(목근통신)」 은 러시아대사와 외무장관을 지낸 孔魯明(동국대 교수)씨가 추천했으며 「馬耳東風帖(마이동풍첩)」은 가곡 작곡가 李秀仁씨가 골랐다.
李御寧, 「山村餘情」 추천
교과서에 실린 閔泰瑗(민태원)의 「청춘예찬」도 논술교사 공명철씨와 서계 현씨 두 사람이 골라주었다. 여기서 잠깐 「청춘예찬」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자.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鼓動(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巨船(거선)의 汽罐(기관)과 같이 힘있다 .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 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얼음이 있을 뿐이다…」
공명철 교사는 「청춘예찬」에 대해, 『적절한 비유와 표현과 함축적인 어 휘, 그리고 對句와
영탄법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 명문장』이라고 설명했다. 「문장강화」를 쓴 소설가 李泰俊의 소설 「달밤」이 具常 시인에 의해 추 천되었다.
具常씨는 「달밤」에 대해, 『내용도 순수했지만 문장 자체가 서 정적이고 맑고 깨끗하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1989년, 대원사)는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이동진씨가 골랐다. 시인 이문재는 한국일보 편집위원 김훈이 쓴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를 선택했다.
이번 조사에서 천재 시인 李箱(이상)의 산문도 두 개 추천되었다. 하나는 잘 알려진 「倦怠(권태)」이고, 다른 하나는 李御寧씨가 고른 「山村餘情」 이다. 「성천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산문은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李御寧씨가 이 작품을 추천하면서 보내온 추천 이유는 뒤에 별도의 상자 기사로 처리했다.
소설에서는 李孝石(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단일 작품으로 여섯 명 의 추천을 받았다. 김준성(현 이수 그룹 회장, 前 경제부총리), 박근(현 한 양대 교수, 전 유엔대사), 박건호(시인․작사가), 김한빈(논술 사이트 운영 ), 이석록(화곡고), 윤갑희(경기 수리고)씨가 골랐다. 朴健浩씨는 『이 작 품은 분명 소설인데 詩的인 표현으로 넘쳐나는 작품』이라면서 『서정주의 「자화상」, 정비석의 「산정무한」과 함께 외우다시피 한다』고 설명했다. 소설가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金埈成씨는 「메밀꽃 필 무렵」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문체의 아름다움이나 작품 전체를 감싸 흐르는 짙은 서정성은 짧고 긴 문 장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한 점 풍경화를 연출해 낸다.
특히 달빛에 젖은 메밀꽃의 흰색과 붉은 메밀꽃 대궁, 콩잎과 옥수수 잎새의 푸른색, 그 속에 잠긴 채 걸어가는 남루한 차림의 장돌뱅이와 나귀의
대비는 현란한 생명의 약동을 펼쳐 보인다』
요절한 천재 시인 李箱의 경우 소설 두 작품(봉별기, 날개)과 산문 두 작품 이 추천되었다.
연세대 국문과 馬光洙 교수와 이화여대 국문과 이인화 교수 가 「逢別記」를, 서화가 김상옥씨와 경복고 이원희 교사가 「권태」를, 송 탄여고 이도희
교사가 「날개」를 골랐다.
EBS 논술강사이기도 한 이원희 교사는 「권태」에 대해, 『날카로운 감성과 정확한 언어 구사로 현대인의 무료한 삶의 외면과 내면을 똑 떨어지게 일 치시킨 名산문』이라고 했다. 이도희 교사는 소설 「날개」 중의 「…육신 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은 銀貨(은화)처럼 맑소…」 부 분을 특히 명문이라고 지목했다.
소설가 李光洙(이광수)의 작품도 네 개가 선정되었다. 安秉煜(안병욱) 숭실 대 명예교수는 「도산 안창호」와 「유정」을,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소설 가)는 「금강산유기」, 정진석 외국어대 신방과 교수가 각각 「민족개조론 」을 골랐다.
안병욱 교수는 두 작품 외에도 「동포에게 告하는 글」(안창호, 1924년)을 추천했는데 이 글도 사실은 이광수가 정리한 글이었다고 한다. 도산 安昌浩가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쓸 당시 그는 중국 北京에 있었다. 安昌浩 는 3․1 운동 이후 조국의 동포들이 크게 낙망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동 포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安昌浩는 北京의 한 여관에 장기 투숙하면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춘원 李光洙를 오게 해 구술 정리한 것이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다. 李光洙는 이 글을 동아일 보에 게재하려 했지만 日帝(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한다. 甲子年(갑자 년)에 발표된 글이라고 해서 당시는 「甲子 논설」이라고도 불렸다. 安교수 는 『그 당시 이 글은 名文 중의 名文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 향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春園이 「도산 안창호」를 쓴 것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조선일보 부 사장으로 있을 당시였다. 흥사단서 島山의 사상․인격․생애를 정리해달라 는 부탁을 받고 집필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 책은 해방 직후 지식인 사회에 서 애독서가 되었다.
「有情」은 春園 스스로가 「후세에 남기고 싶은 소설」이라고 한 작품이다 . 문학평론가들은 量에서는 「흙」 「무정」을 당할 수 없지만 質에서는 「 유정」에 비할 만한 소설이 없다는 평가를 한다. 安교수는 『정의, 아름다 움, 숭고함, 고마움을 잘 그렸고 한국 문학 중 최고의 감격을 준 작품』이 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생전의 春園과 알고 지낸 安교수는 이런 에피소 드를 소개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선우휘 조선일보 논설위원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선우형, 우리나라 소설 중 어떤 것을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 랬더니 선우형이 「그야, 유정이지」라고 대답하더군. 「나도 그런데」 라 고 말하면서 서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黃順元-朴常隆-李文烈-崔明姬
黃順元(황순원)씨의 작품도 네 사람이 선정했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 과 「달을 듣는 강물」의 저자 김진태 인천지검 특수부장이 「소나기」를, 소설가 이호철씨가 「목넘이 마을의 개」, 소설가 金埈成씨가 「나무들 비 탈에 서다」를 각각 골랐다. 金埈成씨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黃順元 문학의 절정기에 씌어진 이 작품은 전쟁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 어보인 걸작이다. 단편소설 「소나기」에서 詩的인 문체로 두 어린 주인공 의 애잔한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해 낸 그는 이 작품에서 6․25와 4․19 이 후 좌절과 무기력에 빠진 젊은이들의 의식세계를 그려내며 역사와 인간, 전 체와 개인을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
李文烈(이문열)씨의 작품도 네 사람이 추천했다. 「시인」은 연세대 송복 교수, 「황제를 위하여」는 김광웅 중앙인사위원장, 「젊은 날의 초상」은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 「금시조」는 金埈成 이수그룹 회장이 각각 골 랐다. 金埈成씨는 「金翅鳥」에 대해 이런 추천 이유를 밝혔다.
『李文烈의 문학에는 도도한 선비정신과 눈이 부실 정도로 유려한 문치, 그 기저에 흐르는 낭만주의적인 정신이 도처에서 드러난다. 그의 대표작 가운 데 하나이자 한국 중편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금시조」는 이런 그의 문학 적 요인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朴常隆(박상륭)씨의 「죽음의 한 연구」는 시인 신현림, 시인 이문재, 한국 학원 강사 김진국씨에 의해 추천되었다. 신현림씨는 「죽음의 한 연구」를 펴고 아무 곳이나 읽을 때마다 이런 감정이 든다고 했다.
『껄쩍하니 술에 취한 듯, 계곡물처럼 콸콸 흐르는 듯 시적인 문체로, 뿌리 깊은 우리 언어의 육체를 보여주되 육체가 정신과 도저히 분리될 수 없이 옥박해 오니, 숨결로, 혼으로 나의 마음을 휘감아오니 오늘 내가 땅에 발을 처박고 한 그루 불두화로 피어나 생명으로 태어남을 감사하며 펑펑 울고 싶구나』金東里의 소설 「巫女圖」와 문학평론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도 세 사람이 골랐다. 같은 소설가인 李浩哲씨와 金埈成씨가 「무녀도」를, 역시 소설가인 李文求씨가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을 택했다. 金埈成씨는 『우리의 기층사상인 무속의 세계가 서구화의 바람 앞에 마치 저 녁 노을처럼 마지막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비장미를 풍기는 작품』이라면 서 『변화의 충격 앞에 힘겹게 버티고 서서 무속을 지켜내려는 삶의 비극적 고뇌가 잘 그려져 있다』고 했다.
최근 작고한 崔明姬(최명희)의 장편 대하소설 「혼불」은 두 사람에 의해 추천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번역으로 알려진 번역가 겸 작가 김석희씨와, 「혼불」과 「로마인 이야기」를 펴낸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씨가 이 작품을 선택했다. 김석희씨는 「혼불」을 택한 이유 를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혼불」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을 새긴」 각고의 산물이어서, 그 어디를 펼치든 그윽하고 청아하고
유려하고 심장한 글월이 아닌 것이 없다. 특히 제3권 115~116쪽 대목은 비유와 상징으로 조 탁한 문장에 동양 사상의 바탕까지 함축하고
있으니, 그 감동의 진폭을 어 찌 가두랴』
金彦鎬씨는 「혼불」을 가리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정신을
가장 잘 새겨낸 글』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제 10권 제1장 「청사초롱」으로부터 시작해서 제10권의 마지막 장 「눈물의 비늘」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극채색으로 그려 내고 있다』고 평했다.
「濁流」의 작가 蔡萬植도 두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징소리」의 소설가 문순태씨(조선대 교수)와 박정백 교사(서울 잠신고)가 각각 「불효자식」 과 「태평천하」를 골랐다.
洪命熹-金承鈺-趙世熙-李文求
金承鈺의 「무진기행」도 소설가 金埈成씨와 사극 작가 辛奉承씨가 추천했 다. 辛奉承씨는
「무진기행」에 대해 『한글로 쓰는 문학 중에서도 소설 문 장으로는 가장 성공한 문장』이라고 평했다. 金埈成씨는 이 작품을 고른 이 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金承鈺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어두운 시절을 살아온 이 땅 지식인들 의 자화상과도 같다. 경제 우선주의에 밀려 무기력과 굴욕, 허무로 점철된 자유와 젊음의 표상이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를 끝없는 불안, 방황, 머뭇거림, 부끄러움 등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 상황 을 잘 암시하고 있다』
趙世熙(조세희)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소설가 이순원 씨가 추천했다. 이순원씨는 대학 2학년 때 소설을 공부하면서 「소설적 문 장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 서 그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했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單文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그 단문에 매료되었다 . 아니, 그저 단순한 단문이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적 문 제에 대하여 단도처럼 핵심을 찔러 말하는 그의 글쓰기를 존경하게 되었다』李文求(이문구)의 소설집 「冠村隨筆(관촌수필)」는
문학평론가 申水晶씨에 의해 추천되었다. 申씨는 이 소설집에서 단편소설은 「空山吐月(공산토월 )」의 아랫 부분을 발췌했다.
「…어지간히 반성을 하고 보니 나는 남들의 근거 없는 짐작처럼 냉혹 잔인 난폭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고, 그런 짓을 두둔하거나 감싸준 적도 없 음이 뚜렷했다. 그러나 대인 관계만은 다소 별쭝스러웠으니, 냇자갈처럼 야 무지고 매끄러운 알로 깐 자와, 말많고 잔주접 잘 떠는 되다 만 인간, 단작 스럽고 근천맞은 좀팽이 따위에게 박절하게 대해 온 사실은 스스로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申씨는 李文求 소설 중에서 특히 이 부분을 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채만식, 김유정에 이어 토속어의 세계를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구사하 고 있는 작가로 이문구를 들 수 있다. 그의 문장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한학 의 전통에서 은연중 배어 나오는 간결미와 정확성, 우리 고유어의 정겨움, 그리고 일상적인 사물에 투영된 비유어의 생생함 등이다. 위 인용문 역시 그의 이러한 개성을 잘 보여준다. 「별쭝나다(별나다)」 혹은 「단작스럽 다(잇속을 차리다)」 등 이제는 거의 잊혀져 가는 단어들이 빚어내는 정감 어린 애수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의 몰락을 관조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며, 「냇자갈처럼 야무지고 매끄러운 인간」이라는 표현 속에는 자연의 심상에 익숙한 자만이 원활하게 구사할 수 있는 문장감각이 숨어 있다. 아마도 이 후의 우리 문학사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수공예품 문장임에는 틀림없다』 부산 동의대 張良守(장양수) 교수는 뛰어난 사실성이 돋보인다는 이유로 소 설가 洪命熹의 「임꺽정」을 추천했는데, 특히 「火賊篇 三」에서 당대 조 선 포도청 제일의 검사 연천령과 임꺽정의 칼싸움 장면(사계절刊, 임꺽정 제9권, 286~289쪽)이 압권이라고 덧붙였다.
趙芝薰의 志操論
詩 부문에서는 趙芝薰(11명 추천)과 徐廷柱(9명 추천)가 단연 두드러졌다. 특이한 점은 시인 趙芝薰이 詩를 포함한 산문과 논설,
그리고 연설문까지 두루두루 추천을 받았다는 점이다. 조지훈의 「僧舞(승무)」를 선택한 사 람은 시인 具常씨. 그는 『「僧舞」는 조지훈이 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승무를 승화된 표현으로 써내려가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詩 「마음의 태양」은 부산 부경대 교수 姜南周(강남주)씨가 선택했다.
姜南周 교수는 「마음의 태양」과 처음 만난 것은 하동중학교 2학년 시절이 라고 했다. 6․25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지리산 공비가 출현해
토벌군이 진을 치고 있던 뒤숭숭하던 시절에 영어교사가 칠판 가득 적어놓은 詩가 바로 「마음의 태양」이라고 했다. 姜교수는 이런 소감을 밝혔다.
『그의 詩는 마치 최면제 같았다. 그때의 나에게 이보다 더한 세계 명작이 란 없었다. 어떤 名문장도 여기에 비할 수가 없었다. 암울한
소년 시절의 나에게 미래를 열어주고 꿈을 갖게 한 詩였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랬 고 회갑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논설인 「志操論」을 선택한 사람은 경향신문 논설고문 이광훈씨, 맛칼럼니 스트 고형욱씨, 부산고 교사 공명철씨, 서울 화곡고 교사 이석록씨였다. 산 문 「돌의 미학」은 서울대 교수 권영민씨와 맛칼럼니스트 고형욱씨가 골랐 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放牛山莊記」를, 맛칼럼니스트 고형욱씨는 「나의 식도락」을 각각 추천했다.
朴婉緖씨는 수필 「放牛山莊記(방우산장기)」를 고르면서 『詩人으로 알려 져 있는 趙芝薰은 수필에서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했다. 「방우산 장기」도 그 중 하나라는 것. 朴婉緖씨는 『그분의 수필을 읽으면 반듯한 문장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농담조로 내갈기는 문장이나 惡文이 범람하는 요즘 우리를 순화시켜줄 만한 글』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일보 金薰 편집위원은 고려대 문과대 교수이던 조지훈이 1950년 6월27 일 문과대학생들 앞에서 한 연설을 골랐다. 金씨는 『공산군이 미아리 고개 를 넘어 고려대 근처에서 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행한 30代의 젊은 교수의 생각이 놀랍다』고 말했다. 이 연설문은 나남출판사에 서 나온 「조지훈 全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徐廷柱의 自畵像
未堂 徐廷柱는 「自畵像」 「국화 옆에서」「上里果園」 「無等을 보며」가 9명에 의해 천거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대중에게도 친숙한
「국 화 옆에서」와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自畵像」이 똑같이 세 사 람에 의해 선택되었다. 「상리과원」은 두 사람이었다.
먼저
「국화 옆에서」를 고른 사람은 소설가 金埈成씨, 민속학자 任東權씨 , 삼성경제연구소장 崔禹錫씨였고, 「自畵像」은 건축가 金洹씨, 대중가요 작사가
朴健浩씨, 부산학원 논술강사 강원용씨가 뽑았다.
金埈成씨는 「국화 옆에서」에 대해, 『미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국 화 옆에서」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밑바탕으로 자연계의 순환 원리를 설화 체 형식으로 쓴 것으로 현실의 무한한 아픔을 극복하려는 초인적 의지와 인 생의 무상함을 한 송이 국화꽃에 비유한 명작』이라고 말했다. 朴健浩씨는 『「自畵像」은 상식적 언어를 주관적으로 자유분방하게 해석한 것이 매력 』이라며 『특히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부분은 名文 중의 백미』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自畵像」의 일부분을 잠시 음미 해 보자.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 만 하드라/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 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尹東柱의 「序詩」는 시인 金光林, 외국어대 교수 鄭晉錫씨, 무역협회장 金在哲씨가 각각 골랐다. 「별헤는 밤」은 연세대 교수 馬光洙씨, 인천지검 특수부장 김진태씨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인천 문일여고 교사 이 만기씨가 선정했다.
너무나 유명한 尹東柱의 「序詩」에 대해서 시인 金光林씨는 『사기, 협박 , 위선으로 얼룩진 사바세계에서 金力과 權力이 판을 치는 한 永遠(영원)한 良心(양심)의 소리로 남아 있을 듯하다』고 평했다.
柳致環의 詩도 네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과 金炳局 고려대 교수가 「바위」를, 검찰총장을 지낸 鄭銶永(정구영) 변호사가 「깃발」을, 무역협회장 金在哲씨가 「행복」을 각각 선정했다. 鄭銶永 변호사는 『名文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즉각적으로 靑馬 柳致環의 「깃발」을 거명했다. 책상 머리에 붙여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또 보 는 것이 「깃발」이라고 했다. 鄭변호사가 柳致環의 「깃발」과 처음 대면 한 것은 부산고등학교 1학년 때라고 한다. 鄭변호사는 이 詩를 읽을 때마다 『음미할수록 맛이 나면서 이렇게 간결하면서 또 멋진 문장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젊은 시인으로는 베스트셀러 「연어」의 작가로 이름이 알려진 안도현씨의 詩 「너에게 묻는다」가 추천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총감독 이종덕씨와 인
천 인성여고 교사 이한수씨가 이 詩를 선정했다. 「너에게 묻는다」는 단 세 줄이다. 이번에 名文으로 추천된 작품 중 가장 적은 글자수로 名文반열
에 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金素月(김소월)도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시인 具常씨가 「산유화」를, 가곡작곡가 李秀仁씨가 「진달래꽃」과 「산유화」를, 소설가 李文求씨는 김소월 詩 전체를
명문으로 뽑았다.
具常씨는 「산유화」를 추천한 배경에 대해, 『인간의 단독자적인 면과 더 불어서의 면을 잘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다』면서 『일견 자연 서경 같으면서도 존재론적인 詩가 바로 산유화』라고 설명했다. 李文求씨는 「진달래꽃」과 관련, 『시대를 초월한 가장 대중적이고 아름다 운 작품』이라면서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최근 연변 작가들을 만났는데 김소월 선생의 詩와 그분의 고향에 있는 詩碑(시비)를 화제로 삼았다. 역시 김소월 선생의 작품은 남북간 누구나 공감 할 수 있고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는 민족적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李殷相(이은상)의 「가고파」(이수인), 「성불사의 밤」(임동권), 「無常」 (구상)도 추천되었다. 「無常」은 노산이 동생의 부음을 접하고 인생의 무 상함을 쓴 산문이다.
鄭浩承이 추천한 金洙暎의 詩 「눈」
金洙暎의 詩는 세 사람이 뽑았다. 같은 시인인 鄭浩承(정호승)씨는 「눈」 을, 논술교사인 이광수(숭의여고)씨와 김한빈(논술 사이트
운영)씨가 각각 「시여, 침을 뱉어라」와 「폭포」를 골랐다.
鄭浩承씨가 특히 감동을 받은 부분은 「눈」의 마지막 연이라고 한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 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鄭浩承씨는 「눈」을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1970년대 초 나는 20代였고 한창 詩를 공부할 때였다. 詩를 하는 사람들 에게는 앞 시대의 많은 詩들에서 영향을 받게 되는데 나에게는 김수영의 詩 가 그랬다. 나는 김수영 詩에서 詩的 洗禮(세례)를 많이 받았다』鄭씨는 특히 「가슴의 가래라도」라는 표현이 당시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처음에는 순결의 파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의 표현에 있어 상징의 의 미를 이해해 갔다. 「가래」라는 것은 1970년대 유신 시대의 압박에서 詩人 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의 힘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기억되는 문장이다』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알려졌던 김지하의 詩 「오적」 「황토」 「타는 목 마름으로」도 세 사람이 추천했다. 「황토」는 대성학원 강사 마상룡씨가, 「타는 목마름으로」는 강원과학고 유일환씨가 각각 선정했다. 「五敵」은 소설가 李文求씨가 골랐는데, 그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金東里 의 문학평론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도 명문으로 선정한 바 있다. 李씨는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은 『우리나라 본격 순수 문학에 있어 經典과도 같은 글』이라고 찬사했다. 또 「五賊」은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30년 동안 문인, 지식인의 민주화 운동과 현실 인식을 새롭게 하고 현실에 관심을 갖게 한 최초의 기폭제였고 단서였다』고 평가했다. 李씨는 자신이 반대적인 성격의 두 글을 名文으로 추천한 이유에 대해 『두 바퀴 가 잘 대응, 대비되며 문학사를 이끌어 오고 있고 각각의 성격에 있어 시작 이 되는 개념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일환 교사는 「타는 목마름으로」를 골랐다. 그는 『이 작품이 암담한 현 실 속에서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절규를 서정적으로 잘 표현했다 』면서 『아울러 민족의 어두운 시대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시인의 파란만 장한 삶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李炯基의 落花
朴木月의 詩 「韓服(한복)」은 원로시인 金光林씨, 시문장 「체험적 실험」 은 서울대 교수 朴東奎씨가 각각 골랐다. 朴木月의 「韓服」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다.
<…그것은 입성이 아니다/비로소 돌아오는 질기고 너그러운/숨결이 베틀질 한 씀씀한
生活/肉身을 싸안아 肉身을/벗게 하는/무명 바지 저고리에 玉色 을 물들인 韓服 >(「韓服」의 末句)
金시인은 『우리나라 고유의 옷 한복을 이토록 絶唱(절창)한 노래를 일찍이 나는 보지 못했다』면서 『한복은 입성(옷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아니라 육신을 싸안아 육신을 벗게 하는, 靈的(영적)으로 승화된 세계를 감싸는 것으로 發想(발상)된 이 놀라움』이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李相和(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건축가 김진애(서울포 럼대표)씨와 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씨가 골랐고, 李陸史(이육사)의 「曠野( 광야)」는 부산 동의대 교수 장양수씨와 경복고 교사 이원희씨가 골랐다. 李炯基의 시 「落花」는 두 명의 논술교사(이순희, 공명철)가 천거했다. 「落花」의 한 대목을 보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 다운가 」이다.
공명철 교사는 「落花」를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떨어지는 꽃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열매를 맺기 위한 고통으로 생 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는 인간사를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만 남을 위한 헤어짐의 고통을 담담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수용하고 있다』 시인 高銀은 「白石 詩全集」을 추천했다. 「白石 시집」에 대해서는 『근 대 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詩 중 하나』라면서 『모국어를 사용하여 사물과 대상을 관찰하는 정화된 시선이 놀랍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金光林 시인은 鄭芝溶의 「白鹿潭」 첫 句를 추천했는데 그 배경에 대해,
『백록담에 두 번 가봤지만 한라산에 오를 때마다 이 귀절을 되뇌이다 보면 피곤도 잊곤 한다』면서 『표현에 있어 상황 제시만으로 감정을 배경에 숨 겨놓은 名文』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겸 극작가인 朱仁錫(주인석) 한신대 교수는 만해 韓龍雲(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추천했다.
朱씨는 大家의 빛은
序文(서문)에서 발한다면서 「님의 침묵」의 서문인 「 군말」을 소개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衆生이 釋迦의 님이라면 철학 은 칸트의 님이다. 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戀愛가 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自由에 알뜰한 拘束을 받지 않더냐. 너 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洋이 기루어서 이 詩를 쓴다>
「山情無限」과 「畵帖紀行」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鄭飛石(정비석)의 경우, 소설보다는 그의 기행문 「山情無限」이 명문으로 추천되었다. 대중가요 작사가
朴健浩씨와 1996년 「달을 듣는 강물」(수월 스님 이야기)을 쓴 바 있는 김진태 인천 지검 특수부장이 「山情無限」을 골랐다. 朴健浩씨는
「山情無限」의 주요 대목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고 했다. 김진태씨가 이 글에서 특히 명문이라 고 생각하는 부분이라며 발췌한 곳은 다음과 같다.
<…태자의 몸으로 麻衣(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년 사 직을 망쳐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 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 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在天이라, 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苦行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두터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 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腐土(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 각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1998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서울대 미대 金炳宗 교수의 「畵帖紀行(화첩 기행)」은 서울대 부총장 宋炳洛씨에 의해 추천되었다. 宋부총장은 특히 「 아리랑과 정선」 편이 名文이라고 추천했는데 그 이유를 『김병종은 한국 사람과 문화와 풍토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데다 젊어서부터 글을 많이 써서 좋은 문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대 교수 兪弘濬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도 무역협회장 金在哲씨 와 성남고 교사 강호영씨가 천거했다. 강호영 교사는 특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의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부분이 白眉라고 했다. 「…만약에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 해 준다면 나는 내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 강교사는 이 부분은 저자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라고 부연했다.
현재 무역협회장인 金在哲씨의 기행문 「거센 파도를 헤치고」도 저자에 의 해 自薦(자천)되었다. 동원산업의 창업자인 金在哲씨는 기업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筆力을 먼저 인정받은 사람이다. 원양어선 선장 시 절 金회장이 쓴 글이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남태평양에서」), 중학교 2 학년(「바다의 寶庫」),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거센 파도를 헤치고」)에 실려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세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海洋(해양) 기행문이다.
朴鍾鴻의 국민교육헌장
종교가이자 민권운동가 咸錫憲(함석헌)의 글이 6명의 추천을 받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한승헌 변호사, 김재철 무역협회장,
이광훈 경 향신문 논설고문, 김언호 한길사 대표, 정진석 외국어대 교수로부터 선정되었으며, 「聖書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가 장기홍 전 경북대
지질학과 교수에 의해 천거되었다. 장기홍씨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 중에 서 「해방」과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가 명문이라고
했다. 金彦鎬 대표는 『咸선생님의 글들은 그 사상뿐 아니라 어문일치도 그렇고 시적인 호소력으로 「현대 한국의 최고 명문」』이라면서 『여러 글들이
있 지만 특히 이것을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副題(부제)가 붙은 이 글(생각하 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咸錫憲은 이승만을 임진왜란 때 압록강가에서 감 상적인 울음을 운 宣祖(선조)에 빗대어서 비판했다. 李承晩(이승만)도 부산 에서 울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은 鄭晉錫 교수가 뽑아온 부분이다. 「…울기만 하면 무엇해? 울려거든 민중을 붙잡고 울었어야지. 민중 잡아먹 고 토실토실
살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 보고 울어서 무엇해? 여우 같고 계집 같은 소위 측근자 비서 무리들 보고 울어 무엇해? 나라의 주인은 고 기를
바치다 바치다 쓰러지는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 다?…」
철학자 朴鍾鴻(박종홍)의 글도 여섯 명의 추천을 받았다. 「학문의 길」은 소설가 문순태씨, 서울대 교수 권영민씨, 무학여고 교사 김대하씨가 각각 추천했고, 울산대 석좌교수 최정호씨는 「李退溪銅像銘文(이퇴계 동상 명 문)」, 연세대 교수 함재봉씨는 「국민교육헌장」, 서울대 박동규 교수는 「학문의 본질」을 각각 골랐다.
연세대 정외과 咸在鳳 교수는 「국민교육헌장」을 추천했다. 咸교수는 『엉 뚱하다고 생각지는 말아 달라』며 이런 소감을 밝혔다.
『朴鍾鴻 선생의 국민교육헌장은 우리 세대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헌장」 이다. 얼마나 외웠던지 어디 가서 타자 연습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바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치곤 한다. 후에 내용만으로 볼 때 문제가 있다는 말도 많았으나 문장이 매끄럽고 문체에선 힘이 느껴진다』
『金九의 「나의 소원」은 인류의 보편적 잣대』
金九의 「나의 소원」도 여섯 사람이 추천했다. 洪思德 국회부의장(한나라 당․5選)은 白凡 金九의 「나의 소원」 중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한 편 을 名文으로 추천했다. 이 글은 李鍾德 세종문화회관 총감독과 건축가 金鎭愛씨, 정일학원 강사 박종씨의 추천에도 포함되는 것이다. 시인
高銀과 연 세대 사학과 柳永益 교수는 「백범일지」를 골라주었다. 高銀씨는 『2~3년 마다 「백범일지」를 한 번씩 읽고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다.
박종씨는 「나의 소원」은 주장의 명료성, 문장의 문법성, 현실인식의 명증 성, 그리고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 등이 돋보인다고 했다.
洪思德 국회부의장은 『좋은 글이 학벌이나 재주가 아니라 깊은 묵상에서 저절로 우러난다는 살아 있는 본보기』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나의 소원」은 배달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보편적인 잣대』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韋菴 張志淵의 명논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은 姜英勳 세종 재단 이사장, 李光勳 경향신문 논설고문, 鄭晉錫 외국어대 신방과 교수가 골랐다. 鄭교수는 「대호척필」도 이와 함께 추천했다.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 황성신문 사장이던 張志淵이 쓴 것이다 . 「是日也放聲大哭」은 한문투의 문장이기 때문에 한글로 번역된 것을 읽 어야 문장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姜이사장은 『이 사설은 全文에 민족정 기가 넘쳐 흐르고 겨레의 폐부를 찌르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 추천한다』 고 밝혔다.
「大呼擲筆」(황성신문 1903년 2월5일자)은 황성신문의 경영이 어려운 것은 독자의 숫자가 적고 구독하는 사람들은 구독료를 떼어먹으니 더이상 신문 을 발행할 방법이 없어 「크게 소리 지르고 붓을 던진다」는 논설이다. 정 진석 교수가 보내온 이 논설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오호라, 본사는 영영 장님 귀머거리가 되었도다. 그러나 본사의 장님 귀 머거리됨을 비감함이 아니라, 全 국민의 장님 귀머거리됨을 분하고 한탄스 럽게 여겨 크게 소리지르고 둔한 붓을 던지노라」
이 논설이 나가고 나자 많은 독지가들이 성금을 신문사로 보내와 다시 신문 을 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李承晩의 논설문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초대 대통령 李承晩의 글도 두 사람이 천거했다 . 駐UN대사를 지낸 朴槿(한양대 교수)씨는 20세기
초(1904)에 나온 李承晩 의 「독립정신」을 추천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柳永益씨는 「독립정 신」과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제국신문, 1901.2.8 기고)를 택 했다. 「독립정신」은 현대 한글이 나오기 전인 조선조 말엽에 우리말로 쓰 여진 최초의 「순한글
논술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朴씨는 추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현대 한국 정치사상의 거대한 저수지와도 같다. 거기에는
오늘날 에 우리 정치 사회 외교가 직면하는 현안들의 거의 모두가 직간접으로 거론 되고 문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상실하던 무렵의 우리
민족 역사에 관한 살아 있는 증언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의 문장도 논리 전개 방식이 나 직유법의 구사에서 그 후에 나온 어떤 학술 서적이나
논술보다 뛰어난 면을 지녔다고 믿는다. 예술에서 추상화가 타락하면 칠장난이 되는 것처럼 요즘 우리들 젊은 세대간에는 「현대성」과 「진보성」의
탈을 쓴 글과 말 의 장난이 난무하고 있다. 우남의 「독립정신」은 이 같은 말의 장난병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李承晩 연구의 권위자인 柳永益 교수는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 라는 논설에 대해 이런 평을 했다.
『이 글에서 청년 이승만은 나라의 흥망성쇠란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정 치, 즉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는 점을 어려운 한문 용어들을 명쾌 하게 구사하면서 설득력 있게 논파하고 있다. 언론인 이승만이 남긴 여러 名文 가운데 하나로서 내용이나 문장의 기교면에서 우리나라 개화기의 명사 들이 남긴 논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백미라고 간주할 수 있다』柳永益 교수는 20세기 초반의 名文으로 이것과 함께 朴容萬(박용만)이 191 0년 1월, 李承晩의 책 「독립정신」의 추천사로 쓴 「後序(후서)」를 들었다.
『이 글은 1900년대 초에 이승만과 한성 감옥서 囹圄(영어) 생활을 같이 하 면서 이승만과 결의 형제까지 되었던 박용만(1881~1928)이 이승만이 옥중에 서 저술한 「독립정신」의 원고를 미국으로 비밀리 반출하여 LA에서 발간할 때 집필한 일종의 추천사이다. 이 글은 「한국의 양계초가 되려고 마음먹 었던 청년기 박용만의 높은 문장력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언론인시인 李興雨(이흥우)씨는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崔淳雨의 「한국미 술의 참모습」과 「바둑이와 나」를 뽑았다. 「한국미술의 참모습」은 崔淳雨 전집 1권에, 「바둑이와 나」는 5권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건축가 金鎭愛씨와 배재고 교사 허섭씨도 崔淳雨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에 서서」를 꼽았다. 金鎭愛씨는 특히 이 책의 첫 문장을 名文 중의
白眉라 고 했다.
<조국의 강토를 하늘에서 굽어보면 그림같이 신기한 밭이랑 논이랑의 무늬 진 아름다움과 순한 버섯처럼 산기슭에
오종종 모여서 돋아난 의좋은 초가 지붕의 정다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줄 때가 있다. 그리 험하지도 연약하 지도 않은 산과 산들이, 그다지
메마르지도 기름지지도 못한 들을 가슴에 안고 그리 슬플 것도 복될 것도 없는 덤덤한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하늘이 맑은 고장,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
강산에서 먼 조상 때부터 내내 조국의 흙 이 되어가면서 순박하게 살아왔다>
2000년 IPI 선정 언론영웅으로 선정된 崔錫采의 논설 「호헌 구국운동 이외 의 다른 방법은 없다」(조선일보 1960.3.17)와 「일부 군인들의 탈선 행동 에 경고한다」(조선일보, 1963. 3.16)는 언론학자 鄭晉錫 교수가 골랐다. 前者는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이틀 후에 쓴 사설로 4․19의 도화선이 되 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 鄭교수의 설명이다. 後者는 崔錫采가 수도 경비사 장병 80여 명이 최고회의 앞에서 軍政(군정) 연장을 요구하며 벌인 데모에 격분하여 단숨에 써냈다고 한다.
연세대 정외과 咸在鳳 교수는 金容沃(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추천하기도 했다. 책 전체가 名文이기도 하지만 특히 序文(서문)이 名文이라는 것이 咸교수의 설명이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柳永益 교수는 현대의 名文으로 역사학자 李基百(이기백 )의 「한국사신론」의 序章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서울대 교수 金暻東 의 「근대화론」, 宋復의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의 머리말, 역사학자 이기동의 「북한 역사학의 전개과정」, 소설가 崔仁浩의 「나는 스님이 되 고 싶다」, 고려대 교수 徐之文의 「어느 쾌락주의자의 고행길」, 수필가 皮千得의 「인연」 등을 천거했다. 柳교수는 『간결하고 평이한 필치로써 논지를 분명히 세웠다는 점에서 모범이 되는 글』이라고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서강대 李根三 교수는 외국어대 鄭晉錫 교수가 엮은 「일제시대 민족지」 1권 중 706쪽의 「시대와 인생」(조선일보 논설․필자 미상)을 추천했다. 李교수는 『논설이면서도 그 시대 젊은이의 사고와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글 』이라고 말했다.
在美 정치평론가 金相基(남일리노이대 교수)씨는 『기억에 남는 名文이 수 없이 많으나 다른 분들이 추천할 것으로 생각하므로 다른 분들이 빠뜨릴지 도 모를 책을 추천하고 싶다』며 책 세 권을 권했다. 철학가 閔丙山(민병산 )의 수필집 「철학의 즐거움」, 신문특집기사 모음집인 전 한국일보 논설위 원 芮庸海(예용해)의 「인간문화재」, 철학가 曺街京(조가경)의 「실존철학」이다. 언론인 千寬宇(천관우)가 쓴 「言官史官(언관사관)」에 수록된 「신문의 자 유」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에 의해 추천됐다. 시인 高銀은 千寬宇의 「 한국 고대사」를 골랐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은 미국 南일리노이大 교수 金相基, 연세대 교수 宋復, 전 고려대 교수(駐日 대사) 崔相龍, 서강대 교수 金秉柱씨의 신문 칼 럼을 名文으로 천거했다.
서울대 학생회의 4․19 선언문 / 名文 감상은 산림욕 효과
선언문 중에서는 崔南善(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가 가장 많은 여섯 명의 추천을 받았다. 소설가 서기원, 연세대 교수 유영익,
외국어대 교수 정진석, 동의대 교수 장양수, 작사가 박건호씨 그리고 경기도 수리고 교사 윤갑희씨가 이 선언서를 골랐다.
서울 경복고 교사
이원희씨는 서울대 학생회의 「419 선언문」을 추천했 다. 이원희 교사는 추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성과 양심의 목소리로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결연한 의지를 밝힌 명문장 이다. 차분할 정도의 논리와 단정하다 할 수준의 어조가 오히려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글이란 행동으로 실천되는 양심이 바탕이 되어야 힘을 얻는 다는 진리를 절감케 한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민족의 지향점을 선언한 글 이라고 본다』
金亨錫(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970년대 유신 선포 직후에 나온 故 金在俊(김재준) 목사가 쓴 「기독교 연합회 성명서」를 名文으로 추천했다. 기자는 金在俊 목사가 썼다는 이 유신 반대 성명서를 구해보려고 노력했으 나 아쉽게도 구할 수가 없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姜英勳(강영훈) 세종재단 이사장은 도산 安昌浩(안창호)의 연설 일부를 추천했다. 姜이사장은 島山(도산)이 꿈꿔 온
理想村(이상촌) 설립 계획에 즈음한 연설 가운데 일부를 추천했다.
<…법치적으로 국법을 준수하고, 민주적 자치의 능력이 있고,
도덕적으로 허위에서 벗어나고, 이기심을 절복하여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되고, 경제 적으로 부채 없이 문화생활을 自營(자영)할 재산을 가지고,
자녀는 교육을 받고, 성인은 모두 독서하는 부락이 될 것이오…>
姜英勳씨는 이 연설이 『오늘날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춰 음미해 볼 수 있는 말씀이기에 늘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고 말했다. 朴正熙 전 대통령의 연설을 선정한 사람도 세 명이었다. 소설가 徐基源씨가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유세(1967년 4월17일), 소설가 이인화씨가 박정희의 전역식 연설(1963년 8월30일), 박근 전 유엔대사가 날짜 미상의 연설문을 각각 골랐다. 朴씨가 고른 연설문은 새마을연수원 벽에 걸려 있는 『먼 훗 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1960년대에 무엇을 하였는가고 물었을 때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신화에 살고 신화에 죽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감사원장을 역임한 韓勝憲(한승헌) 변호사는 법조인답게 朴元淳(박원순) 변 호사가 쓴 「문익환 목사 방북 변론서」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최후진술 」을 추천했다. 조선대 총장을 지낸 李敦明(이돈명) 변호사는 「金載圭의 상고이유서」를 추천했는데, 그는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문 건』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최후 진술」은 金光雄 중앙인사위원장도 천거했다.
성철 스님의 전기를 쓴 바 있는 소설가 李淸(이청)씨는 性徹(성철) 스님이 쓴 「百日法門」 중 「見性의 본질」을 선택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것을 견성성불이 라고 합니다. 곧 自性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成佛)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 하는 견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自性, 즉 불성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見性이 즉 成佛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성을 한 후 성불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 아닙니다. … > 李淸씨는 추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성철 스님의 禪 수행과 불법 참구의 모든 내용이 집대성되어 있는 이 책 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중관, 유식, 열반, 천태, 화엄,
선종사상에 이르기까 지 불교의 모든 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그 모든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것이 바로 「中道」임을 천명한 글이다.
내용이 도도, 웅장하고, 문장이 힘이 넘친다. 또한 논리에 빈틈이 없고, 비 유와 인용이 적절하며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핵심을 찌르는 방법이 날카롭 다. 그러므로 그 뒤로 한국 불교 저술과 법문의 교범이 되었다. 상․하 양 권으로 된 책의 모든 부분이 名文이라 생각하나 특히 선종 사상 편의 「見性의 본질」 서두에 나오는 구절은 성철 스님이 주장하는 돈법사상의 진수 를 명쾌하게 밝혀주는 대목으로 빛이 난다』
수월 스님 이야기인 「달을 듣는 강물」의 저자로 불교에 조예가 있는 김진 태 인천지검 특수부장은 법화경(불경)의 제바달다품 중 일부를 추천했다. 金검사가 추천한 「제바달다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三千大千世界 無有如芥子許非是菩薩 捨身命處 爲衆生故(삼천대천 세계에는 보살이 중생을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리지 않은 곳이라곤 겨자씨만큼도 없다)>
名文 감상은 산림욕 효과
이상으로 간략하게 名文으로 천거된 것들 중에서 어떤 글이 누구에 의해 무 슨 이유로 추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전 유엔대사 朴槿씨는 『미술에서 추상화가 타락하면 칠장난이 되는 것처럼 요즘 우리들 젊은 세대간에는 「현대성」과 「진보성」의 탈을 쓴 글과 말의 장난이 난 무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글과 말이 장난질 치 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바람은 오로지 속도 만 을 강조해이 장난질을 부채질한다. 100명이 정성을 다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귀한 글을 골라준 데는 이런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넘쳤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 名文 중에서 많이 추천된 것을 중심으로 全文 또는 일부를 名文 감상 편에 싣는다. 여기에 소개된 名文들을 읽다보면 소음과 공해로 가득한 대 도시에서 벗어나 거대한 山林浴場(산림욕장)을 산책하는 것처럼 머리가 맑 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名文家 李御寧, 소설가 徐基源, 건축가 金洹의 名文 추천
구호와 같은 관념적인 한국의 산문에 처음으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불어넣 은 사람, 감성과 이성이 한데 어울린 은유의 축제를 통해서 생각하는
즐거 움과 느끼는 쾌감을 동시에 창조해 준 사람, 그리고 뱀같이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우둔한 산문을 코브라처럼 머리를 치켜세우게 하고 음악에
맞춰 춤 추게 한 사람 - 그것이 바로 李箱이다.
그리고 그의 詩 소설 그리고 수필을 모두 통합해 놓은 글이 그의
「山村餘情(산촌여정)」이다. 실제로 「山村餘情」에는 詩와 일기와 편지글로 되어 있어 마치 그의 글 솜씨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양식만이 아니라 글의 내용에 있어서도 도시적인 체험과 전원의 자연 체험이 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래서 「도시와 자연」 「근대와
전통」 을 異種配合시킨 포스트 모던적인 감각마저 느끼게 된다.
그것이 청동호박이 열린 것을 보면서 한식 날 호박꼬자리의 무시루떡 냄새 를 맡고 좇아오는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과 럭비공을 받고 뛰는 젊 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동시에 연상하는 특이한 은유들이다. 모든 비유가 그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자신이 성천의 자연을 묘사한 그 글을 더블 렌즈의 카메라로 촬영한 스틸이며 그 映寫(영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묘사문이면서도 그 전체의 구성이 밤에서 시작하여 다음날 밤으로 끝나는 원형의 서사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과 끝이 없이 순환하고 있는 非 선형적인 글이라는 것도 그의 유니크한 구성력이다. 외래어와 토착어의 자 연스러운 배합 장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통합하는 기능적인 비유, 그리 고 문장을 꿰매가는 구성력이 모두 남이 모방할 수 없는 섬세한 감성과 풍 부한 상상력에 의해서 표상된다. 한마디로 山村餘情은 20세기 한국의 수많 은 묘사 가운데 가장 높은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名文 중의 名文이라고 할 것이다.
소설가 徐基源의 名文 추천
▲기미독립선언서
침략자 일본을 비난 배척하는 데 쏠리지 않고 민족은 자주 평화 공존공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논지가 더욱 빛나는 격조 높은 문장. ▲梅泉 黃玹의 유작詩
(한말 재야학자 황현이 한일병탄 후 자결하면서 남긴 4편의 詩 가운데
제3작)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기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미 물 속으로 가라앉네/가을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사람으 로
태어나 지식인이 되기가 이다지도 어렵구나 )
나는 특히 후반의 두 줄 詩句(시구)에 감동을 느낀다. 亡國(망국)에 지식인 의 책임도 있다는 自省(자성)이 오늘날에도 그 뜻을 잃지 않고 있다.
▲朴正熙 대통령의 선거 유세(1967년 4월17일)
정치가의 演說(연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동형과 설득형(혹은 說破型)이 다. 1967년은 제1차 5개년계획이 성공리에 끝나는 시점이다.
집권자로서의 자신과 신념이 밑받침된 쉽고도 조리 있는 설득이다. 이때 연설은 그 자신 이 구상한 내용이란 점에서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미사여구나 大言壯談(대언장담)과는 거리가 멀다.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철학이 生動(생동 )하고 있다.
건축가 金洹의 名文 추천-「나무의
威儀」 등
20세기 한국의 名文 첫째로는 어쩔 수 없이 未堂 徐廷柱의 詩 가운데서 고 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未堂만큼 탁월하게 독창 적으로 다듬어낸 경우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 개인적으로는 未堂의 詩 「自畵像」 중에서 특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문장을 꼽는다. 팔할이 바람이라는 이 표현은 20세기 한국 名文을 대표함 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가슴이 미어지게 슬픈 표현이면서 동시에 눈물이 쏟 아질 만큼 아름답다.
두 번째로는 詩나 소설처럼 아름다운 문장보다도 철학과 사색을 담은 수필 類에서 李敭河(이양하) 선생의 「나무의 威儀」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서양식으로 공부를 한 분이면서도 나무를 보는 생각의 근본은 동양의 자연 관에 닿아 있고 그 중에서도 홍대용이나 박지원 등이 품었던
人物均(인물균 )의 철학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대적 의미에서 환경 문제까지도 통찰하고 훗날에 찾아온 우리의 개발논리를 질타하고 있음을
보고 놀랍게 여긴다. 세 번째 名文으로는 1974년 정치적 암흑기의 「언론자유수호선언」과 「민 주회복국민선언」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선언문들은 문장으로서 특출한 名文이라기보다 우리의 가장 처절했던 독재시대에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사형선고, 납치와 고문 등 무시무시한 탄압
속에서 끓어오르는 절규를 피맺 힌 목소리로 뱉어냄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깨우친 점에서 길이 길이 기억해야 할 名文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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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쓰려면 - 서기원
漢文을 배척해서는 名文이 나오지 않는다
徐 基 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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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文과
한글의 차이
名文이라 할 만한 문장을 쓰지 못한 처지여서 名文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긴 하지만, 평소의 생각을 두서없이 적을까 한다. 나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漢文章(한문장)과 한글 문장의 차이 같은 것을 막 연히 느끼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文筆(문필)에 종사하면서 글을 많이 읽 지 못한 엷은 知見(지견)으로 그런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만용에 속할 것이다. 名文도 워낙 종류가 많기에 무작정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다.
가령 漢文이라면 詞(사) 策(책) 論(논) 등으로 대충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왕조 시대의 科擧(과거) 시험에선 대개 詞와 策 두 가지를 출제했으나 때에 따라 어느 한쪽만 요구하는 수도 있었다.
중종 때 趙光祖(조광조) 같은 이는 『근래의 과거시험이 詞에 치우쳐 선비 들이 身邊雜事(신변잡사)나 吟風弄月(음풍농월)을 일삼고 있다』고 개탄했 다. 그의 가치기준으로 말하면 그런 문장은 名文의 범주에 넣지 않는 것이 었다. 지금도 名文 혹은 명문장이라 하면 策과 論 혹은 그에 가까운 문장을 일컫는 경향이 농후하다. 요새 문학의 개념으론 서정시와 서사시의 차이를 뜻하면서 後者(후자)의 경우도 테두리를 좁힌 것이라고 할까.
가령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 넓게는 詞에 속할 수도 있지만 ), 諸葛亮(제갈량)의 出師表(출사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도 한문에 의존한 나라였으므로 숱한 名文이 나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밑천이 짧은데다 이런 경우 다소 편협한 나로서 굳이 들자면, 李舜臣(이순 신)의 장계, 閔泳煥(민영환)의 유서 등이 나의 가슴속 한 모서리를 차지하 고 있다. 가슴을 울리고 인생과 운명을 생각케 한다.
임진란에 李舜臣은 모함을 받아 서울에 붙들려와 국문(고문)을 당한 끝에 白衣從軍(백의종군)으로 남해안에 내려간다. 그 사이 李舜臣의 직책을 대신 한 元均(원균)이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여 겨우 패잔선 12척만 남았다. 다시 三道(삼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에게 『조선의 수군은 이제 없 는 것과 같다. 패잔병들을 추스려서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투를 계속하라』 는 명령이 내렸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장계에서 『지금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戰船(전선)이 있습니다. 죽음을 다하여 나가 싸우면 사세를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습 니다. 수군을 없애,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고 수도 서울을 공격하는 것을 신은 두려워 합니다. 비록 아군의 전선은 몇 안되지만
변변치 못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왜군은 우리나라를 감히 없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今臣戰船尙有12(금신전선
상유12)」
나의 가슴을 친 구절이다. 괜한 大言壯語(대언장어)가 아니다. 鳴梁(명량) 해전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이 한 자도 틀림없이 증명하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글을 접하지 못하는 이유
閔泳煥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배를 갈라 자결했다. 죽기 전 「한국인 민동포에게 경고하노라」하는 유서를 남겼다.
「…명심하라.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사 는 법이다. …영환이 한번 죽어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깊이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기어이 九天地下(구천지하)에서 동포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安重根 의사와 함께
그나마 亡國(망국)의 치욕을 조금이라도 달래준 문장이었다. 近代(근대)에 들어와서는 역시 3․1 독립선언서일 것이다. 길기 때문에 인 용은
피한다. 첫마디부터 격조높은 大宣言(대선언)이다.
쓰다보니 한문 얘기만 한 것 같다. 한글 문장 이를테면 되도록 한자어를 피 하고 우리말에 충실한 글(기실 순우리말만으론 불가능하지만)과 대조하며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名文의 개념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한글전용의 글 가운데 특히 詩나 소설에 名文이 수두룩한 것이 사실이 다. 하지만, 나의 감수성이 낡았는지 몰라도 심금을 울리고 삶에 충격을 주 는 글을 그다지 많이 접하지 못했다. 한문을 외국어라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名文의 예를 들기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문과 우리말의 언어적 속성과 성격이 다른 데서 나왔을 것이지만 이것까지 건드리는 것은 나의 주제 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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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쓰려면 - 박종만
쉬운 글은 愚衆을 생산하는 혹세무민이 될 수도
朴 鍾 萬 까치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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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文의
세 가지 조건
名文 중의 名文이라는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고 한마디로 단언했지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첫째 목적은 물 론이고 남의 글을 읽는 첫째 목적도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겠다. 「새로운 것」 하면 으레 지식과 정보를
생각하겠으되, 남의 삶 을 체험할 수 있는 기록과 상상의 문학도 포함된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여 로의 삶과 가지지 못한 사상과 미치지 못한
상상과 지식이 생생하게 어우러 진 내용의 글을 읽는 것은 곧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을 구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하고 진 실하지 않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부정확한 지식과 거짓 경험 과 졸렬한 상상력은 언젠가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을 낭패하게 만들고 배신감 을 느끼게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흔히 사람과 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정직하고 솔직한 글은 우선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사람의 윤리가 아니라 글의 내용의 진실성인 것이다. 하늘 아래 완벽 한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l솔직한 사람은 겸허하고 당당한 글을 쓴다. 孔子(공자)가 詩經(시경)의 詩 300편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한 『생 각(하는 마음)이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를 詩를 쓰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면, 나의 지나친 견강부회인가? 지금 名文으로 대 접받고 있는 글들 중에서 위선적 감정 과잉의 우국충정과 殉愛譜(순애보)의 글들은 없는가?
새롭고 확고한 지식과 진실한 심정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어휘가 부정확하 고 문장이 번잡하고 단락이 불명확하다면,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이 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특히 정확한 어휘를 쓰는 것(正名)은 그것이 가리키 는 실체의 正體性(정체성)과 관계된다. 좋은 음식 재료도 숙수의 솜씨와 깨 끗하고 반듯한 그릇이 있을 때에야 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춘 글이 가지런하게 마름질되었을 때, 곧 스스 로 질서와 체계를 만들며 경제적으로 정리되었을 때, 나는 일단 名文의 자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장황하고 까닭 없이 길고 두서가 없는 글은 非 경제적인 글이다.
모르는 단어를 찾는 즐거움
「어문일치」의 뜻을 오해하고 글은 쉬운 단어와 쉬운 문장으로 물 흐르듯 이 써야 한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말과 글이 일 치할 수 있을까? 글은 눈으로 들어오는 「그림」이고 말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이다. 쉬운 어휘라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읽는 사 람마다 지식과 사고와 경험의 수준이 저마다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물 흐르는 듯한」 쉬운 문장이라고 하되, 드넓은 천리 長江(장강)도 다양 하고 무수한 細流(세류)들이 한데에 합수한 것이고 산을 만나면 휘어져야 하고 큰 비가 지나간 뒤에는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더구나 수심이 깊을수 록 물밑에는 사공이 예상하지 못한 암초가 있을 수 있다. 관개수로식 문장 이야말로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또하나의 함정이다.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진정한 민중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愚衆(우중 )을 생산하는 惑世誣民(혹세무민)의 주장이 되기 쉽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 들과 지식들이 간혹 나타나서 사전을 찾는 글 읽기야말로 가난한 행복의 작 은 어려움이고 지식의 창고를 채워 주는 작은 노고이다.
그렇게 무지한 사 람도 이제 없으며, 그렇게 책 읽기가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사전의 부피는 문화의 변천과 문명의 발전에
비례한다.
또하나 덧붙이고 싶은 나의 주장은 준말의 무분별한 사용이 글의 품위를 떨 어뜨리고, 꼭 필요한 주어의 생략이나 탈락이 그리고
시제의 불일치가 불필 요하게 시선을 행간에서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글읽기의 집중도를 떨어뜨리 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경고만 큼 새삼 경청해야 할 완벽한 경고도 없을 것 같다. 글의 경우, 완벽의 추구 가 감동의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 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詩로서는 발상이 별로 비범하지 못하고 구문이 상당히 길고 또한 번거롭지 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님의 침묵」이 겸허하게 인도하는, 알 수 없는 초절의 길을 순간적이나마 나를 「차마 떨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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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교사의
논술 秘法/표현력을 기르는 방법
사전을 곁에 두고 名文을 베껴라
李 萬 基 인천 문일여고 교사(EBS 강사)
三多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이를 논술에 적용하여 보면 아무리 사고력이 뛰어나고,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더라 도 제대로 표현을 못하면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논술의 기본적인 소임을 다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표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주위에 똑같 은 유머를 전달해도 배꼽
빠지도록 재미있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썰렁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말하는 표현력의 차이이다. 잘 쓴 논술문이란 필자의
생각과 느낌, 주장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표현력이 좋은 글을 말한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충실성, 독창성, 성 실성, 일관성을
갖추어야 하고, 명료성, 정확성 등을 가져야 한다. 표현이 잘된 글이 좋은 글이라면 사고력, 창의력을 향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표현 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표현력의 주요 요소는 적절한 개념이나 용어의 구 사, 매끄러우면서도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 체계적인 구성, 적절한 분량 등 이
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논술은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글이다 . 그러므로 분명한 주제(내용)를 가지고, 알맞은 체재(형식)로 쉽고 정확
하게 전달(표현)하면 성공이다.
「옛말 그른 것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조상들의 체험의 결과이니 또 하나 의 옛말을 생각해 보자. 좋은 글쓰기 공부로 많은 사람들은 옛사람인 歐陽修(구양수)의 옛말 「三多(삼다)」를 굳게 믿고 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는 多讀(다독), 多作(다작), 多商量(다상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多讀이다. 이는 다른 모든 작업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데 도 남의 글을 많이 읽음으로써 배우는 바가 많다는 것이다. 주어진 글을 이 해할 수 있는 능력은 조리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다음으로 多作은 논술 능력이란 스스로 많이 써 보는 등의 자신의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多商量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평소에 꾸준히 기르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는 곧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 사고력, 표현 력을 기르는 첩경이다.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 우선은 어휘력에 주목해야 한다. 한 편의 글은 언 어로 표현되는 언어 단위이다.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인 낱말로부터 문장, 문 단을 거쳐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단위로, 하나의 완성된 언어 단위로서의 글이 된다. 그러니 낱말의 사용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어 어휘력을 향상시 키는 길이 표현력을 높이는 최우선 과제이다. 어휘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부단히 국어 사전을 찾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다. 더불어 속담사전이나 관 용어사전, 상징사전, 유의어사전, 갈래사전, 역순사전, 용례사전, 뉘앙스사 전, 반의어사전, 형용사사전 등 특수사전을 이용한다면 더욱 좋다. 이런 사 전들에는 어느 것이나 훌륭한 용례가 실려 있어 이를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글쓰기 공부가 된다.
일단 무엇이든지 써라!
이런 사전들에 힘을 입어 적재적소에 的確(적확)한 어휘를 사용한다면 그야 말로 표현이 잘 된 글이 될 것이다. 토박이말을 쓸 자리에 한자어나 외국어 를 쓴다거나, 비속어를 사용하게 되면 글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래서 논술 답안의 평가에서 어휘의 적절성을 따지는 것이다.
둘째로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주 써보아야 한다. 즉, 多作이 필요하 다. 초보자는 주제나 분량, 글의 의도 등을 주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서 헤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작문에 막연한 부담감이랄지 공포감을 지니 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데에 많은 글을 써보는 것처럼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선 한 문장을 정확하게 써보는 연습을 해야 하고. 그런 다 음에는 한 문단을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으로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연습 을 해야 한다. 그러한 후에 글 전체를 서론, 본론, 결론으로 체계적으로 구 성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무작정 글을 쓰라면 더욱 막연하다. 그래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일기를 쓰 자는 것이다. 출발은 메모로부터 하고 점차 글의 분량을 늘려 가는 것이다 . 별 다른 부담 없이 하루의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나가다 보면 상상하지 못 할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무엇보다 좋은 표현력을 기르는 글쓰기 연습은 名文을 모방하여 쓰 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흔한 말이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名文을 자주 대하고, 옮겨 적다가 보면 자연히 어휘력도, 문 장력도, 구성력도 늘게 된다. 더군다나 교과서에 실린 名文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맞춤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이른바 一石二鳥(일석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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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교사의
논술秘法/효율적인 독서 방법
古典을 깊이 있게 읽어라
이 석 록 서울 화곡고 교사(EBS 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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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논술 경향
『책 읽지 말고 제발 공부 좀 해라. 너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렇게 책 만 읽으니 어떻게 대학에 가겠니?』
우리 독서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모의 잔소리이다. 그러나 논술을 쓰는 데 독서가 가장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이야기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논술에서 제시되는 문제들을 보면 제 시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논점을 잡아내는 능력이 핵심이라는 점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논술의 본래 목적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독서 습관을 생활화하고 깊이 있게 사색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과 창의력을 기르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러므로 논술에서는 기발한 착상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보다 는 평소에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 대한 나름 대로의 知的(지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논술문은 단기간의 학 습으로는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고 평소에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서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 근의 논술의 경향을 보면 고전 텍스트를 제시문으로 활용해 현대 사회의 문 제를 성찰하도록 하는 문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서력을 길러 두는 것이 논술 능력 향상에 지름길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논술 능력도 향상시키고 올바른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효율적인 독 서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독서를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東西古今(동서 고금)의 名文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깊이 있게 생각하 면서 정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古典(고전)은 인류사에 빛나는 높은 정신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 문학, 철학, 역사, 사회, 과 학, 예술 등의 각 영역에서 당시대 정신의 진수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두 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따라서 古典을 우 리의 문제 의식에 맞추어 읽다보면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대표적인 古典의 작품이 무엇인지 하는 선택이 쉽지 는 않다. 처음에는 대개 학교의 교과 과정에서 다루거나 언급하고 있는 작 품을 중심으로 읽으면 무난하다. 이러한 책들을 마치 광부가 坑道(갱도)를 파들어 가듯이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읽는 것이 중요하다.
줄거리 중심으로 읽지 말라!
그리고 독서와 관련하여 논술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은 글에 대한 해석 능력이다. 제시된 내용을 단순하게 줄거리 중심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수박 겉핥기 식의 독서이기 때문에 논술에서 요구되는 사고력 향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읽을 때에는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어떤 문제 의식이 담겨 있고, 필자는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書評(서평) 형태의 독후감을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독후감이 단순한 감상문 형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책 속에 담긴 사상이나 교훈을 일목 요연하게 논리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논술의 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탁월 한 보약이 될 것이다.
또한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그 내용을 나름대로 음미해 보고, 자신의 생각은 어떤지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줄거리만 알거나 어떤 내용이 전개되었다는 정도를 아는 데에 그치면 충분한 독서의 효과를 얻을 수 없 다. 논술에서는 독해력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리 상상하거나 비판할 것을 요구하므로 읽은 책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하는 능 력을 길러 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그것을 깊고 철저하게 읽는 태도가 중요 하다. 이렇게 읽다보면 독서를 통해 기를 수 있는 독해 능력과
사고력, 창 의성 계발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先人(선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
속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고, 삶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보다 진지한 독서를 할 때 논술 능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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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장 교육
모든 국가시험은 에세이가 필수
크리스 프라이스 디지틀조선 영문뉴스 에디터 (영국 랑카스터대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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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法은
초보적인 수준만
영국에서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언어 교육은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영 국의 부모들은 유난히 아이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중시하고 쓰기와 읽기를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강조하기 때문에, 정식 교육이 시작되는 네 살이나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어린이들은 어느 정도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학교에 들어가면, 영어에 중점을 두고 의사소통 능력을 다방면으로 발 전시킨다. 내가 다녔던 퍼블릭스쿨(실제는 사립학교)에서는 글짓기가 필수 과목이었다. 글짓기의 주제는 역사에서 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가 포 함되었다. 다른 모든 과목에서도 정확하게 기록하는 훈련이 강조되었다. 과 학시간에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실험을 했지만, 그때도 그 결과를 기 록하는 일이 중요시되었다.
영어시간은 文法과 文學(문학)으로 구분되었지만, 대부분은 한 선생님이 가 르쳤다. 문법시간에서는 동사변화 같은 것보다는 역사적인 근원 같은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영어에는 불규칙동사가 많고, 예외가 많아서 그 규칙을 모두 배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법 시간에는 구두점 같은 초보적인 분야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정도로 그쳤다. 動名詞(동명사 ) 같은 것은 제대로 쓸 줄 알기만 하면,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알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영어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물론 영어를 母國語(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 그러나 非영어권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영국인들은 교육을 역사에 관한 에세이나 지리에 관한 과제, 과학실험에 대한 기록 등, 일상 생활에서 기록된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학생들은 非영어권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영어사용 능력 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문학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위대한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해석을 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필수과목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맥 베스」, 「햄릿」, 「한여름 밤의 꿈」 등 세 가지만 공부했다. 공부 시간 에는 학급 전체가 참가하는 낭독회가 열린다. 학생들에게 배역을 주고, 큰 소리로 대사를 읽게 한다. 낭독이 끝나면 선생님이 평가를 하고, 학생들에 게 당시 셰익스피어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한다. 이밖에도 우리들은 방랑시인이나 현대작가의 작품도 필수적으 로 읽어야 했다.
장편 詩 암송 대회 열려
대부분의 퍼블릭 스쿨에는 정기적으로 저명한 작가의 장편 詩를 암송하는 대회를 연다. 학생들은 필수적으로 이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암송하다가 머뭇거리거나 단어를 빠뜨리면, 교장선생님이 종을 때리고, 참석했던 학 생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낸다. 무척
괴로운 시련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 척 도움이 된 훈련이었다.
에세이를 쓰는 훈련도 중요한 교육과정이다. 에세이를 쓸 때는 각자가 선 택한 주제이건, 공동의 주제이건 창조성이 가장 강조된다. 우수한 에세이 가 나오면 학급에서 낭독을 하고, 다른 학생들이 비평을 하게 한다. 그러 는 가운데 학생들은 좋은 글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매년 적어도 한번 은 전국 및 지방 단위의 글짓기대회가 열린다. 그 학교 출신의 유명한 작 가가 자기 이름으로 대회를 여는 경우도 많다. 이런 대회가 열리면 여러 기 업체나 지방단체가 스폰서가 되어 상패나 상품을 제공한다. 그중에는 단순 한 상장도 있고 대학까지 장학금을 대주는 것도 있다. 이런 대회에서 A급 판정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된다.
16세가 되면 모든 학생은 국가시험을 본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다음 학년 으로 진급할 수 있다. 이 국가시험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에세 이식으로 답을 써야 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영어교육의 상당 부분은 학 생들이 시험관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고, 효과적 으로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는데 집중되고 있다.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서관도 영어교육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영국에는 세계적인 작가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작품은
도서관에 모두 보관되어 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모아놓은 창고가 아니라, 수시 로 세미나를 열어서 토론을 한다.
이렇게 고전과 현대의
다양한 작품을 읽고, 저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 을 파악하는 교육을 받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훈련을 하게 되면 작가가 될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글짓기는 따분한 일이 아니 라 훌륭한 전달수단이다. 떠돌아다니는 아이디어를 영원한 형태로 정착시키 는 수단이다.
이런 훈련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영어에 대해서 광범위한 지 식을 얻게 되고, 다양한 사고와 표현방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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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장 교육
푸줏간집 주인도 편지 쓸 때 同意語 사전을 뒤적거린다
권 지 예 소설가(파리 7대학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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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이 외는 詩
문장을 쓴다는 것이 레이몽 크노의 詩처럼 「한 개나 두 개의 낱말을 집어 계란 삶듯 삶는」 그런 단순한 기술만은 아니다.
한국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내가 한국 근대소설을 텍스트로 삼아 佛語(불어 )로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기까지, 어쨌든 나는 늘 佛語 쓰기에 많은 고초를 겪어 왔다. 기껏 애를 먹고 쓴 논문의 문장들을 同語(동어)반복이 많다며 교수는 김매듯이 무자비하게 솎아내는 적이 많았다. 한국 학생들의 문장은 대체로 논리적이지 못하며 반복이 심하고 思考(사고)가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자주 했다. 그렇다면 저들 문장의 「논리적」이고 「독창 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중학교 과정부터는 물론 대입학력고사에 主과목으로 철학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나라. 四肢選多(사지선다)형 시험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 세계문 학을 주도하는 찬란한 文學史(문학사)를 가진 나라. 하지만 그런 나라에서 숨만 쉰다고 모두 철학자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의 문장 수업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철저하게 早期(조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리에 나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먹은 프랑스 아이 를 아무나 붙들고 詩 한 수를 읊으라 그래보라.
아직 佛語 문장을 쓸 줄도 모르는 초등학교 1,2학년생의 입에서 文學史에 빛나는 시인의 詩를 듣기는 어렵지 않다.
프랑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佛語를 쓸 줄도 모르는 딸애도 詩를 외워가야 만 했다. 그것이 유일한 숙제였다. 「포에지(시)」 노트엔 선생님이 詩를 복사한 걸 노트 왼편에 붙이고, 오른쪽 흰 여백엔 아이가 詩의 이미지를 포 착해 정성껏 그림을 그려넣었다. 겨우 만 여섯 살이 넘은 딸애는 노트를 나 에게 맡기고 작은 입으로 詩를 暗誦(암송)했다. 눈을 감기도 했고 선생님이 감정을 넣어 읽던 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詩 암송은 5년간 의 초등학교 과정 내내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詩들이 딸의 입에서 무수히 흘러나왔고, 또 가슴을 적시고 갔다. 위고, 베 를렌느, 모리스 카렘, 랭보, 모파상, 발레리, 아폴리네르, 프레베르, 레이 몽 크노, 데스노스….
비유나 표현 자체도 독창적이고 아름답지만 脚韻(각운)을 맞추는 절제된 형 식을 통해 더욱 더 풍부한 언어감각을 훈련시키기에는 詩 암송이야말로 최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오는 가을 저녁, 베를렌느의 「가을」이나 아폴 리네르의 「미라보다리」같은 詩를 어린 딸의 입을 통해 듣노라면 감개가 무량해지곤 하였다.
母國語에 대한 애정
詩 암송 외에도 「작문」이라는 정확하고 논리적인 표현력을 훈련시키는 과 목도 인상적이었다. 문법 공부와는 별도로 중간에 이야기를 덧붙이거나 문 장의 인과관계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詩를 통해 배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언어표현과 철학적 사고로 무장된 논리보다 나를 더 감동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母國語(모국어)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定着(정착) 초기에 급한 편지 쓸 일이 있으면 나 는 동네 푸줏간 주인인 제르맹씨에게 부탁하곤 했다(프랑스에선 모든 업무 를 서신을 통해 하는 경우가 많다.) 한두 번 써주더니 아예 사전까지 가게 에다 갖다놓았다. 나는 그가 고기를 썰던 크고 뭉툭한 손으로 볼펜을 들고 꾹꾹 눌러 불어 문장을 쓰는 걸 보면 공연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그 는 집을 짓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가고는 혹시 쓸데 없는 말, 되풀이 되는 말, 적합하지 않은 단어가 없나, 또 문장들끼리 아름답게 조화가 되는 지 새 문장을 쓸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내려가곤 했다. 그는 일반 사전 외에도 同義語(동의어)사전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무식해서가 아니 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작문은 수준급이었다.
이런 작문의 태도는 그후 내가 만난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공통적으 로 볼 수 있었다. 詩人이 아니어도 작가가 아니어도, 푸줏간 주인도 청소부 도 편지 하나를 쓰기 위해 동의어 사전을 뒤적거리며 고심을 한다. 고기중에 가장 맛있는 살점을 떼내듯이, 쓸고 또 닦아내어 말갛게 속이 보 일 때까지 그들이 문장을 고르는 걸 보면 프랑스문학과 예술의 위대함을 낳 은 것은 결코 위대한 예술가들의 재능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르맹씨의 모 습 속엔 詩를 외우던 소년이 항상 살아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문장교육을 생각할 때마다 詩畵(시화)가 그려진 詩 노트를 살짝 접고 꿈꾸듯 詩를 암 송하던 딸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 수필
한국의 명문(수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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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金 起 林
1908~? 시인․문학평론가․영문학자. 호는 片石村. 함북 성진 출생. 일본대 학 문학예술과 졸업. 조선일보 학예부장.
1933년 九人會 결성.
편집자 注 :1936년 「朝光」 3월호에 발표되었고, 金起林의 수필집 「바다 와 육체」에 실려 있다. 金聖佑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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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상 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젓 때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갔다가 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 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 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 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 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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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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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川1) 紀行 中의 몇 節
李 箱
1910~1937. 시인 소설가. 서울 출생. 본명 金海卿. 1929년 경성고등공업 학교 건축과
졸업.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원.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등 으로 데뷔.
편집자 注:이 글은 작자가 평남 성천에서 여름 한 달 가량 머문 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에 연재(1935년 9월27일~10월11일)한
것이다. 원문은 문학 사상사에서 나온 「이상문학전집 3」 1998년 판을 사용했다. 李御寧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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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향기로운 MJB2)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 문도 잘 아니 오고 遞傳夫(체전부)3)는 이따금
「하도롱」4)빛 소식을 가져 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愁心(수심)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都會(도 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도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祈雨祭(기우제) 지 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 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 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漆夜( 칠야)에 팔봉산도 사람이 寢所(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 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 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 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주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夕刊(석간)과 같은 그 윽한 내음새가 소년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鄭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 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갑지)」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벼쨍이가 한 마 리 등잔에 올라앉아서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 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類(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 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聲樂(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 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의 詩情(시정)을 기초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深海(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 니다. 石英質 鑛石(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寒暖計(한난계)5 )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靑石(청석)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나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 에 적을 만큼式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才操(재조)로 光陰(광음 )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 소리가 이 방 안을 房채 시계로 만들어 버리고 長針(장침)과 短針(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 눈이 번갈아 간질 간질합니다. 코로 기계 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곰 꿉니다 . 그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 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壁(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 고리를 쳐다봅니다. 西道千里(서도천리)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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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鐵筆(철필)로 군청빛 「모」를 심어갑니다. 불행한 인구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調密(조밀)한 인구6)가-.
내일은 盡終日(진종일) 화초만 보고 놀리라, 脫脂綿(탈지면)에다 「알코올 」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도 꿈자 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 」7) 원색판 꿈 그림
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면 간단 한 설명을 위하여 爽快(상쾌)한 시를 지어서 7 「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鐵骨(철골) 전신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符號(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을 깨입니다. 하루 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 끄지 않고 잔 석유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 끼
「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昨夜(작야)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 8)입니다. 지난밤의 체온을 방 안에 내어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 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 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 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습니다. 흰 봉선화 도 붉게 물들까― 조금 이상스러울 것 없이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9)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 빛 여주10)가 열렸습니다. 당콩넝쿨과 어우러 져서 「세피아」11)빛을 배경으로 하는 한 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녹황색에 반영되어 「세실․B․데밀」12)의 영화처럼 화려 하며 황금색으로 사치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넷산스」 응접실에서 들리 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 「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가스」 잎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객주집 아해에게 물어 봅니다. 「기상꽃」―기생화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진홍 비단꽃이 핀답니다.
先祖(선조)가 指定(지정)하지 아니한 「조셋트」13) 치마에 「외스트민스터 」 卷煙(권련)14)을 감아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운한 「리그레추윙껌」15)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 기는 듯한 그 입맛 다시는 소리― 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蕙園(혜원)16)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우리가 소년시대에 보던 떨떨 인력거에 紅日傘(홍일산) 받은 지금은 지난날의
삽화인 기생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꼬자리17)에 무 시루떡― 그 훅훅 끼치는 구수 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월 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백년의 기반을 생각케 하는 넓적하고도 묵 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너레숀」18) 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비져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豊艶(풍염)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瘦瘠(수척)하여가는 이 몸에 조곰式 조곰式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모러스」한 容積(용적)에 향기가 없습니다. 다만 세숫비누에 한겹씩 한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肉香(육향)이 방 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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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팔봉산 올라가는 草俓(초경) 입구 모퉁이에 최××송덕비와 또 ×××× 아 무개의 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가 항공우편 「포스트」처럼 서
있습니다. 듣자니 그들은 다 아직도 생존하여 계시다 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교회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루살렘」 성역을 수만 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까지도 사랑하는 신 앞에서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발길이 찬송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갑니다. 「포푸라」 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 를 매어 놓았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 명한 瞳孔(동공)을 들여다봅니다. 「세루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 오브라―드」19)로 싼 것같이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桃色 (도색)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三停(삼정)20)과 五岳(오악)21)이 고르지 못한 貧相(빈상)을 업수여기는 중입니다.
옥수수밭은 일대 觀兵式(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甲冑(갑주)22) 부딪치 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23)빛 꼭구마가24)
뒤로 휘면서 너 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엄한 예포소리가 분명합니 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小鳥(소조)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 소리였습 니다. 그리면 옥수수밭에서 백, 황, 흑, 회, 또 백, 가지각색의 개가 퍽 여 러 마리 열을 지어서 걸어 나옵니다.
「센슈알」한 계절의 흥분이 이 「코 삭크」25) 觀兵式을 한 층 더 화려하게 합니다.
산삼이 풀어져 흐르는 시내 징검다리 위에는 白菜(백채) 씻은 자취가 있습 니다. 풋김치의 청신한 미각이 안약 「스마일」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그 화성암으로 반들반들한 징검다리 위에 삐뚤어진 N자로 쪼그리고 앉았노라면 시야에 물동이를 이고 주저하는 두 젊은 새악시가 있습니다. 나는 미안해 서 일어나기는 났으면서도 일부러 마주 보면서 그리로 걸어갑니다. 스칩니 다. 「하도롱」빛 피부에서 푸성귀 내음새가 납니다. 「코코아」빛 입술은 머루와 다래로 젖었습니다. 나를 아니 보는 동공에는 정제된 창공이 「간 쓰메」26)가 되어 있습니다.
M백화점 「미소노」27)화장품 「스위―트 껄」이 신은 양말은 이 새악시들 의 피부색과 똑같은 소맥빛이었습니다. 빼뜨름히 붙인 초유선형 모자 고양 이 배에 「화―스너」28)를 장치한 갑붓한 「핸드빽」―이렇게 도회의 참신 하다는 여성들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리고 새벽 「아스팔트」를 구르는 창 백한 공장소녀들의 회충과 같은 손가락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 온갖 계급의 도회여인들 연약한 피부 위에는 그네들의 貧富(빈부)를 묻지 않고 온갖 육 중한 지문을 느끼지 않습니까.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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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그러나 가난하나마 무명같이 튼튼한 피부 위에 오점이 없고 「추잉껌」 「 초콜레이트」 대신에 응어리는 빼어먹고 달절지근한 꼬아리29)를
불며 숭굴 숭굴한 이 시골 새악시들을 더 나는 끔찍이 알고 싶습니다. 축복하여 주고 싶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도회인의 교활한 시선이
수줍어서 수 풀 사이로 숨어버리고 종소리의 여운만이 근처에 내음새처럼 남아서 배회하 고 있습니다. 혹 그것은 안식을 잃은 내 혼이 들은 바
환청에 지나지 않았 는지도 모릅니다.
조밭 한복판에 높은 뽕나무가 있습니다. 뽕 따는 새악시가 電工夫(전공부) 처럼 높이 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純白(순백)의 가장 탐스러운 과실이 열렸 습니다. 둘이서는 나무에 오르고 하나이 나무 밑에서 다랭이를 채우고 있습 니다. 한두 잎만
따도 다랭이가 철철 넘는 민요의 舞臺面(무대면)입니다. 조이삭은 다 말라 죽었습니다. 「콜크」처럼 가벼운 이삭이 근심스럽게 고 개를 숙였습니다.
오―비야 좀 오려무나 海綿(해면)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싶어 죽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禁(금)한 듯이 구름이 없고 푸르고 맑고 또 부숭부숭하니
깊지 못한 뿌리의 SOS가 암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에 다 다르겠습니까.
두 소년이 고무신을 벗어들고 시냇물에 발을 잠가 고기를 잡습니다. 지상의 怨恨(원한)이 스며 흐르는 靜脈(정맥)―그 불길하고 독한 물에 어떤 어족 이 살고 있는지―시내는 대지의 身熱(신열)을 뚫고 벌판 기울어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을의 風說(풍설)입니다.
가을이 올 터인데 와도 좋으냐고 쏘근쏘근하지 않습니까. 조이삭이 初禮(초 례)청 신부가 절할 때 나는 소리같이 부수수 구깁니다. 노회한 바람이 조잎 새에게 爛熟(난숙)을 최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의 마음은 푸르고 焦燥 (초조)하고 어립니다.
조밭을 어지러뜨린 자는 누구냐―기왕 한될 조여든―그런 마음으로 그랬나 요 몹시 어지러뜨려 놓았습니다. 누에―戶戶(호호)에 누에가 있습니다. 조 이삭보다도 굵직한 누에가 삽시간에 뽕잎을 먹습니다. 이 건강한 미각은 왕 후와 같이 지존스러우며 侈奢(치사)스럽습니다. 새악시들은 뽕심부름하는 것으로 몸의 마지막 광영을 삼습니다. 그러나 뽕이 떨어졌습니다. 온갖 幣帛(폐백)이 동이 난 것과 같이 새악시들의 정열은 허둥지둥하는 것입니다.
야음을 타서 새악시들은 輕裝(경장)으로 나섭니다. 얼굴의 홍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뽕나무에 우승배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로만 가면 되는 것입니 다. 조밭을 짓밟습니다. 자외선에 맛있게 끄실른 새악시들의 발이 그대로 조이삭을 무찌르고 「스크람」30)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닿을 지성이 천 고마비 蠶室(잠실) 안에 있는 성스러운 귀족 가축들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 다. 「코렛트」 부인31)의 「牝猫(빈묘)」32)를 생각케 하는 말캉말캉한 「 로맨스」입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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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간이학교 곁집 길가에서 들여다 보이는 방에 틀이 떠들고 있습니다. 편발處女(처녀)33)가 맨발로 기계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계는 허리를 스 치는 가느다란 실이 간지럽다는 듯이 깔깔깔깔 大笑(대소)하는 것입니다. 웃으며 지근대이며 名産(명산)
××명주가 짜여나오니 열대자 수건이 성묘 갈 때 입을 때때를 만들고 시집살이 설움을 씻어주고 또 꿈과 꿈을 말소하 는 쓰레받기도 되고―이렇게
실없는 내 幻戱(환희)입니다.
담배가게 곁방 안에는 오늘 황혼을 미리 가져다 놓았습니다. 침침한 몇 「 가론」34)의 공기 속에 생생한
침엽수가 울창합니다. 황혼에만 사는 이민 같은 異國(이국)초목에는 순백의 갸름한 열매가 무수히 열렸습니다. 고치― 귀화한 「마리아」들이 최신
지혜의 과실을 端麗(단려)한 맵시로 따고 있습 니다. 그 아들의 불행한 최후를 슬퍼하며 「크리스마스 츄리」를 헐어 들어 가는 「피에다」35)
화폭 全圖(전도)입니다.
학교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고 생도들은 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간단한 산술을 놓아 그들의 정직과 순박을 지혜와 狡猾(교 활)로 換算(환산)하고 있습니다. 탄식할 利息算(이식산)이 아니겠습니까. 족보를 찢어 버린 것과 같은 흰 나비가 두어 마리 백묵내음새 나는 화단 위 에서 飜覆(번복)이 무상합니다. 또 연식 「테니스」공의 마개 뽑는 소리가 음향의 흔적이 되어서는 等高線(등고선)의 각점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 같 습니다. 이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 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蕩兒的(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紅毛(홍모)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활동사진을 보고 난 다음에 맛보는 담백한 허무―莊周(장주)의 호엽몽이 이 러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동글납짝한 머리가 그대로 「카메라」가 되어 피 곤한 「따불렌즈」36)로나마 몇 번이나 이 옥수수 무르익어가는 初秋(초추 )의 정경을 촬영하였으며 영사하였던가―「후래슈빽」37)으로 흐르는 엷은 애수―도회에 남아 있는 몇 고독한 「팬」에게 보내는 단장의 「스틸」38 )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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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 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 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 생을 적어 내려갈 便箋紙(편전지)―「스크린」이 薄暮(박모)
속에서 「바이 오그래피」39)의 豫備表情(예비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주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 봅니다. 사투리의 合音(합음)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棧橋(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모란봉입니다. 압록강 철 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泰西(태서)의 명감독이 바야흐 로 顔色(안색)이 없습니다. 10분 휴게시간에 조합이사의 通譯附(통역부) 연 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폿트」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 이곳
촌민들은 ××行 자동차 「헷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 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降壇(강단)하였습니다 .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물 론 나도 그 愚昧(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만은―. 밤
열한 시나 지나서 영화감상의 밤은 「해피엔드」였습니다. 조합원들과 영사기사는 이 촌 유일의 음식점에서 위로회를 열었습니다. 나는 객사로 돌
아와서 죽어가는 등잔심지를 돋우고 독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방 에 묵고 계신 노신사께서 내 懶楕(나타)와 우울을 훈계하는 뜻으로 빌려주
신 幸田露伴博士40)의 지은 바 「人의 道」라는 珍書(진서)입니다. 개가 멀 리서 끊일 사이 없이 이어 짖어댑니다. 그윽한 「하이칼라」
芳香(방향)을 못 잊어 군중은 아직도 헤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나왔습니다. 버래가 舞踏會(무답회)의 창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와짝 요란스럽습니다. 아지 못하는 路傍(노방)의 人을 사모하는 도 회인적인 향수가 있습니다. 신간잡지의 표지와 같이 신선한 여인들―「넥타 이」와 동갑인 신사들 그리고 창백한 여러 동무들―나를 기다리지 않는 고 향―도회에 내 나체의 말씀을 飜案(번안)하여 보내주고 싶습니다. 잠―성경 을 採字(채자)하다가 엎질러 버린 인쇄직공이 아무렇게나 주워담은 지리멸 렬한 활자의 꿈 나도 갈갈이 찢어진 使徒(사도)가 되어서 세 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굶는 가족을 모른다고 그립니다.
근심이 나를 除(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내가 閘門(갑문)41)을 열면 廢墟( 폐허)가 된 이 육신으로 근심의 조수가 스며들어 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메소이스트」 병마개를 아직 뽑지는 않습니다. 근심은 나를 싸고 돌며 그리는 동안에 이 육신은 風磨雨洗(풍마우세)로 저절로 다 말라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밤의 슬픈 공기를 원고지 위에 깔고 창백한 동무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속 에는 자신의 부고도 동봉하여 있습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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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성천:평안남도 성천군의 군청 소재지.
2)MJB:커피의 일종.
3)체전부:우편
집배원.
4)하도롱:hard―rolled paper. 다갈색의 종이로서 봉투, 포장지를 만듦. 여 기서는 다갈색 편지 봉투에 쓰인 내용을
말함.
5)한난계:온도를 재는 기계.
6)조밀한 인구:비망록에 쓰인 글씨들.
7)그라비아:gravure. 사진 제판에 응용하는
凹판 인쇄법.
8) 요비링:초인종의 일본어. 李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불러내는 기능으로 요비링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9)꼭두서니
빛:꼭두서니풀을 원료로 하여 만든 빨간 물감 빛. 꼭두서니는 풀 이름.
10)여주:박과에 딸린 한해살이 덩굴풀. 여름․가을에 노란꽃이
피고, 길고 둥근 열매는 붉노랗게 익는다.
11)세피아:sepia. 암갈색. 주로 수채화에 쓰이는
産頁料(안료)
12)세실․B․데밀:미국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1881~1959). 대형 스펙터클
영화를 잘 만들었음.
「십계」․「삼손과 데릴라」 등을 제작. 안소니 퀸의 장인.
13) 조셋트:지금의 쉬펀과 비슷한 우아한 여름 옷감.
14)외스트민스터
卷煙:웨스트민스트 卷煙. 영국의 良質(양질)의 紙卷煙(지 권연)
15)리그레추윙껌:리그레추잉검. 미국의 껌 이름.
16)蕙園:조선
후기의 풍속화가인 申潤福(신윤복․1758~?)의 호. 작품은 주 로 妓女(기녀)․巫俗(무속)․술집의 색정적인 장면 등을 그려, 인간주의적 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엿보임.
17)호박꼬자리:호박을 썰어서 말린 것.
18)제너레숀:generation.
世代(세대).
19)오브라―드:oblato. 전분으로 만든 얇은 원형의 簿片(부편). 그냥 먹기 어려운 약을 싸는 데도 쓰임. 투명한
전분지.
20)三停:머리와 이마의 경계(上停), 코끝(中停), 턱끝(下停).
21)五岳:이마․코․턱, 좌우
관골.
22)갑위:갑옷과 투구.
23)카―마인:carmine. 카아민을 잘못 발음한 것. 연지벌레에서 뽑아 낸 紅色(홍색)
안료.
24)꼭구마:원표기는 「꼬꼬마」, 군졸이 벙거지에 꽂던 붉은 털.
25)코삭크:Cossack. 카자흐(Kazakh)의 영어식
이름. 카스피 해의 북동쪽,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에 위치함.
26)간쓰메:통조림의 일본어.
27)미소노:1930년 무렵의 일제
화장품 이름.
28)화―스너:fastener. 분리되어 있는 것을 잠그는 데 쓰는 기구의 총칭. 지퍼․클립․척
등
29)꼬아리:꽈리
30)스크람:scrum. 여럿이 팔을 꽉 끼고 뭉치는 것.
31)코렛트 夫人:Sidonie
Gabrielle Colette(1873~1954). 프랑스의 여류 소 설가. 정확한 발음은 콜레트. 「클로디느 이야기」․「방랑하는 여인」․「
지지」․「암고양이」 등이 있음.
32)빈묘:암고양이. 여기서는 코레트 여사의 작품명.
33)편발處女:머리를 땋아 내린
처녀.
34)가론:gallon. 용량의 단위.
35)피에다:Pieta. 예수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像(상).
36)따불렌즈:double lens. 二重(이중) 렌즈.
37)후래슈빽:flashback. 영화에서 과거의 회상
장면을 말함.
38)스틸:still. 영화 중의 한 장면을 보통 사진기로 찍어 확대․인화한 사 진. 선전용으로
쓰임.
39)바이오그래피:biography. 傳記(전기).
40)幸田露伴博士:고우다 로한(1867~1947). 일본의
소설가.
41)閘門:수문.
한국의 명문 (수필) - 倦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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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倦怠
◈倦怠
李 箱
편집자 注:이 글은 1963년 문원각에서 나온 「한국수필문학전집」의 李箱편 에서 일부 발췌했다. 金相沃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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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僻村(벽촌)의 여름날은 지리 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東에 八峰山(팔봉산). 曲線(곡선)은 왜 저리도 屈曲(굴곡)이 없이 단조로운 고?
西를 보아도 벌판, 南을 보아도 벌판, 北을 보아도 벌판, 아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限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 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農家(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左右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壁,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 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金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炎署(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白紙(백지) 같은 「오늘」이라 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記事(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 다. 그럼―나는 崔서방네집 사랑 툇마루로 將棋(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崔서방은 들에 나갔다. 崔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崔서방의 조카 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時나 지난 後니까, 崔서 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崔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將棋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崔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崔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 와 將棋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倦怠(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倦怠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倦怠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將棋 조각을 갖다 놓는다. 崔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 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 고 하기도 싫다는 思想(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將棋를 갖 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줄 만큼 져주면 이 常勝將軍(상승장 군)은 이 압도적 倦怠를 이기지 못해 제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思想이리라 . 가고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崔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放心狀態(방심상태)가 되어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倦怠 속에서도 細(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人間利慾(인간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免(면)해야 한다. 倦怠를 인식하는 神經마저 버리고, 완전 히 虛脫(허탈)해 버려야 한다.…(下略)
한국의 명문 (수필)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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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수필
◈수필
皮 千 得
1910~. 시인수필가. 호는 琴兒. 서울 출생. 상하이 후장대학 영문과 졸업 . 서울대 사범대와 서울대
영문과 교수 역임.
편집자 注 :이 글은 샘터社에서 나온 수필집 「인연(因緣)」 2000년판에서 옮겨왔다. 李鍾德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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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靑瓷(청자) 硯滴(연적)이다. 수필은 蘭(난)이요, 鶴(학)이요, 淸楚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女人(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平坦(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 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靑春(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情熱(정열)이나 深奧(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 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散策(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頹落( 퇴락)하여 醜(추)하지 않고, 언제나 溫雅優美(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懶怠(나태)하지 아니하고, 束縛(속박)을 벗어나고서도 散漫(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優雅(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인간성이나 사 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題材(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 에서 나오는 液(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막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저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行路(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芳香(방향)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獨白(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 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 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 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 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 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破格(파격)이 수필인가 한 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 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 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焦燥(초조)와 煩雜(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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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인연
◈인연
皮 千 得
편집자 注:이 글은 샘터사刊 수필집 「인연」 2000년판에서 옮겨왔다. 柳永益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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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出講(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 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留宿(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 도 書生(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 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 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一年草(일년초) 꽃도 많 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 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 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 피는 아사코 같이 어리고 귀여 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 기관으 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 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년이 지나고 삼사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 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令孃(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 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 코는 나와의 再會(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存在(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 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 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 던 그 우산을 聯想(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 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 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解放(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戰死(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 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韓國(한국)이 獨立(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致賀(치하)하였다. 아사코는 전쟁 이 끝난 후, 맥아더 司令部(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 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未亡人(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 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 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 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 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 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 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 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進駐軍(진주군 ) 將校(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 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 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 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週末(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景致(경치)가 아 름다울 것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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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나무
◈나무
李 敭 河
1904~1963. 영문학자수필가. 평남 강서 출생. 東京대 영문과 졸업. 1951 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연구.「포켓영한사전」 편찬.
편집자 注 :원문은 문원각刊 「한국수필문학전집」 1963년판에서 全文을 옮 겨왔다. 송차수 교사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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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德(덕)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分數(분수)에 滿足(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厚薄(후박)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 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 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 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 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 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 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 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 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 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 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잡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 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대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 또 어떤 때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 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역시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 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 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 은 바람대로 다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는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참 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 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 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하는 것으로 일삼 는다. 그러길래,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그리고, 온갖 나뭇잎이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자연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보고 흔히는 자기 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가고 송두리째 베 어가고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리어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간 재목이 혹 자길 해칠 도끼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 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安分知足(안분지족)의 현인이다 .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딸깍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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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딸깍발이
◈딸깍발이
李 熙 昇
1896~1989. 어문학자. 경기 개풍 출생.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업. 동아 일보사장.
어문교육연구회 회장 등 역임. 저서 「국어대사전」 등 저서 다 수.
편집자 注:이 글은 1952년 「협동」 제37호에 실린 것으로, 1976년 범우사 에서 문고본으로 출간된 것을 원문으로 사용했다. 공명철
교사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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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 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 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구경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日人(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 크리트 길바닥을 걸어 다니는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 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나막신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다지 얘깃거리 가 될 것은 없다. 다만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유별난 窮狀(궁상)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 치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 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며, 사업이요, 목적 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 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三旬九食(삼순구식)의 비참한 생활을 해가는 것이다. 그 꼬락 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은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 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 지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 진다. 그래도 두 눈은 氣(기)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 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 이 뾰쪽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 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 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쪼 글쪼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중이 적삼이거나 伏(복)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 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行纏(행전)은 잊어 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日人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 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 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弊袍破笠(폐포파립)이나마 의관을 整齊(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 오경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典籍(전 적)을 얼음에 박 밀 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 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 각으로는, 淸廉介潔(청렴개결)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랴. 오직 예의, 염치가 있을 뿐이다. 仁(인)과 義(의)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 다. 百夷(백이)와 叔齊(숙제)를 배울 것이요, 岳飛(악비)와 文天祥(문천상 )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陰邪(음사)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取貸(취대)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이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雪上(설상) 삼척 냉돌에 변 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곱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 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이를 박박 갈면서 하 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만 ,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 야기다. 사실로 졌지만,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 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 활 신조였다.
실상 그들은 假明人(가명인)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를 小中華(소중화)로 만 든 것은 어줍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요 , 三學士(삼학사)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圃隱(포은 )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閔忠正(민충정)도 그다. 國號(국호)와 왕의 계승 에 있어서 明(명)․淸(청)의 응낙을 얻어야 했고, 曆書(역서)의 연호를 그 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역대 임금의 諡號(시호)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魂 (혼)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으로써 지존에게 直訴(직소)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인 유림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 壬亂(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旦夕(단석)에 迫到(박도)되었을 때, 각 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두목들도 다 이 「딸깍발이」 氣魄(기백)의 구현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구한국 말엽에 단발령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 서를 올려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고 부르짖고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迷惑(미혹)하기 짝이 없었지만, 죽음도 개의치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 륭한 점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 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 위로만 약다. 백년 대계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 앞의 일에만 아름아름 하는 姑息之計(고식지계)에 현명하다. 廉潔(염결)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실상 이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 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 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義氣(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木槿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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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木槿通信
◈木槿通信
金 素 雲
1907~1981. 시인 수필가번역문학가. 본명은 敎重. 경남 창원 출생. 19 20년 일본으로
건너감. 1923년부터 작품 활동. 1952년 첫 수필집 「마이동 풍첩」 발표.
편집자 注 : 이 글은 「목근통신」 中 「일본에 보내는 편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원문은 「한국수필문학전집」(문원각 刊)에서 옮겨
싣는다 . 공로명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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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每日」의 기자가 묻습니다.
『한국의 도시나 촌락에서 掠奪(약탈)을 당한 그런 흔적은 없던가요?』
『글쎄요, 한국에 약탈을 당할 만한 무슨 財産(재산)이 애당초에 있었던가 요? 그토록 빈한합니다. 이 나라는 ----』
UP기자의 이 대답에는 「掠奪의 대상이나 되었으면 제법이게---」하는, 또 하나의 暗意(암의)가 풍기어 있습니다. 사실인즉, 戰火(전화)로 인해서 입 은 직접피해 外에도 한국의 국민들은 허다한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 리가 「재산」이라고 하는 물자며 세간들은 있는 이의 눈으로 볼 때, 소꼽 장난의 부스러기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약탈의 대상도 못 되리 만치 빈곤하다는 이 辛辣(신랄)한 비평을 그러한 의 미에서 감수합니다. 그러나, 看過(간과)치 못할 또 하나의
문제가 여기 있 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36년 동안을 日本이 다스리던 나라입니다. 「一視同仁(일시동인)」의 일본의 정치가 마침내 한국을 이
빈곤에 머물게 했다는 사실은 別로 일본의 자랑이 못 될 것입니다.
〈「센징(鮮人)의 주택은 더럽다」고, 쓰는 것보다 「센징의 집은
돼지우리 같다」고 쓰는 편이 문장 표현으로는 더 효과적이다〉
20년 전 東京 三省堂에서 발행된 敎材書(교재서)의 한 구절입니다. 현명하 고 怜悧(영리)한 귀국 국민에도 제 욕을 제가 하는 이런 바보가 있었습니다 . 이런 천진한 바보의 귀에는 掠奪감도 못된다는 외국기자의 한국평이 통쾌 하고, 고소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마음 있는 이는 아마 또 하나의 반성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미제라블」(悲慘)은 한국의 수치이기 前 에 實로 일본의 德性(덕성)의 「바로미터」라는 것을―.
A:『한국에서 돌아와 일본을 보니, 여기는 바로 天國이야. 한국은 정말로 地獄이지…』
B:『戰線에서 잠드는 UN部隊들의 野營의 꿈은 뉴욕이나 캘리포니아가 아니 거든-. 긴자, 돗톤보리, 아사쿠사, 신주쿠--, 하나코상, 기미코상, 노부코 상의 꿈이지』
敗戰國(패전국)이라던 일본이 천국이요, 36年의 桎梏(질곡)에서 벗어났다는 한국이 지옥이란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위치를 顚倒 (전도)한 것 같은 신통하고도 재미있는 후세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전쟁에 지면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아프리카로 끌려가서 강제노동의 노예가 된다던 일본, 그 일본은 점령군 사령부의 寬厚(관후)한 庇護(비호) 아래 문화를 재건하며, 시설을 다시 回復(회복)하여 着着으로 戰前(전전)의 면모를 도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거기 대비할 때, 연합국의 일원이요, 당당한 승리자인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를 버리고 대만으로 밀려가고, 해방의 기쁨에 꽹과 리를 울리며 좋아 날뛰던 한국은 국토를 양단당한 채, 지난 1년 동안에는 두 번이나 수도 서울을 敵手(적수)의 유린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事實---, 가장 냉엄해야 할 「歷史」도 알고 보니 익살맞고 짓궂은 장난꾸 러기입니다.
행여나 誤解(오해)치 마십시오. 우리는 일본의 불행을 바라는 者가 아닙니 다. 일본의 행복을 嫉視(질시)하는 者가 아닙니다. 비록 「地獄」의 대명사 를 가지도록까지 일찍이 상상치도 못한 艱難(간난)과 塗炭(도탄)을 겪고 있 다고는 하나,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녀나가야 할 최후의 德性(덕성) 하나 를 쉽사리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인에 연령이 있는 것처럼 민족에도 민족의 연령이 있을 것입니다. 젊으면 경솔하고 순진하고, 늙으면 신중하고 狡狡(교교)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生理(생리)의 약속입니다.
같은 민족끼리도 문화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東京을 중심으로 한 關東과 京都를 표준으로 한 「가미가타」(上方)의 기질이며, 지방색을 비교해
본다면 , 여러분 자신이 이 사실을 수긍할 것입니다. 중국은 이미 늙은 나라입니다 . 일본은 동양삼국 중에서 가장 어리고 젊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민족의 연륜으로 보아 바로 그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본인의 민족성은 조급하나 경솔한 것이 자랑입니다. 대(竹)를
가른 것처 럼 꼿꼿하다는 形容(형용)을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곧잘 씁니다.
우리는 그것을 과신했기에 만일 일본이 패전한다면, 군인은 모조리 자살해 버리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실로 一場(일 장)의 넌센스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柔順(유순)하게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 고 그의 귀염까지 받으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입니다.
한국은 문화에 있어서 적어도 10여 세기를 일본에 앞선 나라입니다. 中國의 年輪(연륜)에는 미치지 못하나, 일본보다는 더 長成(장성)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사교성과 御人術(어인술)이 일본보다는 能해야 할 나라인데도 나타 난 결과는 正히 그와 반대입니다.
大川周明 博士는 전범자로 在監中(재감중)에 발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그의 기고만장한 저술 「일본 2600년史」에 대해서 일찍이 나는 「婦人公論」에 글 하나를 쓰고 削除(삭제)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 저서 중 「蘇我氏」에 언급한 1절에 조선으로부터 도래한 귀화인의 예를 들어, 우리 민 족성을 교활하고 간악한 최고의 표본으로 내세운 한 대문이 있습니다. 만일 , 그가 발광하지 않고 정신이 성했다면, 한번 다시 물어보고 싶은 일입니다 .― 오늘날의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순진한 민족이더 냐? 어느 쪽이 더 능란하고 교활한 민족이더냐를.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狂者(광자)입니다. 살아 있다 손치더라도 그는 이 설문에 대답할 의무를 거 부할 것입니다.
교활이니 純眞(순진)이니 하는 쉬운 한 마디 말로 어느 民族性(민족성)을 斷定(단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일개인에도 정반대로 대립되는 양 면의 성격이 있거든, 하물며 일국 일민족을 들어 어느 한 쪽으로 규정지어 버린다는 것은 될 말이 아닙니다. 이 과오는 이미 大川 博士가 犯했거니와 , 그 전철을 또 한번 이 글이 踏襲(답습)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입니다. 일본이 순진하든 한국이 교활하든 그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 오늘날의 결과로 보아서 한국은 그 전통의 美와, 민족의 숨은 정서를 백 에 하나 나타내지 못하고, 외국 기자의 입으로 「지옥」이란 별명을 듣도록 쯤 되었습니다. 반대로 戰時(전시)에는 美․英을 「鬼畜(귀축)」이란 冠詞 (관사)로 부르던 일본이 그네들에게 도리어 「천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한국인된 우리 자신이 반성할 허다한 문제가 잠재해 있는 것은 물론 입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역사의 불행만을 구실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위 적으로도 우리는 적지않은 불행을 제조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우리 자신이 우리가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문제로 패전국 일본이 「천국」이 된 그 연유나 경로는 우리가 알고 싶은, 알아두어야 할 또하나의 흥미 있는 과제입니다.
서양주택에 중국요리, 게다가 일본 아내를 거느린 자는 세계 최대의 행운아 란 말이 있습니다. 由來(유래)로 일본의 「서비스 스피릿」이란 그토록 유 명합니다. 이것은 우리로서도 배움직한 미덕의 하나입니다.
進駐軍(진주군)에 대해서 이 「서비스 스피릿」이 얼마나 철저하게 충실하 게 발휘되었던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아니나, 전해오는 소문만으로도 짐작하기에 충분했 습니다.
내가 못하는 일을 남이 하면 으레 탈을 잡아보고 싶고, 티를 뜯어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이 「미덕」에 대해서 감히 입을 대이지 못합니다. 일찍이 「마담 버터플라이」 하나를 내지 못하고, 시모 다(下田)의 「오키치」 하나를 가지지 못한 우리로서는 흉내를 낼래야 낼 수 없는 노릇입니다.
UN軍이 지나갈 때, 입을 벌리고 황홀히 쳐다보며 「야아, 참 키도 억세게 크다」 「그 친구 되게 검네」하고, 탄복을 마지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가두 풍경입니다. 사교성과 접대술에 이렇게 우둔한 민족이 「서브」의 종가라고 하는 일본 같은 나라와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다는 것이, 이를테면 우리들 의 불운입니다. 하필 일본과 비교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우리의 사교성은 확 실히 낙제입니다. 山설고 물 다른 만리이역에 와서, 더욱이 신명을 바쳐 戰野(전야)를 달리는 이들에게 한국이 지옥으로 비친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무리가 아닙니다.
새 역사가 가져온 우리들의 비극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서민문학의 주인공인 「春香(춘향)」의 절개를 자랑하던 민족입니다. 倭將(왜장)의 허 리를 끌어안고 南江(남강)의 푸른 물에 잠긴 「論介의 義」를 羨慕(선모)하 던 백성입니다. 우리들이 아끼고 위하는 이런 고귀한 정신은 「紅毛碧眼(홍 모벽안)」의 외국 손님들 앞에는 하나의 「빵빵 걸」의 매력에도 당하지 못 합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이나 문화를 연구하러 온 학자․예술가가 아닙니다. 그 들이 흘린 「피」의 희생에 대한 報酬(보수)는 다만 「승리」일 뿐입니다. 승리 하나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春香」의 절개, 「論介의 義」를 이해하라는 것이 도대체 지나친 기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혹시 오해를 살지 모릅니다마는, 일본의 천국설이 「빵빵 」文化, 娼婦(창부)의 서브에 유래한 것이라고 결론할 것이라면, 애당초에 이런 글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戰後(전후) 일본의 새 유행인 소위 아프 레게에르와 당신네들의 그 봉사정신의 미덕을 같은 촌수로 따지도록까지, 그렇게 일본에 對해서 나는 몰이해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화자찬 격입니다 마는, 나는 「源氏物語(원씨물어)」를 原文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萬葉(만엽)」의 詩心(시심)을 「바쇼」(芭蕉)․「부손」(蕪村)의 경지를 내딴에는 이해한다는 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일본을 천국이라고 하는 어느 외국기자, 어느 進駐군인에 뒤떨어질 바 아닙니다. 잘한 일인지, 못 한 일인지 그 결산은 별문제로 하고, 나는 내 過半生(과반생)의 에네르기를 기울여 일본을 알고 일본을 배우고, 일본의 그릇된 방만과 자존 앞에 내 향토의 문화와 전통의 美를 矜示(긍시)함으로써 임무삼던 자입니다. 일본이 지닌 「惡」을 한국의 어느 애국자 못지않게 나는 압니다. 동시에 일본의 「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입니다.…(後略)
한국의 명문(수필) - 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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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수필) - 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
◈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
吳 相 淳
1893~1963. 시인․수필가. 호는 空超. 서울 출생. 1920년 「폐허」 동인.
편집자 注:원문은 글벗사刊 「한국의 영원한 수필 명작」 1994년 판을 사용 했다. 신봉승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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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消遣法(소견법)으로 거위 한 쌍 을 구하여 자식 삼아 정원에 놓아 기르기 十個星霜(십개성상)이거니 올 여
름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음식과 수면을
거 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달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우는
斷腸曲(단장곡)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 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 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寂寂(적적) 無聞(무 문),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다시
외치며 제 소리 울려 오는 편 으로 쫓아가다가 결국은 암담한 절망과 회의의 답답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 서는 꼴은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말
못하는 짐승이라 때묻은 말은 주고 받고 못하나 너도나도 모르는 중의 一脈(일맥)의 진정이 서로 사이에 통하 였는지, 10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내
홀로 적막하고 쓸쓸하고 수심스러울 제 환희에 넘치는 너희들의 약동하는 생태는 나에게 무한한 위로요 감동이었 고, 四圍(사위)가 적연한 달 밝은
가을 밤에 너희들 자신도 모르게 무심히 외치는 애달픈 향수의 노랫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천지 적막의 향수를 그 윽이 느끼고 긴 한숨을 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러니―고독한 나의 愛物(애 물)아, 내 일찍이 너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친 能(능)이 있었던들 이 내 가 슴속 어리고 서린 한없는
서러운 사정과 情曲(정곡)을 알려 들리기도 하고 호소도 해보고, 기실 너도나도 꼭같은 한없는 이 설움 서로 공명도 하고 같이 통곡도 해보련만,
이 지극한 설움의 순간의 통정을 너로 더불어 한 가 지 못하는 영원한 遺恨(유한)이여―
외로움과 설움을 주체 못하는 순간마다 사람인 나에게 술과 담배가 있으니 , 한 개의 瀟湘斑竹(소상반죽)의 煙管(연관)이 있어 무한으로 통한
청신한 대기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육부에 서린 설움을 창공에 뿜어내어 紫煙(자 연)의 선율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이 쉴 수도 있고, 한 잔의 술이 있어 위로 뜨고 치밀어오르는 억제 못할 설움을 달래며
九曲肝腸(구 곡간장) 속으로 마셔들여 속으로 스며들게 할 수도 있고, 12絃(현) 가야금 이 있어, 감정과 의지의 첨단적 표현 기능인 열
손가락으로 이 줄 저 줄 골 라 짚어, 간장에 어린 설움 골수에 맺힌 한을 음률과 운율의 선에 실어 찾 아내어 기맥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실한 이 내 가슴속 감정의 물 결이 열두 줄에 부딪쳐 몸부림 맘부림 쳐 가며 운명의 신을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밀며, 댕기며,
부르며, 쫓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맺 으며, 높고 낮고 길게 짧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 가며, 감돌아 들며, 미묘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가는 데를 모르는 심연한 선율과 운율과 여운의 영원한 調和美(조화미) 속에 줄도 있고 나도 썩고 陶然(도연)히 취 할 수도
있거니와―그리고 네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 이 곡조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아아, 차라리 너마저 죽어 없어지면 네 얼 마나 행복하며 네 얼마나 구제되랴. 이 내 애절한 심사 너는 모르고도 알리 라.
이 내 무자비한 심술 너만은 알리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말 못 하는 짐승이라 꿈에라도 행여 가벼이 보지 말지니, 삶의 기쁨과 죽음의 설
움을 사람과 꼭같이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보다도 더 절실한 느낌을 보았노 라. 사람은 산 줄 알고 살고, 죽은 줄 알고 죽고, 저는 모르고
살고, 모르 고 죽는 것이 다를 뿐, 저는 生(생)․死(사)․運命(운명)에 무조건으로 절 대 충실하고 순수한 순종자―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우월감을 버리고 운명의 반역자임을 자랑 말지니, 엄격한 운명의 지상 명령에 歸一(귀일)하 는 결론은 마침내 같지 아니한가.
너는 본래
본성이 솔직한 동물이라 일직선으로 살다가 일직선으로 죽을 뿐 , 사람은 금단의 지혜의 과실을 따 먹은 덕과 벌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 물이라
직선과 동시에 곡선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10년을 하루같 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起居(기거)와 動靜(동정)을 같이하고
喜怒愛樂(희로애락)의 생활 감정을 같이하며 서로 사이에 일맥의 진정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한 인간을 접해 온 10년 동안에 너만큼 순수한
진정이 통하는 벗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 못할 파 멸의 비극에 직면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의 기술을 모르는 솔직 단순한 너의 숙명적 비통을 무엇으로 위 로하랴. 너도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한 망각의 사막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 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忘憂草(망우초) 태산 같고 술이 억만 잔인들 한없는 운명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 12현 인들 골수에 맺힌 무궁한 이 怨(원)을
만분의 일이나 실어 날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 본들 이 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 있으랴. 간절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저것 다 없다는 본래 내 고향 찾아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 어이 찾을꼬, 참 내 고향 어이 찾 을꼬.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 리 가을이 완연한데,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일까.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방금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千秋(천추)의 감격과 감사 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고 벽력 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 루만지며, 枕頭(침두)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鳳(봉)이 울 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이 아니요, 꿈 깨니 또 꿈 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 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 고 아름답게 깊었고녀― 꿈은 깨어 무엇하리.
한국의 명문 (수필) - 방망이 깎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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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방망이 깎던 노인
◈방망이 깎던 노인
尹 五 榮
1907~1976. 수필가, 서울 출생. 양정고보 졸업. 보성고교서 20년간 교편 생활. 「수필문학입문」 등 저서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글벗사刊 「한국의 영원한 수필 명작」 1994년 판에서 全文을 옮겨 왔다. 김상옥씨 추천.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가는 길에, 청량리 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 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 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
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 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 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 시 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 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 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 듬다가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 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 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竹器(죽기)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 그러나 요새 竹器는 대쪽이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竹器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 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藥材(약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熟地黃(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 마, 윗길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九蒸九日暴(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 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 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 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 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 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 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 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 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 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 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 깎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 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採菊東籬不 (채국동리불)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도연명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북 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 래다. 요새는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萬戶衣聲(만호도의성) 」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 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 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 른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바둑이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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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바둑이와 나
◈바둑이와 나
崔 淳 雨
1916~1984. 미술사학자미술평론가. 경기도 개성 출생. 1946년 국립개성박 물관 근무.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저서 「한국미술사」.
편집자 注:이 글은 1992년 학고재에서 출간된 「崔淳雨 전집」에 실려 있다 . 李興雨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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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3월 서울이 다시 수복되자 비행기 편에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 단신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비바람이 음산한 3월29일 저녁
때였다. 기약할 수 없는 스산한 마음을 안고 서울을 떠난 지 넉 달이 됐던 것이다.
멀리 포성이 으르렁대는 칠흑 같은 서울의 한밤을 어느 낯 모르는 민가에서 지샌 나는 우선 戰禍(전화) 속에 남겨두고 간 박물관의 피해 조사에 온하 루 동안 여념이 없었다. 부산에 보낼 첫 보고서를 군용 비행기 편으로 써 보내고 난 그 다음날 오후 비로소 나는 마음의 여유를 얻어 경복궁 뒤뜰에 남겨두고 간 나의 사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그대로 문을 꼭 닫아두고 떠났던 나의 서재 그리고 독마다 담아놓고 간 싱그러운 보쌈 김치 같은 것들이 그 보금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 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떼어 놓고 간 우리 바둑이의 가엾은 운명이 생각키워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다.
메마른 잡초가 우거진 경복궁 뒤 옛 뜰엔 전과 다름없이 따스한 봄볕이 짜 릿하게 깃들이고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는 마른 풀밭에선 굶주린 고양이가 놀라 뛰고 있었다. 풀밭길을 걸으며 일찍이 우리 집 해묵은 기왓골이 보일 무렵에 나의 마음은 야릇한 감상에 젖어 「옛 고향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순화된 감정이 되어 있었다. 나의 시선이 천천히 다가오는 나의 집 대 청과 건넌방 쪽마루를 우선 더듬었을 때 나는 뜻하지 않은 일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쪽마루 위엔 두고 간 우리 바둑이가 늘 즐겨 서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납작하게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이 는 자기를 버리고 간 매정스러운 주인의 빈 집을 지키다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나는 어느 사이에 내가 늘 밖에서 돌아올 때면 바둑이를 위하여 불 던 휘파람을 『휘휘 휘요-』하고 불고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마구 구겨진 걸레조각처럼 말라 널브러져 보이던 바둑이는 머리를 기적처럼 번쩍 들고 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단숨에 나에게 달려왔다. 내 발 밑에서 데굴데굴 구 르고 사뭇 미친 듯싶어 보였다. 나도 왈칵 눈시울이 더워와서 그를 덥석 껴 안았지만 그때 바둑이도 함께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그의 눈은 나의 눈 길을 간단없이 더듬었고 그의 메마른 입은 사정없이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내 얼굴을 마구 핥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옛 애인에게라도 하듯이,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하면서 그 를 달래 주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버리고 갔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너를 떼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 넉 달 전 그를 버리고 서울을 떠나던 날은 바로 이웃 I씨에게 서울에 남 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바둑이를 좀 돌보아 달라고 몇 말의 먹이를 맡 겨두고 나서 마치 바둑이가 말귀를 알아듣기나 하듯이 『집을 잘 보고 있으 면 머지 않아 다시 돌아오마, 응』하면서 그를 타이른 나였다. 그후 이웃 I씨도 불과 일주일 만에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넓은 고궁 속, 춥고 시장한 한겨우내, 공포만이 깃들인 어둡고 외로운 밤들을 우리 바둑 이는 과연 무슨 수로 살아남아 준 것일까.
나는 바둑이를 안고서 단숨에 거리로 나왔다. 우선 굶주려 지친 바둑이가 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세종로 네거리에 나와서도 핼쑥한 아주머 니가 초콜릿이니 양담배 부스러기니 하는 따위들을 길가에 손바닥만큼 펴 놓고 텅빈 거리를 지키고 있을 뿐 바둑이가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도 그 다음날도 바둑이는 밥을 주어도 먹지 못했다. 굶주 림에 지친 그의 내장은 대번에 곡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조금씩 먹기 시작한 바둑이는 그림자처럼 한 시도 내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서울 장안에서 안전한 숙 소가 없던 당시 인기척도 없는 덕수궁 안 빈 집(미술관장 사택)에서 혼자 자야 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때 만약 바둑이가 없었던들 그 어둡고 무거 운 밤들을 아마 나 혼자 감당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바둑이는 원래 버릇대로 방 안에는 못 들어오는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혼자 덩그러니 어둔 방 안에서 먼 포성을 들으면서 뒤척거리고
있으면 바둑이는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숨소리를 쌔근대면서 방 안을 살피곤 했다. 때때로 문을 열고 회중전등으로 얼굴을 비춰
주면 바둑이는 웅크린 채 꼬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좋다고 한다. 방석을 주어도 밤마다 그는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만 올라 앉아 불편한 잠자리를
길들 이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밤 사이만이라도 떨어져 자야 하는 그리운 주인의 체취를 즐 기려는 속셈이었는지 또는 겉으로는 다정한
체하면서 정 급할 때는 「나 몰 라라」하고 死地(사지)에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던 믿지 못할 이 사나이가 밤 사이에라도 또 잠든 틈을 타서 그
군화를 신고 그때처럼 어디론지 훌쩍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4월 하순의 어느 날 중공군의 제1차 춘기 공세가 서울 변두 리에 다가왔다. 한밤내 우레 같은 포성이 쉴 사이 없고 귀를 기울이면 시청 앞을 지나는 군용 차량들은 줄곧 남쪽으로 달리는 듯싶었다.
그날 저녁 서울은 무거운 암흑 속에 산너머의 섬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온통 피난 때문에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바둑이는 그동안 나와 함께 두 끼를 굶고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고 있었다 . 결코 이번만은 너를 놓칠 수 없노라는 듯싶어 보였다. 가마니에 병자를 싣고 질질 끌고 가는 처절한 여인들의 모습, 그리고 나를 태워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 젊은 아낙네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에는 듯한데 나는 바둑이를 안고 최후의 철수 열차에 연결한 우리 화차에 올랐다. 어두운 역 두에서 방금 눈물을 닦으며 작별한 늙은 수위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둑이와 나는 오래 응시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소개화차를 연결하느라고, 한밤내 열차는 앞걸음질 뒷걸음질을 치며 난폭한 충격을 우리 화차에까지 주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둑이는 한 번 덴 가슴에 놀라서 동요했고 가까워진 포성과 폭격의 우레소리가 그를 자 극해서 바둑이는 내 가슴에 안긴 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훤히 날이 밝은 새벽 또 한번 큰 충격이 우리 화차에 오자 바둑이는 脫兎( 탈토)같이 내 가슴을 벗어나서 벌써 레일 위를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도 화차에서 뛰어내려 바둑이를 따라 달렸다. 나의 숨이 턱 에 닿도록 지쳐서야 겨우 바둑이는 발랑 누워서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기 관차는 까마득히 먼데 기적은 연거푸 울리며 우리를 부르는 듯했다. 그때 기차가 우리를 버리고 떠날까봐 우리는 바로 기차가 올 레일 위를 달 리고 있었다.
기관사는 이 판국에 개 한 마리가 다 무어냐고 고함을 쳤지만 나는 사과할 겨를도 기운도 없었다. 그는 불쌍한 바둑이를 내가 또다시 이 死地에 버리 고 서울을 떠날 수 없는 심정을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바둑이의 그후
6․25 난리 속에서 일어났던 의리 깊은 우리 바둑이와 나 사이의 이야기가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린 후 여러 지방 소년소녀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 게 되었다. 그 다정한 편지들 사연 속에는 그후 그 바둑이가 어찌 되었는지 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므로 그 바둑이가 저승으로 돌 아간 지도 이미 오래됐고 바둑이의 아들딸들의 이야기도 좀 아리송해졌지만 생각나는 대로 그후의 이야기를 조금 써 두고자 한다.
굶주림과 추위와 절벽 같은 외로움 속에서 꼭 100날을 우리 바둑이는 눈에 덮인 경복궁 뒤뜰 나의 집(박물관 사택)을 지키면서 내가 돌아올 날을 기 다려 준 개였다. 100일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바둑이는 지칠 대로 지쳐서 마 치 걸레뭉치처럼 쪽마루 위에 늘어진 뼈와 가죽뿐이었다. 부산으로 안고 내 려간 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지만 한 반 년 지나면서 귀여운 모습이 되살아나서 수캐들이 늠실거리기 시작했고 바둑이는 머지 않아 자기를 닮 은 첫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개가 되었다.
바둑이의 아들 하나는 동료이며 술친구인 K박사가 데려가더니 그의 피난살 이 집 뜰에 손수 개장을 지어 주어 호강을 하게 되었다.
K박사는 그 개집에 金德狗씨 부산 별장이라 문패를 달아 주었고 우리들에게 는 그것이 피난 시름을 달래는 밝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아들개는 그후 주인과 함께 한 많은 부산 별장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때 마침 서울에 환도한 경무대 발바리개 암컷이 그 배필을 구하고 있었으 므로 우리 바둑이의 아들개는 경무대 발바리개의 배필로 들어갔고 이 이야 기는 이미 K박사의 수필로 유명해진 이야기가 되었다.
또 딸개 하나는 젖도 채 떨어지기 전에 경주박물관 C박사에게 보내졌는데 어쩌다가 내가 경주에 가게 되면 어찌 나를 알아보는지 오줌을 찔끔찔끔, 데굴데굴 구르면서 미친 듯이 내 얼굴을 핥고는 했다.
C박사와 술자리를 벌이면 으레 옆에 와 앉아서 귀염을 떨었는데 너도 한 잔 같이 하자 하고 개 입에 술을 한 잔 먹여 주면 그 술기가 돌아서 비실대는 모습이 그리도 즐거웠다. 어쨌든 우리 어미 바둑이는 그후에도 셋방살이 이웃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서 귀여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보니 홀연히 온데간데 없어져서 집사람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바로 이웃방에 셋방살이하는 젊은이가 우리 바둑이를 그토록 탐내서 납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들 했다. 맛있는 것으로 우리 바둑이를 꾀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되었으며 전날 저녁 때 그 청년이 싫다 는 바둑이를 억지로 안고 택시에 올라타더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 바둑이가 또 기구한 운명에 놓여졌구나 해서 마음이 언짢았다. 그 젊 은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닷새째 되던 날 우리 바둑이는 거지꼴이 되 어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집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안아들였지만 말 못 하는 바둑이의 눈길에서 우리는 그 호소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납치되어 간 집에서 바둑이는 결사적으로 탈출해서 그리운 집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후에 그 저주스러운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우리 셋방으로부터 30 리나 떨어진 釜山市 西面 자기 부모집으로 데리고 가서 매두었더니 사흘째 가서야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안심해서 풀어주었더니 풀어 주는 순간 거리로 뛰쳐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미아산 밑 토성동 셋방까지는 서면에서 복잡하고도 먼 거리였는데 우리 바둑이는 택 시에 태워져서 어둠 속에 끌려간 그 길을 어찌 찾아왔는지 나는 그때 개만 도 못한 놈이라고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그 뻔뻔스러운 납치자에 대 한 분노를 삭였다.
그로부터 우리 바둑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저주할 사람의 짓거리가 더할 수 없이 노여웠고 그 복잡하고 낯선 길을 집까지 찾아오느 라고 겪은 마음과 몸의 고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이 가엾 은 바둑이를 가축병원에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 살아날 가망이 없지만 입원 시켜 보는 것이 좋겠다 해서 입원시켰더니 나흘 만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고 개도 개 나름이겠지만 사람보다 더 의리 깊은 개도 있고 개만도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 바둑이는 194 8년 2월 나의 친구 H군의 사랑받는 개의 외동딸(한 마리만 낳았다)로 태어 났다.
우리 친구도 개를 그리 좋아해서 이 귀여운 무남독녀 개를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해서 나도 그를 대견히 알아서 주먹만한 어린 것을 오버코트 주머 니에 넣고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1952년 가을 부산 가축병원에서 죽어갈 때까지 4년 반 동안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죽은 우리 바둑이에 대한 생각은 어느 한 사람에게 서린 추억 못지않게 내 마음속에 지금도 따스하게 살아 있다. 지금 기르고 있는 우리 집 착한 바둑이의 얼굴을 가끔 유심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노라면 죽은 바둑이의 환생인 양 싶어질 때도 있고 그러노라면 개의 눈동자가 무슨 간절한 호소를 하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람들의 욕 중 에 개 같은 놈이니 개만도 못한 놈이니 하고 개욕을 도매금으로 해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개는 그렇게 부도덕한 짐승이 아닌 것만 같다.
한국의 명문 (수필) - 淸貧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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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淸貧禮讚
◈淸貧禮讚
金 晋 燮
1903~? 수필가독문학자. 호는 청천. 이하윤 등과 함께 「해외문학」 발간 .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등 다수. 6․25 당시 拉北
편집자 注 : 1930년 「母頌論(모송론)」을 발표하며 본격 수필문학 데뷔. 주로 철학적․사색적 수필을 많이 썼다. 이 글은 1963년
문원각에서 나온 「한국수필문학전집」에서 옮겨 싣는다. 신봉승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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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 무어라 할 窮相(궁상)이 똑똑 흐르는 사상이뇨 하고, 독자 여러분 은 크게 놀라실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람이 이 황금만능의 천하에서 淸貧(
청빈)을 예찬할 만큼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이 왕 부자가 못된 바에는 貧窮(빈궁)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 이 청빈을 極口禮讚(극구예찬)함은 우리들 선량한 貧者(빈자)가 이 世上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 혹은 부유라 하며, 혹은 빈곤하다 말하나, 대체 부유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 이며, 빈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냐? 사람이 부자이기
위해서는 대체 얼 마나 많이 가져야 되고, 사람이 가난키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적게 가져야 되느냐? 그러나, 물론 이것을 아는 이는 없다.
보라! 이 세상에는 부자임 에도 불구하고, 실로 대단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난하다 생각하 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徒輩(도배)는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느 날에 이르러도 자족함을 알지 못하고, 전연히 필요치 않은 많 은 것을 요망한다. 말하자면,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할까, 도달할 수 없는 상 층만을 애써 쳐다보곤, 아직도 자기에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포만함을 알지 못하고 「충분타」하는 아름다운 말을 이미 잊은 바 , 그러한 徒輩를 사람은 도와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또 보라! 이 세상에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넉넉타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 람은 허다치 않은가? 이 사람들에겐 명색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대개는 손으로 벌어서 입으로 먹는 생활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로 필요한 것조차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말하자면 밑에는 밑이 있으니까, 밑만 보고 또 이 위에도 더욱 가난할 수 있을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切迫(절박)한 곤궁 속에 주리고 있는가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 위안의 名流(명류)들은 마치 그들이 그들의 힘과 사랑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두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래가 빈부의 객관적 표준은 있을 수 없으므로, 빈궁의 문제를 쉽사리 규정하여 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오직 조그만 주머니가 곧 채워질 수 있음에 대하여, 구멍난 大囊(대낭)이 결코 차지 않는 물리적 이 유에만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빈부의 최후의 결정자는 그 사람 자신일 뿐이요, 주위에 방황하는 제3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사람이 참된 부유를 자손을 위 하여 남기려거든, 드디어 한이 있는 물질보다는 밑을 보는 才操(재조)와 缺乏(결핍)에 사는 기술을 전함에 지남이 없을 것이다. 자족의 취미와 자기의 역량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轉置(전치)할 수 있는 정신적 재능이야말로 사 람을 부자이게 하는 바 2대 요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과연 빈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여기 두 가지 종류의 빈궁을 지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물질적 빈궁이 라 할 수 있으니, 이제 벌써 할 일이 없고, 그러므로 쓸데없는 존재가 된 사람이 그보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없는 까닭으로 활동과 생존에 대한 권 리를 이미 잃고, 여기는 영구히 자족과 質素(질소)의 어떠한 예술도 적용될 수 없을 때, 실로 그때 그는 참으로 가난하며, 실로 거기 참된 빈궁은 있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빈궁이라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사람이 그의 참된 역량 과 그의 참된 사랑을 바칠 수 있는 하나의 정당하고, 또 아름다운 「다른 곳」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치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른 곳 」을 어리석은 나로서 嘲笑(조소)하므로 의하여 자기 자신을 無用(무용)의 長者(장자)로 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과 활동이 의미를 상실할 때, 이 결 핍을 맛보라 하지 않고, 지향없이 탐욕만 추구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 로 다른 의미에서 가난한 자라 아니할 수 없으며, 또 우리는 이곳에 다른 하나의 참된 빈궁을 발견치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여기 우리가 가장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2유형의 빈자 가 냉담하고 倨慢(거만)한 태도로 제1유형의 빈자 옆을 지나친다는 사실이 다. 일찍이 디오게네스는 그의 조그만 통 속에서도 극히 쾌활하게 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겐 이 세상 전체가 한없이 작은 것이었다. 여기 만일에 사람이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富를 더욱 큰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면, 그의 청빈은 확실히 적은 「재산」은 아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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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수필) - 무소유
◈무소유
法 頂
승려.저서 「버리고 떠나기」 「텅빈 충만」 「서있는 사람들」 「영혼의 母音」 「말과 침묵」 등 다수.
편집자 注:1971년 3월 「현대문학」으로 데뷔. 수필집 「무소유」는 1976년 범우사에서 나왔다. 박종만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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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盆(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 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茶崍軒(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 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 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 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耘虛老師(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 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 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 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 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 길 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盆을 안 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 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有情(유정)」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 해 無所有(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한국의 명문 (수필)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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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의
명문 (수필)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李 御 寧
1934~. 문학평론가수필가교육자. 충남 온양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 이화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 등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1997년 판에서 「에필로그」 부분을 옮겨온 것이다. 윤금초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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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 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 태 양과 구름과 소나기와 바람의 證人(증인)… 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 버린 흙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의 아픔 과, 생명의 흔들림이, 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말한 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눈 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引力(인력)이 나뭇잎을
유혹한다. 언어가 아니라 나 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별들의 運行(운행)과 나 뭇잎의 파동은 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한국의 명문 (수필)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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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申 榮 福
1941~. 성공회대 경제학과 교수.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 20년20일 복역. 1988년 출소.
편집자 注:1977년 4월15일에 저자가 쓴 편지다. 서한을 한데 모은 「감옥으 로부터의 사색」은 1988년에 출간되었다. 이 글은
「서도의 관계론」을 옮 겨온 것이다. 박종만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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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
제가
書道(서도)를 운위하다니 堂拘(당구)의 吠風月(폐풍월) 짝입니다만 엽 서 위의 片言(편언)이고 보면 條理(조리)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 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改漆(개칠)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字(자 )」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獨存(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 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한
「行(행)」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聯(연)」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 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 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들이 대소, 강약, 太細(태세), 遲速(지속), 濃淡(농담)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 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열 개가 전부 무너질 뻔 한, 심지어 落款(낙관)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 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 일이 창출해 내는 드높은 「質(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 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군서)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代償(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 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 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人(인)과 인 間(간)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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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
정 운 영
1944~.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한겨레신문 1989년 9월12일자에 실린 칼럼이다. 박종만 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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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귀향이다. 그러나 그 귀향이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고기는 옛 못을 생각한다(覇鳥戀舊林 池魚思故淵)』는 陶潛(도잠)의 감상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또한 그것은 『흥청한 나룻배에 올라고향으로 간다/갈 곳은 붉은 노을에 잠을 깨 었고』라는 스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
류의 오만한 「귀향」으로 나 타나서도 안 된다. 고향은 언제나 우리에게 영원한 「힘의 샘」이기 때문이 다. 어디엔가 돌아갈 거처가 있다는 사실은
분주한 문명에 찌든 도회인들에 게 분명히 넓고 깊은 위안이 된다. 고향은 언제나 그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 를 맞으면서도 구태여 그 대가를
기다리지 않기에, 아파트의 면적이나 승용 차의 배기량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도시의 각박한 인심으로 오염시키지 않도 록 우리 모두 굳게 다짐해야
한다. 비록 화물 트럭의 뒤칸에서 밤새 시달리 며 달려 왔어도, 비록 해진 양복 주머니 속에 빳빳한 지폐 다발이 들어 있 지 않더라도 다만
그동안 정직한 삶과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고향의 부모와 형제와 친지와의 반가운 재회를 기대할 수만 있다면 굳이 우리의 「빈손」 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흙에 지친 어머니의 투박한 손길처럼 우 선 겸손해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귀향에 앞서 우리의 가슴에 준비해야 할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추석은 결실이다. 겨우내 터졌던 손등이 아물기도 전에 언 땅에 씨를 뿌렸고, 그리고 잔등에 모닥불을 피워대던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자식처럼 키워낸 그 수고와 권 태의 결실들이 마침내 이 추석에 진열된다. 그러니 허리띠를 풀자. 추수감 사절에 감사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節食(절식)하는 녀석뿐이란 서양의 익 살이 있지 않던가? 혹시 과잉소비를 걱정하는 정부관리나 생산의 차질을 불 평하는 기업가들이 여기 끼어들어 시비하거든 그들의 궁둥이를 한번 힘껏 걷어차 주자. 이미 옛적에 기름진 땅을 찾아 흉노족은 대륙을 넘어 대이주 를 감행했으며, 이웃 나라의 금붙이를 약탈하기 위해 무적함대는 바다를 누 볐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민족 대이동에는 수확의 고마움을 조상 에게 전하고 그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숭고한 뜻이 담겨져 있다. 결 국 모든 결실은 흙과 노동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를 주면 반드시 하나 이상을 돌려주는 그 흙과 노동의 정직한 계산으로부터 우리는 추석의 절기를 마련한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추석은 화해이다.
모든 새로운 잉태는 투쟁으로 비롯되지만 마침내 화해로 끝나야 하기 때문 이다. 추석 귀향단을 모집하는 안내문들이 어지러운 대학 게시판의 한 모퉁 이에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사소한 부주의로 포로가 되어 이렇게 무기력 하게 그들의 관용이나 바라는 처지가 된 지금의 내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느 자리에 있건 민중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게 당당 히 생활할 작정이다. 이곳 구치소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은 인내와 방황과 고민을 요구하는 곳이기도 하 다」로 이어지는 어느 젊은이의 공개된 편지를 읽으면서, 정치적 신조와 판 단이 다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숱한 사람들을 철창 안에 가두어 둔 채, 햇 곡식과 햇과일로 드리는 제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잠시 생각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실로 제사의 참뜻이 사람과 사람의 화해에 있다면 추 석은 마땅히 그 진정한 화해의 계기가 되어야 할 텐데….
추석은 대비이다.
가을을 거두고 나면 다시 혹독한 겨울의 시련이 다가온다. 그러므로 가을의 추수는 그만큼 더 충실해야 한다.
이 가을 밤 그대를 생각하고
쓸쓸한 하늘을 쳐다보며 거니네. 적막한 산중에 솔방울이 떨어지는데 숨어사는 그대 나로 하여 잠 못 드는가.
懷君屬秋夜 散步昑凉天
山空松子落 幽人應未眠
나 또한 그대로 인해 잠 못드는 이 밤, 머지 않아 찾아올 그 겨울에의 대비 를 서둘러야겠다. 지금부터 먹을 갈고, 촛대를 닦고, 책장을 정돈한다면 이 번 겨울은 아주 호사스럽게 지내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추석은 재회와 화해의 시기이고, 또한 결실과 대비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돌아가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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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수필) - 돌아가는 배
◈돌아가는 배
金 聖 佑
1934~. 한국일보 논설고문.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일 보
駐佛특파원․편집국장 등 역임. 저서 「돌아가는 배」 등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1999년 「삶과 꿈」에서 출간된 「돌아가는 배」의 맨 마지막 章을 옮겨온 것이다. 노재봉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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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아가리라. 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출항의 항로를 따라 귀항 하리라. 젊은 시절 수천 개의 돛대를 세우고 배를 띄운 그 항구에 늙어 구
명보트에 구조되어 남몰래 닿더라도 귀향하리라. 어릴 때 황홀하게 바라보 던 滿船(만선)의 귀선, 색색의 깃발을 날리며 꽹과리를 두들겨대던 그
칭칭 이소리 없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를 달빛처 럼 싣고 돌아가리라.
섬의 선창가에서 소꿉놀이하며 띄워보낸 오동나무 종이 돛배의 남실남실한 걸음으로도 四海(사해)를 좋이 한바퀴 돌았을 세월이다. 나는 그 종이 돛 배처럼 그 선창에 가닿을 것이다.
섬을 떠나올 때, 선창과 떠나는 배에서 서로 맞잡은 오색 테이프가 한 가닥 씩 끊기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늘어지는 고무줄처럼 평생 끊 기지 않는 테이프의 끝을 선창에 매어둔 채 세상을 주유했다. 선창에 닻을 내린 채 닻줄을 풀며풀며 방랑했다. 이제 그 테이프에 끌려 소환되듯, 닻 줄을 당기듯, 작별의 선창으로 도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온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내 가 태어난 섬이 바다의 중심이다. 나는 섬을 빙 둘러싼 수평선의 원주를 일 탈해왔고 이제 그 중심으로 복귀할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녀보니 나의 중심 은 내 고향에 있었다. 그 중심이 중력처럼 나를 끈다.
내 귀향의 바다는 離鄕(이향)의 그 바다일 것이다. 불변의 바다, 불멸의 바 다. 바다만큼 만고청청한 것이 있는가. 山川依舊(산천의구)란 말은 옛 시인 의 虛辭(허사)일 수 있어도 바다는 변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不老(불로)의 바다, 不朽(불후)의 바다. 늙지 않고 썩지 않고 항상 젊다. 내게는 세상에 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변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 그것이 바다다. 그 信義 (신의)의 바다가 나의 竹馬故友(죽마고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파도의 유희와 더불어 자랐다.
어느 즐거운 음악이 바다의 단조로운 海潮音(해조음)보다 더 오래 귀를 기 울이게 할 것인가. 어느 화려한 그림이 바다의 푸른 單色(단색)보다 더 오 래 눈을 머물게 할 것인가. 바다는 위대한 單調(단조)의 세계다. 이 단조가 바다를 불변, 불멸의 것이 되게 한다. 그 영원한 古典(고전)의 세계로 내 가 간다.
섬에 살 때 머리맡에서 밤새도록 철썩이는 바다의 물결소리는 나의 자장가 였다. 섬을 처음 떠나왔을 때 그 물결소리를 잃어버린 소년은 얼마나 많은 밤을 不眠(불면)으로 뒤척였는지 모른다. 이제 거기 나의 安眠(안면)이 있 을 것이다.
고향을 두고도 실향했던 한 浪子(낭자)의 귀향길에 바다는, 어릴 적 나의 襁褓(강보)이던 바다는 그 갯내가 젖내음처럼 향기로울 것이다. 그 정결하 고도 상긋한 바다의 香薰(향훈)이 내 젊은 날의 氣息(기식)이었다. 塵網(진 망) 속의 塵埃(진애)에 찌든 눈에는 해풍의 청량이 눈물겹도록 시릴 것이다 .가서 바닷물을 한 움큼 떠서 마시면 눈물이 나리라. 왈칵 눈물이 나리라. 물이 짜서가 아니라 어릴 때 헤엄치며 마시던 그 물맛이므로.
소금기가 있는 것에는 신비가 있다던가. 눈물에도 바다에도. 바다는 신비뿐 아니라 내게 무한과 영원을 가르쳐준 가정교사다. 海鳴(해명) 속에 神(신 )의 綸音(윤음)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러 간다.
나의 바다는 나의 공화국. 그 황량한 廣大(광대)가 나의 영토다. 그 풍요한 자유가 나의 主權(주권)이다. 그 공화국에서 나는 자유의 깃발을 공화국의 국기처럼 나부끼며 자유를 심호흡할 것이다. 바다는 자유의 공원이다. 씨 름판의 라인처럼 섬을 빙 둘러싸서 나를 가두고 있던 수평선. 그 수평선은 젊은 날 내 부자유의 울타리더니 이제 그 안이 내 자유의 놀이터다. 나의 부자유는 오히려 섬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수평선에 홀려 탈출한 섬에 귀환하면서 海鳥(해조)의 자유를 탈환할 것이다. 수평선의 테를 벗어난 내 인생은 반칙이었다.
섬은 바다의 집이다. 大海(대해)에 지친 파도가 밀려밀려 안식하는 귀환의 종점이다. 섬이 없다면 파도는 그 무한한 표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 희뜩희뜩한 파도의 날개는 광막한 황해의 어느 기슭에서 쉴 것인가. 섬은 파도의 고향이다. 나는 파도였다. 나의 일생은 파도의 일생이었다. 바다는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허무의 광야, 파도는 이 허무의 바다 를 건너고 건너서 섬에 와 잠든다. 나의 인생도 파도처럼 섬의 선창에 돌아 와 쉴 것이다.
나는 모든 바다를 다 다녔다. 태양계의 惑星(혹성) 가운데 바다가 있는 것 은 지구뿐이라 더 갈 바다가 없었다. 육대양을 회유한 나는 섬에서 태어난 영광과 행복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바다의 모태 속으로. 바닷물은 증발하여 승천했다가 비가 되고 강물이 되어 도로 바다로 내려온 다. 나의 귀향은 이런 환원이다.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 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고향은 世塵(세진)에 더럽혀진 나를 정화시켜 줄 것이다. 바다는 年輪(연륜)이 없다. 山中無歷日(산중무역일)이라듯 바다에도 달력은 없어 내 오랜 不在(부재)의 나이를 고향 바다는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그 리고 섬은 이 蕩兒(탕아)의 귀환을 기다려 주소 하나 바꾸지 않고 그 자리 에 있을 것이다.
고향은 집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집이다. 쉬지 않기 위해 집을 나서고 쉬기 위해 찾아온다. 나는 꼭 만 18세의 성년이 되던 해 고향 의 섬을 떠나왔다. 내 인생의 아침이었다. 이제 저녁이 된다.
모든 입항의 신호는 뱃고동소리다. 내 출항 때도 뱃고동은 울었다. 인생이 란 때때로 뱃고동처럼 목이 메이는 것. 나는 그런 목메인 船笛(선적)을 데 리고 귀항할 것이다.
돌아가면 외로운 섬에 두고 온 내 고독의 원형을 만날 것이다. 섬을 떠나면 서부터 섬처럼 고독하게 세상을 떠다닌 나의 평생은 섬에 돌아가면 옛애인 같은 그 원판의 고독과 더불어 이제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향은 앨범이다. 고향에는 성장을 멈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빛바랜 사진 속처럼 있다. 모래성을 쌓던 바닷가에서,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것 을 알아버리고 돌아온 옛 소년은, 잃어버린 童話(동화) 대신 세상에서 주워 온 寓話(우화)들을 조가비처럼 진열할 것이다.
아침녘의 넓은 바다는 꿈을 키우고 저녁녘의 넓은 바다는 욕심을 지운다. 어린 시절의 내 몽상을 키운 바다는 이제 萬慾(만욕)을 버린 내 노년의 무 엇을 키울 것인가.
사람은 무엇이 키우는가. 고향의 산이 키우고 시냇물이 키운다. 그 나머지 를 가정이 키우고 학교가 키운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것을 우유가
키우고 밥이 키운다.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면서 고향에 대 해서는 보답하는 덕목을 모른다. 내게 귀향은 歸依(귀의)다.
나의 뼈를 기른 것은 8할이 멸치다. 나는 지금도 내 고향 바다의 멸치 없이 는 밥을 못 먹는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먹은 주식은 내 고향 욕지도의 명산인 고구마다. 그 때는 그토록 실미나더니 최근 맛을 보니 꿀맛이었다.
내가 자랄 때 가장 맛있던 것은 밀감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아 값비싸고 귀하던 것이 지금은 이 섬이 주산지가 되어 있다.
나는 어릴 때 먹던 멸치와 고구마와 밀감을 먹으러 돌아간다. 내 少時(소시 )를 양육한 滋養(자양)이 내 노년을 保養(보양)할 것이다.
영국 작가 조지 무어의 소설 「케리드 川(천)」을 읽으라.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와서 그것을 발견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찾아헤맨 파랑새는 고향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어디로 가나 결국은 외국. 귀향은 귀국이다. 모국어의 땅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내 고향 섬을 다녀온 한 지인의 말이, 섬 사람들의 말투가 어디서 듣던 것 이다 싶어 생각해 보니 내 억양이더라고 한다. 떠난 지 50년이 되도록 鄕語 (향어)의 어투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영원한 鄕人(향인)이다. 물은 위대한 조각가다. 나는 파도의 조각품이다. 파도가 바닷가의 바위를 새기듯 어릴 때의 물결소리가 내 표정을 새겼다. 이것이 내 인생의 표정이 되었다. 한 친구가 나에게 「海巖(해암)」이란 雅號(아호)를 권한 적이 있 다. 나는 섬의 바닷바위 위에 石像(석상)처럼 설 것이다.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가. 그림을 그리리라. 고향의 美化(미화)보 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 나는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도 그려왔고 융 프라우도 그려왔다. 어릴 적 물갓집의 벽에 걸렸던 「시용성」 그림의 배경 이 알프스 산맥이었다. 이 눈 쌓인 고봉들을 물가에 갖다놓고 이제 바다를 그리리라. 섬을 떠난 나의 出遊(출유)는 위로 위로의 길이었다. 나는 표고 4000여 m까지 상승한 증표를 가지고 도로 바다로 하강한다. 어느 화가가 내 서툰 그림의 과욕이 걱정되는지 바다를 잘못 그리면 풀밭이 된다고 했다 . 그런들 어떠랴, 바다는 나의 大地(대지)인 것을.
해면을 떠나면서부터의 나의 登高(등고)는 이륙이었고 이제 착륙한다. 인생 은 공중의 곡예다.
해발 0m에서 출발한 나는 해발 0m로 귀환한다. 無에서의 시발이었고 無로의 귀결이다.
인생은 0이다. 사람의 일생은 토막난 線分(선분)이 아니라 圓(원)이라야 한 다. 『자기 인생의 맨 마지막을 맨 처음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말한 괴테는 나를 예견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태어난 방에 서 입적한 석가의 제자 舍利弗(사리불)처럼, 그것은 원점으로 회귀하는 일 이다.
나는 하나의 라스트신을 상상한다. 한 사나이가 빈 배에 혼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섬의 선창을 떠난다. 배는 돛도 없고 발동기도 없고 정처도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 것도 싣 지 않았다. 한바다로 나간 뒤에는 망망대해뿐 섬도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배의 최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빈 배라도 띄울 선창을 나는 찾아간다. 물결은 정지하기 위해 출렁인다. 배는 귀항하기 위해 출항한다. 나의 年代記(연대기)는 航海日誌(항해일지)였다.
소설
한국의 명문 (소설) - 달밤
--------------------------------------------------------------------------한국의
명문 (소설) - 달밤
◈달밤
李 泰 俊
1904~? 소설가. 강원 철원 출생. 휘문고보 졸업. 일본 상지대 졸업. 1950년 월북. 「소련기행」등
발표.
편집자 注:이 단편소설은 1934년 7월에 발표되었다. 깊은샘刊 「李泰俊전집 1」 1988년판에서 소설의 일부를 발췌했다. 具常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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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略]
그는 이튿날 저녁, 집을 알고 오는데도 아홉시가 지나서야
『신문 배달해 왔습니다』
하고 소리를 치며 들어섰다.
『오늘은 왜 늦었소?』 물으니
『자연 그럽죠』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워낙 이 아래 있는 삼산 학교에서 일을 보다 어떤 선생하고 뜻이 덜 맞아 나왔다는 것,
지금은 신문 배달을 하나 원배달이 아니라 보조 배달이 라는 것, 저희 집엔 양친과 형님 내외와 조카 하나와 저희 내외까지 식구가 일곱이란 것,
저희 아버지와 저희 형님의 이름은 무엇무엇이며, 자기 이름 은 황가인데다가 목숨 수자하고 세울 건자로 황수건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노랑수건이라고
놀리어서, 성북동에서는 가가호호에서 노랑수건 하면 다 자 긴 줄 알리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이날도 『어서 그만 다른 집에도 신문을 갖다
줘야 하지 않소?』 하니까 그때서야 마지못해 나갔다.
우리 집에서는 그까짓 반편과 무얼 대꾸를 해가지고 그러느냐 하되, 나는 그와
지껄이기가 좋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 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어떤 날은 서로 말이 막히기도 했다. 대답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막히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나보다 빠르게 이야깃거리를 잘 찾아냈다. 오뉴월인데도『꿩고기를 잘 먹느냐?』고도 묻고, 『양복은 저고 리를 먼저 입느냐, 바지를 먼저 입느냐?』고도 묻고, 『소와 말과 싸움을 붙이면 어느 것이 이기겠느냐?』는 둥, 아무튼 그가 얘깃거리를 취재하는 방면은 기상천외로 여간 범위가 넓지 않은데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나는 『평생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그 까짓 것쯤 얼른 대답하기는 누워서 떡먹기』라고 하면서, 평생 소원은 자기 도 원배달이 한번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이 혼자 배달하기 힘들어서 한 이십 부 떼어 주는 것을 배달하고, 월급이 라고 원배달에게서 한 삼원 받는 터이라, 월급을 이십여 원을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이 제일 부럽노라 하였다. 그리고, 방울만 차면 자기도 뛰어다니며 빨리 돌 뿐 아니라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럴 것 없이 아주 신문사 사장쯤 되었으면 원배달도 바랄 것 없고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상관할 배 없지 않겠느냐?』 한즉, 그 는 뚱그레지는 눈알을 한참 굴리며 생각하더니 『딴은 그렇겠다』고 하면서 , 자기는 경난이 없어 거기까지는 바랄 생각도 못하였다고 무릎을 치듯 가 슴을 쳤다.
그러나 신문사 사장은 이내 잊어버리고 원배달만 마음에 박혔던 듯, 하루는 바깥마당에서부터 무어라고 떠들어대며 들어왔다.
『이선생님? 이선생님 계ᄇ쇼? 아, 저도 내일부턴 원배달이올시다, 오늘밤 만 자면입쇼…』
한다. 자세히 물어보니,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었는데 자기가 맡게 되 었으니까, 내일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막 떨렁거리면서 올 테니 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란 게 그리게
무어든지 끝을 바라고 붙들어야 한다』 고 나에게 일러주면서 신이 나서 돌아갔다. 우리도 그가 원배달이 된 것이 좋은 친구가 큰 출세나 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진실로 즐거웠다. 어서 내 일 저녁에 그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차고 와서 쭐럭거리는 것을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오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신문도 그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신문도 그도 오지 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야, 이날은
해도 지 기 전인데 방울 소리가 요란스럽게 우리 집으로 뛰어들었다.
『어디 보자!』
하고 나는 방에서 뛰어나갔다. 그러나 웬일일까, 정말 배달복에 방울을 차고 신문을 들고 들어서는 사람은 황수건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다.
『왜 전엣사람은 어디 가고 당신이오?』 물으니 그는
『제가 성북동을 맡았습니다』 한다.
『그럼 전엣사람은 어디를 맡았소?』 하니 그는 픽 웃으며
『그까짓 반편을 어딜 맡깁니까? 배달부로 쓸랴다가 똑똑치가 못하니까 안 쓰고 말었나 봅니다』
한다.
『그럼 보조 배달도 떨어졌소?』 하니
『그럼요. 여기가 따루 한 구역이 된 걸요』 하면서 방울을 울리며 나갔다.
이렇게 되었으니 황수건이가 우리 집에 올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나도 가 끔 문 안엔 다니지만, 그의 집은 내가 다니는 길 옆은 아닌 듯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친구를 먼 곳에 보낸 것처럼, 아니 친구가 큰 사업에나 실패하 는 것을 보는 것처럼 못 만나는 섭섭뿐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 당자와 함께 세상의 야박함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한데 황수건은 그의 말대로, 노랑수건이라면 온 동네에서 유명은 하였다. 노랑 수건하면, 누구나 성북동에서 오래 산 사람이면 먼저 웃고 대답하는 것을 나는 차츰 알았다.
내가 잠깐씩 며칠 보기에도 그랬거니와 그에겐 우스운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삼산 학교에 급사로 있을 시대에 삼산 학교에다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 러 가지라는데, 그중에 두어 가지를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옮겨 보면 역시 그때부터도 이야기하기를 대단 즐기어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간 새 손님이 오면 으레 손님을 앉히고는 자기도 걸상을 갖다 떡 마주 놓고 앉는 것은 물론, 마주 앉아서는 곧 자기류의 만담삼매로
빠지는 것인데, 한번은 도학 무국에서 시학관이 나온 것을 이따위로 대접하였다. 일본말을 못하니까 만 담은 할 수 없고, 마주 앉아서 자꾸
일본말을 연습하였다.
『센세이 히, 오하요 고사이마쓰까… 히히, 아메가 후리마쓰 유끼가 후리마 쓰까, 히히… (선생 히, 안녕하십니까… 히히, 비가 옵니다. 눈이 옵니까, 히히…)』 시학관도 인정이라 처음엔 웃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하는 데
는 성이 나고 말았다. 선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종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한 선생이 나와 보니 종칠 것도 잊어 버리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
『오하요 유끼가 후리마쓰까…』하는 판이다.
그날 수건이는 선생들에게 단단히 몰리고 다시는 안 그리겠노라고 했으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그예 쫓겨나오고 만 것이다.
그는『너의 색시 달아난다』
하는 말을 제일 무서워했다 한다. 한번은 어느 선생이 장난엣말로
『요즘 같은 따뜻한 봄날엔 옛날부터 색시들이 달아나기를 좋아하는데, 어 제도 저 아랫말에서 둘이나 달아났다니까 오늘은 이 동리에서 꼭 달아나는 색시가 있을걸…』
했더니, 수건이는 점심을 먹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어서 바삐 하학을 시키고 집으로 갈 양으로, 오십 분 만에 치는 종을 이십 분 만에, 삼십 분 만에 함부로 다가서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後略]
한국의 명문 (소설) - 메밀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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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
李 孝 石
1907~1942. 소설가. 호는 可山.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졸업. 1925년 데뷔.
편집자 注:이 작품은 1936년 「朝光」 제12호에 발표되었다. 본문 중의 < >는여러 추천자들이 특히 名文이라고 적시한
부분임. 金埈成씨 추천.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 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 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
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 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 않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일 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필 과 주단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 았다. 다른 축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쟁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 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 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 함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주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걸. 축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군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주집을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 가지고 나꾸었나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 그려. 내 한 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설 숫기는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일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주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충주집 문을 들어서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인지 발끈 화가 나 버렸다. 상 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꾼인데, 꼴사납다. 머리 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 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 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 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 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 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어디서 주워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
그러나 한 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 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 이 섬짓해졌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손님이면서두 아무리 젊다구 자식 낳게 된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셀 것은 무어야 원. 충주집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 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고 하고 그 자리는 조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면 죄 된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해짐 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 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헐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 망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 고 정신없이 허덕이며 충주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에요』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이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거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부락스런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 않을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 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 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슬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
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썩었 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 밴
몸둥아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 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 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래 비슬비슬 멀어졌다.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김첨지 당나귀가 가 버리니까 온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 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들은 앙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리워 서지 않 으면 안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 니 아이들을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 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 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 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돌림을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 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郡(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지방도 헤 매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 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 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의 가까웠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더구나 그것이 저녁 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 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 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 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끊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 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 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 산을 모을 염은 당초에 틀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 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보지도 못하 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 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번의 첫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 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두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 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 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 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 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 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確的(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 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 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 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 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 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은 것 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 날 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 나 걱정 있을 때는 누르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지.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 음날이렸다.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 에 발끈 뒤집혀 오죽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 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 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 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두 진저리가 나지… 그러나 늙으막바지까지 장돌뱅 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 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 천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로 틔어졌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렸다.
충주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설게 생각 말게』
『처,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 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 걸요』
『돌아가셨나?』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랴 했으나 정말이에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 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와요』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 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뜻하면 미끄러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 다 나이가 알렷다. 동이같이 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 탕 쭉 씻어 내렸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 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 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 서 전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할 날 있었을까 .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 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 나 동이는 허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해 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하고 중엉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 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은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이나 흘렀 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 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 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중인데 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여. 가을이랬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 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 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 대단한 나귀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 신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도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한국의 명문 (소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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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黃 順 元
1915~. 소설가. 평남 대동 출생. 숭실중학교와 와세다대 영문과 졸업. 193 1년 재학중 詩로 문단 데뷔.
편집자 注:이
작품은 1960년 「사상계」에 발표된 장편소설이다. 이 글은 소설가 金埈成씨가 발췌해 보내온 부분이다. 金埈成씨는 『6․25와 4․19 이후
좌절과 무기력에 빠진 젊은이들의 의식세계를 그려내며 역사와 인간, 전체와 개인을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고 추천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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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마치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로 군. …산 밑이 가까워지자 낮 기운 여름 햇볕이 빈틈없이 내리부어지고 있
었다. 시야는 어디까지나 투명했다. 그 속에 초가집 열여덟 채가 무거운 지 붕을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전혀 전화를 안
입어 보이는데 사람은 고사하고 생물이라곤 무엇 하나 살고 있지 않는 성싶게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이 고요하고 거침새 없이 투명한 공간이 왜
이다지 도 숨막히게 앞을 막아서는 것일까. 정말 이건 두껍디 두꺼운 유리속을 뚫 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느낌인데. 다시 한번 동호는
생각했다.
한국의 명문 (소설) - 三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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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三代
◈三代
廉 想 涉
1897~1963. 소설가. 1920년 「폐허」 동인.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등단 . 서라벌 예대 학장
등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1921년 「개벽」지를 통해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문 단에 나온 작가의 장편 대표작이다. 아래 글은
김진국 교사가 발췌한 것이 다. 김교사는 이 글이 『여러 문장 같으면서 사실은 한 문장으로 이뤄진 기 막힌 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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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안마루에서, 내일 가지고 갈 새 금침을 아범을 시켜서 꾸리게 하 고 축대 위에 섰으려니까, 사랑에서 조부가 뒷짐을 지고 들어오며 덕기를 보고,
『얘, 누가 찾아왔나 보다. 그 누구냐? 대가리꼴 하고…. 친구를 잘 사귀어 야 하는 거야. 친구라고 찾아온다는 것이 왜 모두 그
따위뿐이냐?』 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못마땅하다는 잔소리를 하다가, 아범이 꾸리는 이불 로 시선을 돌리며, 놀란 듯이
『얘, 얘, 그게
뭐냐? 그게 무슨 이불이냐?』 하며 가서 만져 보다가,
『당치 않은 삼동주 이불이 다 뭐냐? 주속이란 내 낫세나 되어야 몸에 걸치 는 거야. 가외 저런 것을, 공부하는 애가 외국으로 끌고 나가서 더럽혀 버 릴 테란 말이냐? 사람이 지각머리가…』
하며, 부엌 속에 죽치고 섰는 손주며느리를 쏘아본다.…
한국의 명문 (소설) - 불효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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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불효자식
◈불효자식
蔡 萬 植
1904~1950. 소설가. 전북 옥구 출생.숭실중학교와 와세다대 영문과 졸업. 1931년 詩로 문단 데뷔. 장편 「태평천하」 등 다수.
편집자 注:작가는 한창 카프계열의 좌익 문학이 전성을 이루던 1920년대 후 반기에 「불효자식」과 「세길로」로 문단에 나왔다.「사상계」에
수록된 장편소설이다. 아래 글은 소설가 文淳太씨가 원작에서 발췌해 보내온 소설 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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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복이가
입옥하기 전 얼마 동안의 그의 육체는 산 사람의 살이라기에는 너무나 썩은 송장에 가까웠었다. 그의 사지와 몸뚱이는 전부가 흉측스럽게 찌그러지고
아무러진 검푸른 목은 종처와 불그레하니 툭 솟은 꼭 녹두알같 이 노랗게 곪은 세 종처와 시꺼먼 때묻은 고약 조각으로 덮어버리고 말았었 다.
더욱이 그 보기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는 다리를 걷어치고 앉아 날카롭 게 깎은 성냥개비로 눅씬 곪아서 멀눙멀눙한 종처를 땟작땟작하다가 신문지
조각을 대고 꾹 누르면 푹 솟쳐 나오는 녹두빛 같은 누런 고름과 검붉은 피며 삼복 염천에 송장 썩는 것 같은 그 고약스런 냄새…
한국의 명문 (소설) - 霧津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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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霧津紀行
◈霧津紀行
金 承 鈺
1941~. 소설가.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 세종대 교수.
편집자 注:「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아랫 글은 소설 의 일부로 소설가 金埈成씨가 名文으로 추천한 부분이다. 金씨는
이 부분을 발췌한 이유를, 『무엇 때문인지 모를 끝없는 불안, 방황, 머뭇거림, 부끄 럼움 등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잘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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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 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 는 마치 이승에 恨(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女鬼(여귀)가 뿜어 내놓
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 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 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 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 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한국의 명문 (소설) - 죽음의 한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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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죽음의 한 硏究
◈죽음의 한 硏究
朴 常 隆
소설가. 전북 장수 출생. 서라벌 예대 졸업. 1975년 캐나다 이민. 현 민족 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편집자 注:작가는 1963년 「사상계」로 데뷔, 1975년 이 작품을 발표했다. 이 글은 「죽음의 한 硏究」에서 추천자인 시인 신현림이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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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찌하여, 햇볕만 먹고도 토실거리는 과육이 못 되고, 이슬만 먹고 도 노래만 잘 뽑는 귀뚜라미는 못 되고, 풀잎만 먹고도 근력만 좋은 당나귀 는
못 되고, 바람만 쐬이고도 혈색이 좋은 꽃송이는 못 되고, 거품만 먹고 도 굳어만지는 진주는 못 되고, 凋落(조락)만 먹고도 생성의 젖이 되는
겨 울은 못 되고, 눈물만 먹고도 살이 찌는 눈 밑 사마귀는 못 되고, 수풀 그 늘만 먹고도 밝기만 밝은 달은 못 되고, 비계없는 신앙만 먹고도
만년 비대 해져가는 神(신)은 못 되고, 똥만 먹고도 피둥대는 구더기는 못 되고, 세월 만 먹고도 성성이는 백송은 못 되고, 각혈만 받아서도
곱기만 한 진달래는 못 되고, 쇠를 먹고도 이만 성한 녹은 못 되고, 가시만 덮고도 후꾼해하는 장미꽃은 못 되고, 때에 덮여서야 맑아지는
골동품은 못 되고, 나는 어찌 하여 그렇게는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유정 중에서 영장 이라고 내 자부했던 사람, 허나
어찌하여 나는 흙 속의 습기 속으로만 파고 드는 지렁이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한국의 명문 (소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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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趙 世 熙
1942~. 소설가. 서라벌 예대 문창과 졸업.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 작품 「뫼비우스의 띠」 등 다수. 현 「당대비평」 주간.
편집자 注:소외계층의 문제를 파헤친 연작소설의 일부.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제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래 글은 소설가 이순원씨가
원작에서 발 췌해 보내온 것을 그대로 실었다. 李씨는 『대학 2학년 때 처음 이 작품을 접하고 그의 單文에 매료되었다』면서 『발췌한 부분은 이
구절을 읽은 이 래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내 머리속에서 까먹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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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 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 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 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 어 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날아 들어갈 벌도 없다. 나비도 없다.
한국의 명문 (소설) - 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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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혼불
◈혼불
崔 明 姬
1947~1998. 소설가.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1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 당선.
편집자 注:이 글은 「혼불」(한길사 刊) 제3권 115~116쪽에서 옮겨온 것이 다. 김석희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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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타닥, 타악. 촛불 심지 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촛불 아래 누운 청암부인의 누렇게 바랜 노안에, 흔들리는 불 그림자가 일 룽거린다. 그래서
두드러져 뼈가 솟은 곳은 메마른 나무를 깎아 놓은 것 같 고, 움푹 패어 그림자가 고이는 곳은 적막한 골짜기 같았다. 사람의 얼굴을 두고 이마와
코, 그리고 턱이며 양쪽 광대뼈를 일러 五嶽(오악)이라 한 말 이 참으로 옳은 것을 알겠다. 이미 오래 전에 살을 다 벗어버리고 介潔(개 결)한
뼈로만 남은 듯한 청암부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산악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그네의 얼굴은 露根(노근)처럼도 보인다. 대저 뿌리란 그 몸을 땅
속에 숨기어 묻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노근은 지상으로 솟아오른 뿌 리이다. 제 뿌리를 뻗고 있는 산의 지질이 비옥하여 흙이 두터운 곳에 사는
나무는 그럴 리가 없지마는, 천인단애 까마득한 낭떠러지나 만중철벽 척박 한 땅에 서서, 그 뿌리가 암석의 틈바구니에 끼이고, 흙을 깎는 물살에
씻 기어 제 둥치를 지탱하기 어려운 나무는, 처절한 젊은 날을 보내고 노목이 되면, 이제 그 뿌리의 뼈가 땅 위로 울툭불툭 불거져 드러나니. 그
모습은 모질고 끈덕진 세월을 다 肉脫(육탈)하고, 세상을 벗어버린 초연한 기상을 느끼게 한다.
한국의 명문 (소설) -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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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눈길
◈눈길
李 淸 俊
1939~.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서울대 문리대 졸업. 월간 「소설문예」 주간. 소설 「당신들의 천국」
「눈길」 등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소설가 金埈成씨가 「눈길」 中에서 名文이라고 발췌해 보내온 것을 그대로 실었다. 金씨는 『「고향」과 「어머니」의 문제를
정 면으로 다루며 과거의 전통과 근원을 현실과 교직시켜 다뤘다』고 추천이유 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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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 간 사람이 없지 않겄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 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 몹쓸 발자국들이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
둘기만 푸르륵 날아가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 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튀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 길 을 저 아그 발자국만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울 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 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한국의 명문 (소설) - 金翅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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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소설) - 金翅鳥
◈金翅鳥
李 文 烈
1948~. 경북 영양출생. 서울대 국어과 수학. 1979년 데뷔. 소설 「사람의 아들」 「詩人」 「변경」
등 다수.
편집자 注:소설 「金翅鳥」는 이문열이 1985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글은 소설가 金埈成씨가 발췌해 보내온 부분이다. 金埈成씨는 『눈이
부실 정도 로 유려한 문체, 그 기저에 흐르는 낭만주의적 정신이 도처에 드러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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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가
날고 있었다. 수십 리에 뻗치는 거대한 금빛 날개를 퍼득이며 푸 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개짓에는 魔軍(마군)을 쫓고 사악 한
용을 움키려는 사나움과 세참의 기세가 없었다. 보다 밝고 아름다운 세 계를 향한 화려한 비상의 자세일 뿐이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거룩함
의 얼굴에서는 여의주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고, 입에서는 화염과도 같은 붉 은 꽃잎들이 뿜어져 나와 아름다운 구름처럼 푸른 바다 위를 떠돌았다.
… 갑자기 금시조가 두둥실 솟아오른다. 세찬 바람이 일며 그의 몸이 한 곳으 로 쏠려 깃털 한올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점점 손에서 힘이 빠진다.
아아… 깨고 보니 꿈이었다.
詩
한국의 명문 (시) - 白鹿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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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白鹿潭
◈白鹿潭
鄭 芝 溶
1903~? 시인. 충북 옥천 출생. 휘문고를 거쳐 일본 동지사대 졸업. 경향신 문 편집국장, 이화여대
교수 역임.
편집자 注:「백록담」은 1939년 「文章」 3호에 발표되었다. 여기에 사용한 원문은 민음사에서 나온 2000년 판의 제1연이다. 金光林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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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頂(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 키가 점점 消耗(소모)된다.
한마루 오 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花汶(화문)처럼 版(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함경 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八月(팔월)
한철엔 흩 어진 星辰(성진)처럼 爛漫(난만)하다.
山(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
제
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한국의 명문 (시) - 自畵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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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自畵像
◈自畵像
徐 廷 柱
1915~.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未堂.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 1936년 동아일보 詩
당선 데뷔.
편집자 注:「自畵像」은 시인이 23세 되던 1937년 중추절에 지은 것이다. 원문은 민음사에서 나온 「미당 시전집 1」 1994년
판을 사용했다. 金洹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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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한국의 명문 (시) - 국화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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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국화 옆에서
◈국화 옆에서
徐 廷 柱
편집자 注:이 詩는 1947년 11월9일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사용된 원문은 민음사 刊 「미당 시전집 1」 1994년판. 林東權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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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한국의 명문 (시) -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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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바위
◈바위
柳 致 環
1908~1967. 시인. 경남 충무 출생. 호는 靑馬. 연희전문 중퇴. 1931년 데뷔 .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 발표. 625 당시 종군 문인 참전. 崔禹錫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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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非情(비정)의 緘黙(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한국의 명문 (시) -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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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깃발
◈깃발
柳 致 環
정구영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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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哀愁(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한국의 명문 (시) - 별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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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별 헤는 밤
◈별 헤는 밤
尹 東 柱
1917~1945. 시인. 북간도 明東 출생. 연전 영문과 졸업. 1942년 渡日, 194 3년
독립운동혐의로 체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
편집자 注:이 詩는 1941년 11월5일에 쓰여졌으며 원문은 문학사상사에서 나 온
「윤동주 전집 1」 1999년 판을 사용했다.
마광수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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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 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이국 소녀 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 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 라이너 마 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한국의 명문 (시) - 마음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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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마음의 태양
◈마음의 태양
趙 芝 薰
1920~1968. 시인국문학자. 본명은 東卓. 경북 영양 출생. 1941년 혜화전 문학교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 강사.
강남주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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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서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르러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아라.
괴로움에 짐짓 웃으량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은 떠오르노라.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처럼
밝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한국의 명문 (시) -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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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눈
◈눈
金 洙 暎
1921~1968. 시인. 서울출생. 연희대 영문과 수학. 1957년 한국시인협 작품 상 수상. 1981년
「김수영 전집」 간행.
정호승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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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한국의 명문 (시) - 타는 목마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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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김 지 하
1941~. 시인.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0년까지 8년여 옥중 생활.
1975년 「로터스」 특별상 수상.
유일환 교사 추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에
발자국 소리 호루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한국의 명문 (시) - 물캐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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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물캐똥이
◈물캐똥이
高 銀
1933~. 시인. 독학. 1952년 불교 승려. 1958년부터 문학활동. 민족문학작가 회의 회장. 현
경기대 대학원 교수.
편집자 注:이 詩는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萬人譜」 제3권에서 옮겨왔다 . 이만재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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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일 나가고 없다
어린것 혼자
처마 밑에서 혼자 지렁이 건드리며 논다
그러다가
지렁이 가면
흙 파먹으며 논다 잘
논다
마을 전체가 텅 비었다
씨암탉이나 한 마리
그놈도 혼자 있고
어린것도 혼자 있다
아직 호적에도 안 올린
놈
이름도 없는 놈
물캐똥 잘 싸니 물캐똥아 물캐똥아라 부른다
혼자 놀다가 맨땅에서 자고
그늘 벗겨져 깨고 나서
한번 울어 본다
아무도 운 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믿음이다
혼자 두어도 잘 자라는 믿음이다
혼자 놀아도
이 세상과 함께 있는 믿음이다
그러지 않고서야B
어린것 물캐똥아
그러지 않고서야
어린것 물캐똥아
한국의 명문 (시) - 落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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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落花
◈落花
李 炯 基
1933~. 시인․언론인. 경남 진주 출생. 동국대 문리대 졸업. 국제신문 편집 국장․이사 등 역임. 현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공명철 교사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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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한국의 명문 (시) - 너를 기다리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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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黃 芝 雨
1952~. 시인. 전남 해남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詩 당 선. 시집 「새들도 世上을 뜨는구나」 등 다수.
편집자 注:이 詩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집 「게 눈 속의 연꽃」 2000 년판에서 옮겨왔다. 김광웅씨 추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한국의 명문 (시) - 하늘에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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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하늘에 쓰네
◈하늘에 쓰네
高 靜 熙
1948~1991. 시인.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 「초혼제」 등 다수. 조윤제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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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한국의 명문 (시) - 잡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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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시) - 잡초는
◈잡초는
金 鍾 泰
1953~. 시인. 경기 양주 출생. 연세대 법대 졸업. 1990년 시집 「이별을 위 한 발라드」 발표 이후 작품 활동. /이만재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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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덥다 울지 않는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조르지 않는다
못생겼다 가난하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난초를 꿈꾸지 않는다
벌 나비를 바라지 않는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는 것을 버거워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주어진 것으로만 억척으로 산다
버려진 곳 태어난 곳에서 모질게 버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
살기 위해 먹는 수단은 언제나 신성하다
뜯기고 먹히는 것은 먹이피라밋의 섭리이고
뽑히고 밟히고 채이는 것은 존재의 숙명
살아 있다는 것은 은혜이고
죽는다는 것은 섭리이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섭리를 따를 뿐이다
(「풀꽃」 연작 중)
기행문
한국의 명문 (기행문) - 山情無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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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기행문) - 山情無限
◈山情無限
鄭 飛 石
1911~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일본대학 문과 중퇴. 1936년 「卒哭祭」로 데뷔.
신문기자를 거쳐 1954년 「자유부인」을 발표한 이래 전업 작가 변신.
편집자 注: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글의 원문은 글벗사에서 나온 「 한국의 영원한 수필 명작」 1994년판을 사용했다. 김진태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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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히만 차리고 떠난다는 옷치장이, 정작 푸른 하늘 아래에 떨치고 나서니 멋은 제대로 들었다. 스타킹과 낙카아팬트와 잠바로 몸을
거뿐히 단속한 후, 등산모 제쳐 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고개를 드니, 장차 우리의 발 밑에 밟혀야 할 만 이천 봉이 천 리로 트인 창공에 뚜렷이
솟아 보이는 듯하다. 그립던 금강으로, 그리운 금강산으로!
떨치고 나선 산장에서는 어느새 산의 향기가 서리서리 풍긴다. 산뜻한 마음 으로 활개쳐가며 산으로 떠나는 지완과 나는 이미 진고개에 방황하던 창백 한 인텔리가 아니라 역발산 기개세의 기개를 가진 갈 데 없는 야인 文書房 (문서방)이요, 鄭生員(정생원)이었다.
경원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안에서 무슨 홀게 빠진 체모란 말이냐? 우리 조상들의 본을 떠서 우리도 할 소리 못할 소리 남 꺼릴 것 없이 성량껏 떠 들었으면 그만이 아닌가? 스스로 야인의 긍지에 도취되어서, 뒤로 흘러가는 창 밖의 경개를 우리는 호화로운 심정으로 영접하였다. 고리타분한 생활을 巷間(항간)에 남겨 두고, 잠시나마 악착스러운 생활을 벗어나 순수한 자연 의 품 안에 들어본다는 것은 항상 오만한 인간 생활의 순화를 위하여 얼마 나 긴요한 일일까?
허심탄회, 인화지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전개될 자연들을 우리는 해면처 럼 흡수했으면 그만이었다. 철원서 금강 전철로 차를 바꿔 탄 것이 저무는 일곱 시쯤. 먼 산골에는 황혼이 어리고 대지는 각일각 회색으로 용해되어 가는데, 개성을 抽象(추상)당한 산령들이 묵직한 윤곽만으로 서녘 하늘에 웅크렸다.
고요하고 태고 같은 이 풍경 속에서 순시도 멎음 없이 변화를 조종하는 기 막힌 조화는 대체 누가 부리는 요술이던가? 창명히 저물어가는 경개에 심취 하여, 창가에 기대인 채 마음의 평화를 즐기다가, 우리는 어느덧 저모르게 가슴 깊이 지녔던 비밀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보배로 여기던 비밀 을 아낌없이 털어놓도록 그만큼 우리를 에워싼 분위기는 순수했던 것이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지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의 청춘사에서 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웠을 사랑담을 허심히 들어넘기며, 나는 몇 번이고 담배를 바꿔 피웠다. 침착한 여인네가 장롱에 옷가지 챙겨 넣듯 차근차근 조리 있게 얽어 나가는 지완의 능숙한 화술은 맑은 그의 음성과 어울려서 귓가에 도란도란 향기로웠다. 사랑이 그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 세상에 사 랑처럼 쓰라린 것, 매운 것은 없다는데 지완의 것은 아침 이슬같이 淡潔(담 결)했다니, 그도 그의 성격의 소치일까? 창 밖에 金風(금풍)이 소슬해서, 그 사람이 유난히 고매하게 느껴졌다.
내금강 驛舍(역사)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山莊(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양관, 외금강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의 두 건물이다. 內(내)와 外(외)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십삼야월의 달빛 차겁게 넘실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의 밤이라 과시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았을 듯 소란하 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아니었던가고 금세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 마시니, 어느 덧 肝臟(간장)도 청수에 씻기운 듯 맑아온다. 淸溪(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니 십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가기조차 외람된 問仙橋(문선교)!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가 예까지 찾아와서 仙境(선경)이 어디냐고 목동 에게 借問(차문)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조 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가 스스로 유별한 탓이었을까? 차문주가 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목동요지 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은 속계 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 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 어지니, 이미 세진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거니 눈이 떠진 것은 몸에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었던
靈峯(영봉)들을 대 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 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 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문실문실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 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氣稟(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금 후 단장 짚고 험난한
前禾呈(전정)을 웃음경삼아 探勝(탐승)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遠近(원근) 산악이 열병식 하 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紅(홍)! 이른 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보다 하였다. 萬壑千峯(만학천봉)이 한바탕 흐드러 지게 웃는 듯,
산색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 이 있고 녹이 있고, 황이 있고, 등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터클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빛깔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多技(다기)하다. 혹은 깎은 듯이 峻 山肖(준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 인 품이 이미 凡俗(범속)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 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이다.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 우거진 것은 모두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 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폼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茶禮塔(차례탑) 같다. 부처님은 禮佛床(예불상)만으로는 미흡해 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놓은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 엇을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를 쉴 겸, 스탬프 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 타나는 세 글자가 明鏡臺(명경대)! 俯仰(부앙)하여 천지에 慙愧(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明鏡止水(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을 여기서만은 淨(정)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 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黃泉潭(황천담)을 발 밑에 굽어보며 半空(반공)에 巍然(외연)히 솟은 층암 절벽이 우뚝 마주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이 化粧鏡(화장경) 그대로 였다. 옛날의 죄의 유무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 의 影子(영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 면 나의 지나친 역설일까? 백 번 놀라도 猶不足(유부족)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可驚(가경 )할 일인가!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태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 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면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 다고 한다. 운상기품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 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佛法(불법)이 말하는 전생의 緣(연)일는 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나가니, 앞으로 閻魔(염마)처럼 막아서는 웅자가 釋迦峰(석가봉)! 뒤 로 맹호같이 덮누르는 신용이 天眞峰(천진봉)!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 한 골짜구니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하나의 협곡! 몸이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 물줄 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由來談(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가며 쉬엄 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같이 유수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 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 요, 단풍의 바다이다. 산 전체가 燎原(요원) 같은 花園(화원)이요, 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이다. 산은 때아닌 때에 다시 한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 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을 함빡 빨아 들인 해면같이 우러러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 일시에 지천으로 내 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문 형은 몇 번이고 탄 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 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꼭 쥐어 짜면, 물에 헹궈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 수렴폭을 玩賞(완상)하며 몇 십 굽이의 석계와 목잔과 철색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다 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一望無際 (일방무제)로 탁 트인다.
여기도 해발 오천 척의 望軍臺(망군대)!-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 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白馬峰(백마봉)은 바로 지호지간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의 허 다한 봉들이 전시에 할거하는 영웅들처럼 여기에서도 우뚝, 저기에서도 우 뚝,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千 斷崖(천인단애) 無限際(무한 제)로 뚝 떨어진 황천 계곡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 색시 머리의 칠보단장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 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 석에서 금방 튀어 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의 旅舍(여사)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고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인정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을 풀고 마하연사를 찾아갔다. 여기는 禪院(선원)이어서, 불경 공부하는 승려 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늙은 승려만도 실로 삼십 명은 됨직 하다. 이런 심산에 노승이 그렇게도 많을까!
무한청산 행욕진(無限靑山行欲盡)
백운심처 노승다(白雲深處老僧多)
옛글 그대로이다. 노독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 으니, 溫故之情(온고지정)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동은 정말 오래간만인데』하며 불을 바라보는 문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 삼아 심지를 돋우어 보았다 줄여 보았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송이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 이 몸에 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리인가 했더니 물소리 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 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달빛에 젖으며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보니, 여관집 아가씨가 등잔 아래에 외 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는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이 태형 맞으면 백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 같기도 하고, 누 명 쓴 장화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하는 대목일 것 같기도 하고, 시베리아로 정배 가는 카츄샤의 뒤를 네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한 판에 제 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다시 산을 찾아 나섰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갔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 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도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群小峰(군소봉)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욱하고 음 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銀梯金梯(은제금제)에 다다랐을 때 기어 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煙霧(연무)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雨裝(우장)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 진광풍이 어디서 불어왔는가, 휙 소리를 내며 운무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 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가며 짜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 는 꽃보다 단풍이 倍勝(배승)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雨勢(우세)는 맹렬했으나, 狂風(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 속에서 홀현홀몰하는 영봉을 영송하는 것도 가히 장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暴注( 폭주)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이 단박에 창해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 리는 갈 데 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 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 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들 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龍虎(용호)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하신 것일까? 경천동지도 유만 부동이지 이렇게 萬象(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담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 으리라 싶었다. 內․外․海(내․외․해) 삼 금강을 일망지하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컨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 척을 가하고 오연히 佇立(저립)해 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에 군림하는 개선 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樹海(수해)였다. 설 자 리를 삼가구중심처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哀話(애화) 맺혀 있는 용마석 . 마의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 책도 상석도 없고, 풍우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 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에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 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된 타자의 애기 龍馬(용마)의 孤影(고영)이 슬프다. 무심히 떠오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는 듯, 소복한 白樺(백화)는 한 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社稷(사직 )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매귀 부 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 리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망국지한을 고행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두터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南柯一夢(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 년이 지 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 년도 須臾(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 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한국의 명문 (기행문) - 畵帖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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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기행문) - 畵帖紀行
◈畵帖紀行
金 炳 宗
1953~. 교수․화가. 전북 남원 출생. 서울대 미대 졸업. 현 서울대 미대동 양화과 교수.
편집자 注:이 글은 1998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화첩기행」中 「아리랑과 정선」편이다. 이 글의 제목은 「아우라지 뱃사공아 내 한마저
건너주게」 이다. 송병락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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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초록이다./초록 산, 초록 나무, 초록 바람이다./그 속을 초록 강물 이 흐른다./아픈 사랑과 이별의 전설을 안고./열 겹의 산을 열 가지
색으로 내비친다는 강./行旅(행려)의 그대여. 그 아우라지강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눈길을 보태지 말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라리 가락처럼
멀어지는 강물 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결국엔 저렇게 흘러가는 것이로구나, 애달픈 사랑도 정 깊은 인연도 그리고 우리네 인생마저도. 공연히
서러워지려니…. 정선아리랑의 탯줄 아우라지 가는 길. 기차는 간이역 「餘糧(여량)」에 선 다. 도회지로 가는 딸을 배웅 나온 듯한 어머니가 서
있다. 어여 그만 들어 가시라고, 딸은 몇 번씩이나 손짓을 보내건만 어머니는 개찰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그러다가 기어이 옷고름을 눈으로 가져
간다. 甑山(증산)을 떠 난 기차가 잠시 머물렀던 또다른 간이역은 그 이름이 別於谷(별어곡). 얼마 나 이런 이별이 있어 왔기에 역이름마저
「이별의 골짜기」였을까. 나를 내려놓은 두 輛(량)짜리 기차는 제법 벌판을 흔들며 떠나가고, 떠나간 자리 따라 풀이 일렁인다. 포플러 숲
건너편으로 반짝 물길의 한 자락이 보인다. 역 앞 청원식당에서 「콧등치기」 한 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다. 후루룩 먹다 보면 얼기설기 메밀반죽
국수 가닥이 사정없이 콧등을 후려친대서 콧 등치기란다. 정선에는 유독 후다닥 해치우는 이런 식의 「치기」 음식이 많 다. 강냉이밥인
「사절치기」도 옥수수 한 알을 네 개로 만들어 밥을 지었 대서 나온 말. 어차피 논농사 짧은 궁벽한 산살림에 걸판진 음식 호사는 어 려웠을
터이다. 오죽하면 딸 낳거든 평창에 시집 보내 이팝(쌀밥) 실컷 멕 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정선은 원래 『신선 사는 깊은 산 속 도원경 같다』하여 그 옛이름이 桃源 (도원)이었다는 곳. 유난히 산 많고 고개 많아 비행기재, 선마령재, 다 넘 고 와도 백봉령 아홉 고개에 코가 깨진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비단 산길 오르내리는 현실의 고개만이 고개는 아닐 터이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없 이 도란도란 세 끼 밥상마저 자유롭지 않은 가난 속에서 삶의 무게 지고 오 르내려야 했을 인생의 고갯길인들 오죽 많았을까.
정선아리랑은 그 태반이 여성들의 口傳(구전) 노동요. 1000여 수에 육박한 다는 가사들 중에는 독백처럼 자기 심정을 노래말로 털어놓은 것이 유독 많 다. 지금은 九切里(구절리) 깊은 산 속까지 도로가 뚫려 있지만 옛날의 정 선은 한번 시집오면 평생 외지로 나가기조차 어려웠던 곳이다. 삶이 너무도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나를 좀 보내 달라고, 아리랑 고개로 넘겨 달라고 노래로나마 애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아리랑이면서도 정선아리랑은 진도아리랑 같은 질펀한 해학이 나 가락의 격한 높낮이가 없다. 논보다 밭이, 그것도 비탈 밭이 많은 정선 에서 힘겹게 일하며 빠르고 현란한 가락은 어려웠을 터이다. 일하다 허리를 펴고 산 너머 몰려오는 구름을 보며 『눈이 오려나/비가 오려나/억수장마 지려나…』 무심중에 중얼거리다 가락이 되곤 했을 것이다.
상념에 젖어 걷는 사이에 「정선아리랑의 유적지 아우라지」라는 돌비가 나 타난다. 논길을 가로질러 강과 만난다.
아우라지란 골지천과 송천이 서로 「어우러져」 강이 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두 물이 만나 이루어졌다 해서 「두물머리」라는 예쁜 이름으로도 불 린다. 이 강에는 정선아리랑에 설움 하나를 더 보태는 사연이 흐른다. 어느 해 혼례식을 앞두고 건너편 마을 사람들이 신부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강 을 건너오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버린다. 가마에 갇혀 나오지 못한 신부는 그예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죽은 목숨으로 떠올랐다. 그 원혼을 달래느 라 강 언덕에는 처녀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른다.
수려한 풍광 속에 엎드려 있는 아픈 삶의 흔적들은 아우라지강 말고도 곳곳 에 있었다. 폐광되어 을씨년스럽게 남은 석탄만이 쌓여 있는 「구절리 역」 부근은 오래된 흑백영화 화면처럼 쓸쓸하기만 했고, 남면 낙동리 居七賢洞 (거칠현동)의 「七賢碑(칠현비)」는 숨어 살다 죽어간 일곱 선비의 나라 사 랑의 외로움과 고달픔이 처절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선아리랑은 그 가락이 멀리 왕조를 비키어 의로운 사연을 안 고 칠현동으로 들어왔던 고려 말 선비들의 義歌(의가)로부터 시작하여 숱한 民草(민초)들의 哀怨聲(애원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그 사연의 폭이 넓고 깊다.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산골 마을을 돌아 숙암천 앞 아라리모텔에서 하룻밤 을 보내기로 한다. 장마로 하진부쪽 물길을 보태 잔잔하던 숙암천은 양쯔강 (揚子江)처럼 도도하게 흘러내린다.
밤이 빠른 산골에 성근 별이 떠오른다. 마당의 매캐한 모깃불을 사이에 두 고 안주인은 당귀, 천궁, 오미자 같은 약초에 구렁이까지 나온다는 정선장 구경이 볼 만하다고 일러준다. 저 앞 숙암천에 어항 몇 개만 넣어두면 밤 새 메기, 쏘가리, 가물치가 가득 들어온다는 말도.
강 건너 산가에 불빛이 깜박인다.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본다. 어느새 와르르 쏟아질 듯한 별무리. 한을 노래로 바꾸어 불러온 이름 없는 얼굴들이 별 되어 떠 있다. 서늘한 한 줄기 바람 이 지나간다. 정선에 누워 나는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된다.
한국의 명문 (기행문) - 거센 파도를 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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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기행문) - 거센 파도를 헤치고
◈거센 파도를 헤치고
金 在 哲
1935~. 전남 강진 출생. 부산 수산대 졸업. 동원산업 회장. 현 무역협회장 편집자 注:이 글은 1968년 5월에 씌어졌으며 같은 해
「사상계」에 게재되 었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다. 김재철씨 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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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5일
피낭을 떠난 우리 光明號(광명호) 船團(선단)은 수마트라의 북쪽을 돌아 곧 , 탁 트인 印度洋(인도양)에 들어섰다.
大洋(대양)으로 나오자, 남서계절풍이 알맞게 불어 더위를 식혀 주고, 물빛 은 맑다 못해 쪽빛으로 빛나니, 그 속에 비친 흰 구름은 두둥실
물 속을 난 다. 우리나라의 다랑어 漁業(어업)은 그 동안 사모아를 중심으로 하여 發展 (발전)하여 왔을 뿐, 인도양은 파도가 거칠다 하여
모두들 出漁(출어)를 망 설이던 곳이지만, 低緯度(저위도) 海域(해역)이라 그런지 평온한 날씨에 바 다는 그지없이 잔잔하다.
그러나,
험하기로 이름난 인도양에 새 어장 개척의 사명을 띤 첫 출어인지 라 선원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5월8일
바다의 아침은 곱고도 정열에 타오른다. 동녘 수평선이 곱게 물드는가 싶더 니, 붉고 장엄한 태양이 불쑥 솟아올랐다. 잔잔한 海面(해면)엔 수없는 고 기 떼가 亂舞(난무)하고, 크고 작은 갈매기들이 물을 차고 날며 바다의 아 침을 맞았다.
망망한 바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햇살, 水面(수면)을 나는 날치 떼들! 이 자연의 造化(조화)가 진정 놀랍기만 하다.
바다는 그지없이 넓고 크다. 바다에 사는 한, 노아의 洪水(홍수)가 다시 일 어난다 하더라도 바다에 뜬 우리에겐 두려울 것이 없고, 설령 제3차 세계대 전이 일어나 수소폭탄을 터뜨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인류 최후의 生存者(생 존자)로 살아남을 것 같다.
며칠째 順航(순항)이 계속되니 船員(선원)들은 한결 緊張(긴장)이 풀려, 낮 이면 漁具(어구)를 손질하기에 바빠도, 밤이면 南十字星(남십자성) 아래에 서 閑談(한담)의 꽃을 피우고, 뱃전에 서선 조용히 콧노래를 불렀다.
5월12일
피낭을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 스리랑카의 남쪽으로 약 300마일 떨어진 北緯(북위) 0도 30분, 東經(동경) 80도의 적도 해역에서 첫 操業(조업)을 시 작했다.
농밀 어군(濃密魚群)을 捕捉(포착)한 것은 아니나, 새로 꾸민 어구의 시험 과 인도양 다랑어 어군의 生態(생태)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 조업이었다. 비 록 시험 조업이라곤 하나 인도양에서의 첫 조업인 만큼, 모든 선원들의 얼 굴엔 긴장의 빛이 감돌고, 나 또한 이른 새벽에, 豊漁(풍어)와 안전 조업이 있기를 경건히 빌었다.
새벽 네 시, 조용한 해면이 중천에 걸린 달빛을 받아 곱게 반짝거리니, 새 삼 신비감을 자아낸다.
「投繩(투승) 준비」의 지시를 내리자, 수백 촉의 作業燈(작업등)들이 즐비 하게 켜지고, 휘황한 불빛 아래 선원들은 각기 작업 부서에 배치되었다. 針路(침로)를 북쪽으로 바꿔 漁道(어도)를 가로지르며 「투승 시작」의 신호 를 내리니, 선원들은 싱싱한 冷凍(냉동) 꽁치를 꿴 낚시들을 연방 날쌔게 바다에 던졌다. 全速(전속)으로 달리는 배에 맞춰 주낙도 따라 던져지니, 다랑어를 잡기 위한 주낙 어구가 물 속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지만, 快走(쾌주)하는 배에 놀라 깬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불빛을 뒤따랐다. 필경 고기 떼를 뒤따르던 갈매기들인 듯해서 풍어를 바라는 선원들의 마음은 한결 더 부풀어올랐다. 약 네 시간에 걸쳐 2000여 개의 낚시를 단 주낙 어구를 45마일의 거리에 걸쳐 부설해 두었다. 투승이 끝난 뒤 네 시간을 기다리다가 적도의 태양이 한창 이글이글 타는 정오 무 렵부터 주낙을 감아 올리기 시작했다. 승무원의 대부분이 남태평양의 사모 아 해역에 나아가 많은 漁撈(어로) 작업을 경험한 베테랑들이므로, 작업은 처음부터 익숙하게 진행되었다.
揚繩機(양승기)의 빠른 回轉(회전)에 따라 낚시가 하나둘 올라왔다. 기대와 실망이 몇 차례 교차되더니, 드디어 『고기다!』하는 환성이 올랐다. 모든 선원들의 가슴은 부풀어오르고, 두 사람의 선원이 고기가 문 낚싯줄을 붙잡고 승강이를 한다. 옆에서도 『잘해라! 첫 고기다! 놓치지 마라!』하 고 북돋워 주니, 긴장이 더욱 高潮(고조)된다. 고기와 사람과의 줄다리기가 한참 계속되더니, 억세게 버티던 고기가 기진맥진하여 뱃전 가까이까지 끌 려오자, 어부들이 잽싸게 고기를 갈고리로 걸어 甲板(갑판) 위로 끌어올렸다. 길이는 1m 50㎝ 정도고 무게는 50㎏이 넘는 큼직한 놈인데, 고운 노란 지느 러미를 가졌다고 하여 옐로 핀(Yellow Fin)이란 이름이 붙은 다랑어다. 그런데 선원들은 아직까지 싸운 화풀이라도 하듯, 갑판 위에 끌어올려진 뒤 에도 살아서 퍼덕거리는 고기의 머리통을 메로 쿵쿵 두드리니, 단말마의 경 련을 일으키다가 죽어 갔다. 고기가 죽자, 첫 고기는 고사를 지내는 것이 좋다는 老(노) 선원들의 의견에 따라 고사를 지냈다. 揚繩이 계속되어 크고 작은 옐로 핀들이 잇달아 올라올 때마다 선원들은 함성을 울렸다. 고기가 잇달아 올라오니, 폭양 아래에서 氷水(빙수)를 꿀꺽꿀꺽 마시면서도 모두 들 신바람이 나서 어깨를 으쓱거린다. 주낙을 끌어올리면서 흘리는 땀을 이 따금 熱帶(열대) 특유의 스코올이 지나가며 씻어,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 주 곤 하였다.
작업은 계속 순조로워서 초저녁에 양승을 모두 마쳤는데, 오늘 첫 작업의 漁獲(어획)은 약 2톤 반 가량으로서 퍽 좋은 편이었다. 조업을 마치자, 다 랑어로 만든 盛饌(성찬)을 마련하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오늘의 어획을 축하함과 아울러 오늘 밤의 적도 통과를 기념하기 위하여 赤道祭(적도제) 까지 올리니, 배 안은 그야말로 축제 기분으로 들떴다.
5월26일
돌고래의 행패가 하도 심하여 중부 어장에서의 조업을 단념하고, 수온이 낮 은 인도양 서남부 어장을 향해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시험 조업에 이어 아라비아 해를 떠난 고기 떼가 적도 채널을 빠져 인도양 동부로 진출하려는 것을 노려 조업한 결과, 며칠 동안은 成績(성적)이 제 법 좋더니, 돌고래 떼가 나타나면서부터는 어획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돌고래란 이빨고래의 일종으로서, 다랑어의 天敵(천적)일뿐더러 바다의 君王(군왕)이다. 이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살아 있는 고기는 물론, 낚시에 걸린 고기까지 따 먹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좋은 漁場(어장)일지 라도 돌고래 떼가 출현하는 날엔 당장 황폐해 버리고 만다.
6월6일
아프리카 대륙 南端(남단)에 가까운 南緯(남위) 31도, 동경 35도에 이르러 조업을 다시 했다. 중부 어장과는 달리, 이곳은 완연한 荒波(황파) 어장으 로 파도는 사납게 울부짖고 수온은 22℃ 가량으로 내려, 제법 쌀쌀하기까지 했다. 대서양으로부터 希望峯(희망봉)을 거쳐 오는 低氣壓(저기압)이 거의 끊이지 않으므로 기상 상태가 좋은 날이 별로 없지만, 南半球(남반구)의 겨울철인 이 무렵엔 대서양에서 남부 인도양으로 游(회유)해 오는 알바코(Albacore ) 떼의 좋은 어장이 형성되므로, 많은 外國船(외국선)들과 같이 우리 船團 도 이곳에서 조업을 시작했다. 어군 탐지기에 많은 어군이 나타났기 때문이 다. 전혀 낯선 어장에서, 더욱이 사나운 물결 밑에 長距離(장거리)에 걸쳐 어구를 투승하고는 다소 걱정도 되었으나, 다행히도 海流(해류)는 그리 빠 르지 않았다. 어획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알바코가 연방 올라오니, 거친 물 결도 아랑곳없이 船內(선내)에는 다시 환성이 들끓었다.
알바코는 마국인들이 가장 좋아하여 「바다의 닭고기」라고까지 부르는 다 랑어의 일종인데, 방금 물린 듯한 알바코가 한 자가 넘는 지느러미를 떡 벌 린 채 퍼덕거리면서 끌려오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신바람이 난다. 여전히 사나운 파도는 흰 거품을 내며 뱃전에 부서진다.
明鏡(명경)같이 고운 바다는 詩趣(시취)가 있어 좋고, 파도치는 바다는 覇氣(패기)가 있어 또한 좋다. 그리고, 이 해역에선 아프리카가 가까우니 라 디오의 스위치를 틀면 갖가지 아프리카 노래가 들려 와서 심심하지 않았다. 양승을 시작한 직후부터 거의 온종일 선원들의 아우성 소리와 고기가 파닥 이는 소리, 또는 파도의 울부짖음으로 마치 싸우는 海賊船(해적선)처럼 요 란하더니, 15㎏ 이상의 알바코만도 200여 마리이고, 다른 다랑어 종류도 수 십 마리 잡혀, 오늘 하루의 어획은 3톤 반 이상이나 되었다.
특히 마지막 무렵에 250여 ㎏이나 되는 커다란 새치가 잡혔는데, 이 고기의 뱃속에서는 방금 삼킨 듯한 싱싱한 알바코가 한 마리 나와 一擧兩得(일거 양득)을 한 셈이었다.
날이 저물면서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無電(무전) 안테나는 윙윙 소리를 내 고 산더미 같은 파도는 배를 제멋대로 흔들건만, 모두들 오늘의 흐뭇한 어 획에 도취되어, 거친 물결은 아랑곳없이 환담으로 꽃을 피운다. 나이가 든 甲板長(갑판장)은 이 큰 새치의 지느러미뼈로 물부리를 만들면 아주 珍貴 (진귀)한 膳物(선물)이 될 것이라고 하며 매우 기뻐하기도 했다. 밤이 깊어 작업이 끝나자, 다시 내일의 투승을 위하여 다랑어 떼를 찾아 항 해해 가니, 거친 물결 속에서도 수면에는 많은 夜光蟲(야광충)이 빛나고 있 어, 좋은 어장의 徵候(징후)를 肉眼(육안)으로도 분간할 수 있었다.
7월6일
드디어 滿船(만선)을 했다.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또는 폭풍우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리 한 마 리 가슴 졸이며 낚아 올린 고기가 이젠 어창에 그득히 차서 더 실을 데가 없게 되었으니, 완전한 만선이다.
어렵게 낚은 다랑어를 흉측한 돌고래나 모진 상어 떼에 빼앗긴 적도 많지만 , 그래도 여러 날을 계속하여 낚아 올린 고기가 7000여 마리. 인도양에서의 첫 만선이기에 더욱 흐뭇하고 대견했다.
교신중이던 외국 선박으로부터도 滿船(만선) 축하전보가 잇달아 왔고, 가까 이서 조업하고 있는 僚船(요선) 9호와 10호의 광명호도 곧 만선 예상이라는 보고다. 항해를 入港(입항)하는 재미로 한다면, 고기잡이는 만선하는 재미로 한다 할 것이다. 어구를 거두어 넣고 뱃머리를 港口(항구)로 향해 달리니, 선원 들은 작업복을 훨훨 벗어 던지고 뱃전에 앉아 술을 따르며 自祝宴(자축연) 을 열었다.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물결 굼실 뛰노는 바다로 가자…』 검붉게 탄 선원들이 마음껏 소리 높여 합창하니, 배 안의 분위기는
최고조 에 이르고, 피곤은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수만의 戰利品(전리품)을 싣고 돌아가는 개선장군의 기쁨인들, 大洋의 한복 판에서 오랜 시일을 고생하여 만선한 기쁨만 하랴.
40회의 조업에 120톤! 이만하면 첫 항해의 어로는 성공이다. 이로써 우리나 라의 遠洋漁業(원양어업)에 또하나의 里程標(이정표)가 인도양에 세워졌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배 위에서 어기여차 뱃노래를 소리 높이 부르면서 歸港(귀항)의 길을 재촉했다.
7월7일
날이 밝자, 길게 뻗친 아프리카 大陸(대륙)이 視野(시야)에 들어왔다. 흙 냄새 풀 냄새가 함께 밀려드는 것 같다. 뒤돌아보면, 인도양엔 여전히 물결 이 높고, 정면엔 이른 아침 「더어반 항」의 등댓불이 아직 반짝거렸다.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어반 항에 도착하였다. 더어반은 남아프리카 에서 첫째 가는 항구이며, 또한 聖雄(성웅) 간디가 젊은 시절 10여 년 동안 살면서 민족운동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무전으로 미리 연락해 두었으므로, 外港(외항)에 이르자마자 水先人(수선인 )의 안내로 곧 입항할 수 있었다. 닻을 내리고 부두에 배를 대기가 무섭게 모두들 뭍에 뛰어올라 땅을 힘있게 밟아 보았다. 60여 일 동안을 꼬박 흔 들리는 배에서 지냈던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大地(대지)가 도리어 이상하 게 느껴졌다.
흑인, 白人(백인) 할 것 없이 이곳 住民(주민)들이 모두 몰려와선 東方(동 방)의 遠客(원객)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이들에게 『헬로!』하고 손을 내미니, 거절하지 않고 기쁘게 악수해 주었다. 낯선 異邦人(이방인) 의 손목을 정답게 붙잡았다.
논설
한국의 명문 (논설) -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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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
李 承 晩
1875~1965. 독립운동가1~4대 대통령. 호는 雩南. 황해도 평산 출생. 배재 학당 졸업. 1908년 하버드대
석사, 1910년 프린스턴大 박사 학위.
편집자 注:이 글은 李承晩이 옥중에서 쓴 것으로 제국신문 1901년 2월8일자 에 실렸다. 원문은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이승만 글모음집
「뭉치면 살고… 」에서 全文을 옮겨왔다. 柳永益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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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람들은
유무식 간에 흔히 생각하기를 「사람의 빈부귀천과 길흉화복 이 다 운수소관이요, 모두 팔자라서 매사를 인력으로 능히 할 바 아닌즉 內頭(내두)에
窮達(궁달)을 어찌 가히 예탁하리오」하며 자포자기하는 마음으 로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수고롭게 할 경영은 아니하니 어찌 개탄치 아니하리오.
우리가 전에도 운수와 팔자라 하는 것이 당초에 작명한 이치가 없다고 여러 번 설명하였거니와 하늘이 만민을 내실 때에 미리 빈부와 귀천을 마련하여
어떤 사람은 아무리 無才無能(무재무능)할지라도 부귀할 운수를 주고, 아 무는 비록 재덕이 겸비하나 빈궁할 운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세상 사람의 행위를 살펴보시어 길흉화복을 내리시니, 누구든지 부지런하다면 의식이 구차한 이가 도무지 없는 고로 옛글에 가로되, 하늘이 힘써
농사하 는 집을 궁하게 못한다 하였으며 귀함으로 말할지라도 문벌을 劈破(벽파)하 고 인재를 택용하는 나라들은 어떤 사람이든지 학식이 고명한
지경이면 정 부에서 곧 천거하여 중대한 직임을 맡기는 고로 일시에 영화가 족히 문호를 빛낼 만하고 명예가 가히 전국에 진동하거니와 만일 심지가
해하고 문견이 고루한 사람은 설혹 世業(세업)이 饒足(요족:살림이 넉넉함)하여 衣食之憂 (의식지우)가 없다든지 요행히 낮은 벼슬에 참여하여
窮儒(궁유)와 말을 면 할지라도 언행이 비패하고 사업상에 몽매하여 능히 자기의 집을 보전치 못 하거늘 하물며 직무를 어찌 감당하리오.
그뿐 아니라 집에 들어오면 부모를 효양하고 세상에 나아가면 임금에게 충 성하며 친구에게 신의 있고 무슨 일이든지 공명정대하게 하는 이는 자연히 길한 운수가 돌아와서 복을 누릴 것이요, 형제간에 不睦(불목:집안끼리 서 로 사이가 좋지 않음)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성의와 친구를 교제하는 신의가 도무지 없어 이기지욕만 창자에 가득하여 완패한 악습이 無所不至(무소부 지)하면 점점 액운을 당하여 여러 가지 재앙에 눈썹 필 날이 없을 것이니, 어찌 평생 대공 궁함을 면하리오.
그런즉 물론 누구든지 빈부와 귀천이 다 내게 있는 것이거늘 다만 이르기를 운수니, 팔자니 하고 무슨 행위상에 진보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심히 어 리석은지라 족히 범론할 것 없거니와 더욱 한심한 일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 들이 매양 말하기를 어느 나라이든지 흥망성쇠가 다 운수가 있어 옛적 사기 를 볼지라도 어떤 나라는 몇백 년을 昇平(승평:나라가 태평함) 세계로 지내 어 국조가 영원하였으되 어떤 나라는 국내에 도적이 곳곳마다 일어나서 백 성이 이산할뿐더러 해마다 兵革(병혁:전쟁)의 난리에 생령이 魚肉(어육)되 어 불과 몇 해에 나라가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니 모두 국운이라 이루 측량 할 수 없다 하되 그렇지 아니하니 고금을 물론하고 몇백 년을 국조가 영원 한 나라들을 살펴볼 것 같으면 법들이 문명하고 법들이 공평하여 관민 간에 서로 혼극이 나지 아니한즉 국중에 무슨 변란이 있으리오. 몇백 년이라도 나라가 태평할 수밖에 없고 쇠약한 나라들은 구습을 고치지 못하고 정치가 문란하여 정부관인들은 백성 貪虐(탐학:탐욕이 많고 포악함)하기를 구수같 이 하고 여항 서민들은 관인 무서워하기를 豺狼(시랑:승냥이와 이리)같이 하매, 나라일이 날로 그릇되어 능히 지탱치 못하니 어찌 나라의 흥망이 운 수에 있다 하리오. 이로 좇아 볼진대, 사람의 화복은 사람의 행위에 있고 나라의 흥망은 나라의 정치에 있으니 다른 것을 믿지 마오.
한국의 명문 (논설) - 독립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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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독립정신
◈독립정신
李 承 晩
편집자 注:이 글은 1904년에 출간된 「독립정신」에 포함되어 있다. 아래 글은 추천자인 박근씨가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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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
지루한 세월이 거연히 7년이 된지라 천금광음을 허송하기에 애석하 여… 수년 동안 논문 논설 짓기로 적이 회포를 말하더니… 러․일 전쟁이
벌어지는지라 비록 세상에 나서서 한가지 유조한 일을 이룰 만한 경륜이 없 으나 이 어찌 남아가 무심히 들어앉았을 때리오. 강개 격분한 눈물을
금치 못하여… 양력 2월19일에 이 글 만들기를 시작하니… 지명과 인명을 많이 쓰지 않고 항용 쓰는 쉬운 말로 길게 늘여 설명함은 고담 소설같이
보기 좋게 만듦이요, 전혀 국문으로 기록함은 전국에 수효 많은 인민이 보기 쉽 게 만듦이요, 특별히 백성편을 향하여 많이 의론함은 대한의 장래가
전혀 아래 인민에게 달림이라. 대저 우리나라에 소위 중등 이상 사람이나 여간 한문자나 안다는 사람은 거의 다 썩고 물이 들어 다시 바랄 것이
없으며 또 한 이 사람들이 자기 몸만 그럴 뿐 아니라 이 사람들 사는 근처도 다 그 기 운을 받아 어찌할 수 없이 되었나니 이 말이 듣기에 너무
심한 듯하나 역력 히 증험하여 보면 허언이 아닌 줄을 가히 믿을지라. 오직 나의 깊이 바라는 바는 국민 중에 더욱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 자매들이 가장 많 이 주의하여 스스로 흥기한 마음이 생겨 차차 행하기를 시험하며 남을 또한 인도하여 날로 인심이 변하며 풍속이 고쳐져서
아래서부터 화하여 썩은 데 서 싹이 나며 죽은 데서 살아나 그를 원하고 원하노라. 건국 4237년 6월29 일 한송 감옥서 죄수 리승만
기록(「독립정신」 序)
슬프다! 나라가 없으면 집이 어디 있으며 집이 없으면 나의 일신과 부모처 자와 형제자매며 일후자손이 다 어디서
살며 어디로 가리오. 그러므로 나라 에 인민된 자는 상하귀천을 물론하고 화복안위가 다 일체로 그 나라에 달렸 나니 비교하건대 만경창파에 배를 탄
것 같아서 바람이 순하고 물결이 고요 할 때는 돛 달고 노질하기를 전혀 사공들에게 맡겨두고 모든 선객들은 각각 제 뜻대로 물러가 잠도 자며
한가히 구경도 하여 직분 외에 일을 간섭할 바 없으되 만일 풍랑이 도도하며 풍우가 대작하여 돛대가 부러지고 닻줄이 끊어져서 허다한 생명이
사생존망의 시각에 달릴진대 그 안에 앉은 사람 뉘 아니 정신차려 일심으로 일어나서 돕기를 힘쓰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합심하여 조금도 사사 생각
없이 사공들의 힘을 도와 다 같이 살려고만 할 지니 이는 사공을 위함이 아니요 곧 자기 몸을 위하는 도리라, 설령 사공된 이들이 각각 제 직책을
다하여 갈지라도 선객들은 각기 제 몸을 위하는 도 리에 차마 그저 있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선객들이 술도 취하며 잠도 못 깨 며 혹 눈도 멀고
팔도 부러져서 동서를 분별치 못하며 위태함을 깨닫지 못 하여 점점 움직일수록 더욱 위태하게 만들어 널판이 쪽쪽이 떨어지고 기계 가 낱낱이 상하여
물이 사면으로 들어오며 인명이 차례로 빠져들며 이웃 배 에서 급히 와서 대신 건져주려하면 이 배의 선객들은 종시 남에게 밀어두고 무심히 앉아
죽기만 고대함이 도리라 하겠는가, 지혜라 하겠는가?…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이 곧 삼천만 생명을 싣고 풍파대해에 외로이 가는 배라, 생사존망이
急急奄奄(급급엄엄)함이 조석에 달렸나니 이는 삼척 동자 라도 다 짐작하는 바라, 어떻게 위태함과 어찌하여 이러함은 다음에 다시 말하려니와 우리가
지금 당장에 빠져 가는 중에 앉았으니 정신차려 볼지어 다.(총론 19~20쪽)
…이 대의를 아는 사람은 임금을 낯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뜻으로 섬겨서 군 명을 거역하고라도 백성을 이롭게 하며 종사를 편하게 하여 국가가 태평안 락하게 하매 임금의 옥체가 스스로 태산반석의 편안함을 누리실지니 이것이 곧 나라에 신하된 본의라, 이 본의를 알진대 비록 군명을 항거하고 역명을 실어 千斬萬戮(천참만륙)하는 화를 당할지라도 달게 여기고 백성에게 해될 일은 일호도 행치 않아 옳을 것이어늘 잠시 이목의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 히 종사에 위태함을 돌아보지 아니함이 어찌 참 충성의 반대됨이 아니리오 .(총론 36~37쪽)
한국의 명문 (논설) - 是日也放聲大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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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是日也放聲大哭
◈是日也放聲大哭
張 志 淵
1864~1921. 언론인. 경북 상주 출생. 황성신문주필․사장 등 역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1909년 경남일보 주필.
편집자 注: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이 「황성신문」 11월2 0일자에 이 글을 실어 이 조약이 국권을 빼앗은 조약임을
알렸다.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이나 여기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現代 한글로 싣는다 . 姜英勳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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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伊藤(이등)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 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鼎足(정족)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 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 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聖意(성의)가 강경하여 거절하 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의 大臣(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000만 生靈(생 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朴齊純(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參政(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否(부)자로써 책임을 면하 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金淸陰(김청음)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鄭桐溪(정동계)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 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 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 는가, 죽었는가? 檀箕(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 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한국의 명문 (논설) -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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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나의 소원
◈나의 소원
편집자 注 : 이 글은 「나의 소원」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洪思德 씨 추천.
金 九
1875~1949.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 출생. 1894년 동학혁명 참여. 한독당 당수. 상해 임시정부 주석 등 역임.
1949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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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 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富力(부력)은 우리 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强力(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 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 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武力(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 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 로 잘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 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 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한국의 명문 (논설) - 헐려짓는 光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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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헐려짓는 光化門
◈헐려짓는 光化門
薛 義 植
1901~1954. 언론인. 함남 단천 출생. 일본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일보 편집 국장․부사장
등 역임. 저서 「민족의 태양」 등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동아일보1926년 8월11일자에 쓴 사설이다. 정진석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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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廳舍(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德澤(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 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意識(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 없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 되, 反抗(반항)도 回避(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 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 할 뿐이다. 오랫동안 風雨(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 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石工(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앎이 없으리라마는, 뚝닥 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役軍(역군)의 둔장이 네 허리를 들 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 리 질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 강산의 石材(석재)와 木材(목재)․人材(인재)의 精粹(정수)를 뽑아 지 은 光化門(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기 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光化門아! 靑苔(청태)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身勢(신세) 그대 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풍우 몇백 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逆賊(역적)도 드나들며, 守舊黨(수 구당)도 드나들고, 開化黨(개화당)도 드나들던 光化門아! 평화의 사자도 지 나고, 殺伐(살벌)의 銃劍(총검)도 지나며, 日露의 使節도 지나고, 청국의 國賓도 지나던 光化門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天職이 며, 그 길을 引導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天命이었다 하면, 너 는 그 자리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方向 그 터전을 옮 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었거니와, 너의 생명과 너 의 일생은 헐리는 그 순간에, 옮기는 그 刹那(찰나)에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너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는 알되 너는 모르니, 모르는 너는 모르 고 지내려니와 아는 우리는 어떻게 지내랴?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놓는다 한다. 그러 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 그 사람이 아니며, 다시 짓는 그 솜 씨는 雄健(웅건)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때 이 사람의 감정 과 기분과 理想(이상)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을 등 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方向(방향)은 景福宮(경복궁)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方向이 아니다.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大闕(대궐)에는 長霖( 장림)에 남은 궂은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 하는 망치 소 리는 長安(장안)을 거쳐 北嶽(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 고, 애닯아 하는 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한국의 명문 (논설)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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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편집자 注:이 글은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실렸다. 원문은 한길사에서 나온 「함석헌 전집14」에서 옮겨왔다. 본문의 중간제목은 원문대로 살렸 다. 김언호씨 추천.
咸 錫 憲
1901~1989. 사상가. 종교인민권운동가. 평북 용천 출생. 저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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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뜻 / 역사에 대한 반성
나라를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 더미로 만들었던 6․25 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뜻을 깨달은 국민이라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 우리 맘이 언제나 답답하고 우리 눈알 이 튀어나올 듯하고 우리 팔다리가 시들부들 늘어져만 있어
아무 노릇을 못 하지 않나?
역사적 사건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법이다 . 6․25 사변은 아직 우리 목에
씌워져 있는 올가미요 목구멍에 걸려 있는 불덩이다. 아무런 불덩이도 삼켜져 목구멍을 내려가면 되건만 이것은 아직 목구멍에 걸려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므로 밥을 먹을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울 수도 없는 것이다. 어서 이것을 삼켜 내려야 한다. 혹은 이 올가미를
벗어버려야 한다.
올가미가 그냥은 아니 벗겨진다. 죽을 힘을 다해 벗겨야지, 코가 좀 벗어지 고 귀가 좀 찢어지고 이마가 좀 벗어지고 턱이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고 벗겨야 한다. 불덩이가 그대로는 아니 넘어간다. 눈을 딱 감고 죽자 하고 혀를 깨물고 목구멍을 좀 데면서라도 꿀꺽 삼켜야 한다. 역사적 사건의 뜻 을 깨달음은 불덩이를 삼킴이요 올가미를 벗김이다.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모든 일은 뜻이다. 뜻에 나타난 것이 일이요 물건 이다.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經驗(경험)〕이다. 치르고 나면 뜻을 안다. 뜻이 된다. 뜻에 참여한다. 뜻 있으면 있다〔存在(존재)〕. 뜻 없으면 없 다〔無(무)〕. 뜻이 있음이요, 있음은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 니다. 뜻 깨달으면 얼〔靈(영)〕,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
역사에 대한 반성
6․25 싸움은 왜 있었나?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배 새끼가 서로 목을 찌르 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거기 어울림을 하여 피와 불의 회오리 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사람이 죽고 상한 것이 얼만가? 물 자의 없어진 것이 얼만가? 남편 잃고 반쪽 사람이 된 과부가 얼만가? 어미 애비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가 얼만가? 거기 써버린 쇠를 쌓으면 산이 될 것이요, 거기 태워버린 기름을 모으면 바다가 될 것인 이 끔찍한 전쟁은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 바다를 뒤집는 고래 싸움은 하필 이 가엾은 새우 등 에 터졌을까?
밤거리를 헤매다가 도둑놈에게 욕을 본 계집도 그 상하고 더러워진 몸을 어 루만지며 생각을 해본다면 그 까닭이 어디 있음을 알 것이요, 대낮에 술에 취해 자다가 온 세간을 다 불태워버린 사내도 잿더미에 마주 앉아 생각을 해본다면 그 잘못이 어디 있음을 알 것이다. 이 역사의 한길에 앉은 고난 의 여왕은 제 욕보고 뺏김당한 것이 어떤 까닭임을 생각하나, 아니하나? 6․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둘째 번 세계전쟁을 마치려 하면서 로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 의 허리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이 하나요, 풍 속․도덕이 하나요, 이날껏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가지인 우리로서 는 갈라질 아무런 터무니도 없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그러나 다시금 한번 생각해볼 때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등을 거기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 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 다. 쉬운 말로 만만한 데 말뚝이지, 만만치 않다면 아무 놈도 감히 말뚝을 내 등에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진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이 원인 아닌가? 그렇다면 미운 것은 미국도 소련 도 아니며, 일본도 아니요 우리 자신이다. 왜 허리 꼬부린 새우가 됐던가? 우리는 왜 남의 식민지가 됐던가? 19세기에 와서 남들은 다 근대식의 민주 국가를 완성하는데 우리만이 그것을 못했다. 왜 못했나? 동해 바다 섬 속에 있어 문화로는 우리에게조차 업신여김을 당하던 일본도 그것을 하고 도리 어 우리를 덮어누르게 되는데, 툭하면 예의의 나라라 「작은 중화」라 자존 심을 뽐내던 우리가 왜 못했나? 원인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서민, 곧 이 백 성이란 것이, 이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남들은 아무리 봉건제도라 하며 정치가 아무리 본래 백성 부려먹는, 씨알 짜먹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오리」인 서민계급을 길러가며 생산방법을 가르쳐주며, 그 금알을 짜먹을 만한 어짊과 인정은 있었는데, 우리나라 시대시대의 정치업 자놈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그저 짜먹으려만 들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줄곧 말라들기만 했다. 민족국가, 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 국가는 씨알 중에서도 중산층의 나라다. 중산층이란 다른 것 아니요 그 사 회제도가 씨알이 자라 제 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이다 . 그러므로 언제나 중산층이 튼튼히 있으면 그 나라가 성해가는 것은 천하 가 다 아는 사실이다. 중산층이 살아 있는 만큼 씨알의 발달이 되어 있는 나라는 마치 맨 밑의 곧은 뿌리가 잘 자란 나무 같아 어떤 역사적 변동이 와도 거기에 맞추고 그 기회를 타고 이겨 살아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하는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뒤엎고 일어날 때 우리만이 그것을 타지 못하고 떨어져 민족 전체가 남의 종이 됐던 것은, 우리나라의 씨알이 양반이라는 이리떼보다 더한 짜먹는 놈들의 등쌀에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였기 때문이 다. 민족국가 시대에 제 노릇을 못하고 남의 종이 됐기 때문에 그 다음 시 대에도 다른 데 종으로 팔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 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 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 았나? 지금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 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 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 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에서 시작이 됐다. 압록강, 두만강에 울타리를 치 고 그 밖으로는 중국 만주의 이리․호랑이에게 꼬리를 치며 미끼를 바치는 대신 이 파리한 염소를 사정없이 악착스럽게 더럽게 짜먹기 시작하던 이조 500년에 이 나라는 결딴이 나고 말았다. 그 염소가 행여 울타리를 깨칠까 봐 그들은 임진강 이북을 관서니 관북이니 평안도 상놈이니 해서 아주 대 강이를 눌러버렸다. 이놈의 38선은 운명의 남북 경계선이다. 민족 해방의 물결이 태평양에서 밀려들어 이 잠자는 민족에게서도 거기 맞춰 깬 혼이 몇 개 없었던 것은 아니건만 매양 일을 그르친 것은 이놈의 남북 충돌이었다 . 6․25 동란 때 부산 부두에 몰려 있어 말라가는 논귀에서 송사리의 살림 을 하면서도 놓지 못한 것은 당파싸움, 오늘날까지도 그것인데 당초에 그 시작은 전주 이씨네의 정치에 있다. 임진란에 나라가 온통 일본의 말발굽에 밟힐 때 민중의 충성은커녕 동정 하나 못 받으며 밤도망을 해 임진강을 넘 어가던 선조가 압록강 가에서 감상적인 울음을 운 일이 있지 않나?
나라일 엉망진창인데(國事倉皇日)
누가 충성 다할꼬(誰爲李郭忠)
서울을 버릴 때 큰 뜻을 남겼으니(去存大計)
도로 찾음은 그대들 믿을 뿐(回復仗諸公)
관산
달에 슬피 울고(痛哭關山月)
압강 바람 마음 상해라(喪心鴨水風)
그대들이여, 오늘을 지내고도(朝臣今日後)
오히려 동․서 또
있겠는가(寧復更東西)
알기는 알았건만! 부산서도 그 울음을 울었던가, 아니 울었던가? 알기나 하 면 무엇해? 울기만 하면 무엇해? 울려거든 민중을 붙잡고 울었어야지. 민중 을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찐 벼슬아치를 보고 울어서 무엇해? 소위 측근자 비서 무리를 보고 울어 무엇해? 나라의 주인은 고기를 바치다 바치다 길거 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다. 구원이, 땅에 쓰러져도 제 거 름이 되고 제 종자가 되어 돋아나는 씨알에 있지 그 씨알 긁어먹는 손톱 발 톱에 있지 않다.
38선은 언제 그어졌나 / 역사의 숙제
그러므로 6․25의 남북 싸움의 속 원인은 스탈린, 김일성, 루스벨트에 있지 않고 이성계에 있다. 이북을 상놈의 땅으로 금을 긋던 날
38선은 시작됐다 . 아니다. 거기서도 더 올라간다. 고려 중엽에 김부식이가 묘청의 혁명운동 을 꺾어버리던 날, 평양 이북을 적국처럼 보기
시작하던 날 벌써 일은 글러 졌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김춘추, 김유신이 당나라에 불티나듯 드나들 던 날, 진흥왕이 기껏 간 것이
삼각산이어서 거기 비석을 세우던 날 기운은 벌써 빠졌다. 아니야, 온조가 한가람의 딴전을 벌이던 날 벌써 문제가 틀 어졌다. 우리나라의 정신이
없다면 모르지만 있다면 그 등이 아무래도 고구 려적인 성격이 아닌가? 그러니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통일이랍시고 나라 의 떨어지다 남은 한 귀를
들고 서면서부터 잔약질인 것 같은 신라적 백제 적인 것이 줄거리 노릇을 하게 될 때 한 번 꺾였다. 고려시대만 해도 그 남 은 기상이 있었는데
묘청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때 그 두 번째 꺾인 것이 다. 이조가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으로 만족할 때 세 번째 꺾였다. 등심뼈가 꺾이고
끄트머리 신경만 남았을 때 있을 것은 저림과 비꼬임과 쥐 일어남 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땅에 남북의 다름을
만들었다. 인천만에서 원산만으로 긋는 선이 地殼(지각)이 약한 곳이어서 그리로 온천이 많이 터 져나오고 그 이북과 그 이남이 지리가 서로
다르지만, 이것은 人文(인문)으 로도 약한 경계선이다. 단군 때부터 漢四郡(한사군), 신라, 고려, 내리내리 늘 민족 성격의, 문화의,
사회생활의 경계선이 되어왔다. 어느 모로 보나 하나요,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 이 겨레에 그 금이 놓여 있는 것은 무슨 시련의 선인가?
무슨 숙제의 선인가? 하나님은 아니 믿으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있는 사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이겨 넘지 않는 한 역사의
바른 걸음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6․25의 뜻은 눈앞의 사실만을 볼 것 아니라 저 먼 역사의 흐름에 서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뜻을 깨닫는 것은 본래 새 점을 한 곧은 줄 로 맞추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상에 놓여져 이 끝에서 저 끝이 내다뵈는 것이 뜻을 앎이다. 그것을 하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예와 이제를 뚫지 못하면 마소〔馬牛〕에 옷 입힌 것 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타나서 세계역사를 한 번 새롭게 하려 할 때, 그 앞에 서서 요한이 외치기를 『빈 들에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곧은 길을 닦아라!』했다. 하나님의 길은 역사의 길이다. 역사의 길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점이 일직선으로 놓여 내다보여서만 나갈 수 있다. 그러므 로 잘못된 것은 曲折(곡절), 波瀾(파란)이 많다고 한다. 역사를 치르는 인 간의 할 일은 늘 곧은 줄로 되지 못한 사실의 과정을 뜻으로 바로잡는 데 있다. 6․25 싸움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서서 지나온 것을 내다볼 때 그것은 역사 처음에서부터, 민족 성격에서부터, 내다뵈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돌아 서서 앞을 볼 때 『아, 그것은 이렇게 되잔 것이다』하는 것이 보여지는 것 이 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를 역사적 현실에서 건진다.
역사의 숙제
우리나라의 역사적 숙제는 세 마디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정신이요 하나는 독립정신이요 또 하나는 신앙정신이다. 그리고 이 셋은 결국 하나다 . 나는 우리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고 보는데, 그렇게 보면 세계 어느 민족 의 역사나 고난의 역사 아닌 것 없고, 인류 역사가 결국 고난의 역사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역사는 고난 중에서도 그 主演(주연)으로 보는데, 그 고 난의 까닭은 이 세 가지 문제에 있다. 5000년 역사의 내리밀림이 이조 500 년인데 그것은 그저 당파싸움으로 그쳤다. 아무도 이 당파싸움의 심리를 모 르고는 우리나라 역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500년의 참혹한 고난은 이 한 점에 몰린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 되는 데 있다. 민족으로 당하는 모 든 고난, 그 원인이 우리 잘못에 있든 남의 야심에 있든 그 뜻은 작은 생각 버리고 크게 하나〔大同〕돼 봐라 하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역사의 명령으 로 알아야만 우리는 역사적 민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 되지 못하는 원인을 찾으면 독립하지 못하는 데, 제 노릇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 됨 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서고야 될 일이다. 정말 제 노릇 하는 사람은 제가 제 노릇을 할 뿐 아니라 남을 제 노릇이도록 만든다. 거지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인 격은 곧 自尊(자존)이다. 스스로 높임이 스스로 있음〔自存(자존)〕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독립정신이 부족하다는 말은 스스로 비위에 거슬리는 말 이지만 남이 되어서 볼 때, 아니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에 손을 내민 백제의 일이 그것이요, 고려도 그것이요, 이조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지리적 조건에 핑계를 대면 댈 수도 있고 주위 민족의 탓을 하려면 할 수 도 있지만 인격엔 핑계가 없다. 핑계 되는 그것이 그 정신 아닌가? 우주를 등에 지는 것이 인생이요 정신이지, 나 밖의 다른 책임자를 찾는 것은 역 사를 낳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지리적 역사적 환경조차도 역사적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너는 역사의 주인이 돼봐라』 하는 숙제로 알아야만 이긴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독립정신은 어디서 나오나?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 없이 는 될 수 없다. 그럼 그것은 어디서 나오나? 위대한 종교 아니고는 될 수 없다. 종교란 다른 것 아니요 뜻을 찾음이다. 현상의 세계를 뚫음이다. 절 대에 대듦이다. 하나님과 맞섬이다. 하나님이 되잠이다. 하나를 함이다. 그 러므로 이 이상의 일이 있을 수 없고 이밖에 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맨 처음이요 이것이 맨 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따져 올라가면 여기 이르고 만다. 일찍이 역사상에 위대한 종교 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이 없다 . 종교가 잘못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 어떤 나라의 문화도 종교로 일 어났고 종교로 망했다. 애급이 그렇고 바빌론이 그렇고 희랍이 그렇고 중국 이 그렇다.
우리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종교 없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100가지 폐가 간난(注:「가난」의 원말)에 있다 하지만 간난 중에도 심한 간난은 생각의 간난이다. 철학의 간난, 종교의 간난, 우리나라는 우선 물자의 간난 때문 에 못사는 나라 아닌가? 중국 평원을 우리에게 주어보라. 미국의 자원을 우 리에게 주어보라. 그래도 못살 것인가? 금수강산 이름은 좋지만 이 마른 뼈 다귀 같은 산만을 파먹고는 힘이 날 수도 생각이 날 수도 없지 않은가? 그 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아무래도 생명은 물질의 주인이지. 물자 간난의 원인 은 인물 간난에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것은 당파싸움으로 인물을 자꾸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베인 나무는 10년이면 다시 설 수 있으 나 인물은 죽이면 100년 길러도 다시 얻기 어렵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정신이라 귀한 것이요, 생각은 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 이다. 재목은 숲에서야 나고 인물은 종교의 원시림에서야 얻을 수 있다. 그 런데 우리 민족의 종교가 본래 깊지 못하다. 이것은 몽골민족의 通弊(통폐 )다. 원나라가 세계를 휩쓸었으나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가고 만 것은 깊은 정신문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는 손바닥 같은 반도지만, 그 문화는 아직 살지 않나? 일본이 크게 못된 것도 그 종교의 작고 옅음에 있 다. 만주족이 중국을 온통 정복해 300년을 갔지만 아무런 깊은 것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 고유한 종교가 시원한 것이 없 지 않은가? 화랑도라 하지만 그 윤리적 철학적인 내용은 다른 데서 배운 것 이요, 그 외의 것은 이른바 화랑으로 그치고 말지 않았나. 화랑도로 역사를 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 옅다. 너무 평면적 낙천적이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 점에 맺힌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 그러면 6․25의 뜻도 어쩔 수 없이 여기 있을 것이다. 깊은 종교, 굳센 믿음을 가져라. 그 리하여 네가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가 되리라. 세계 역사는 이제 하나 됨의 직선 코스에 들고 있는 이때에.
형제애를 통일로
이것은 눈앞의 역사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이렇게 된다. 6․25 전쟁이 난 것 은 그 뜻을 알고
본다면
첫째, 이것은 참 해방이냐?
둘째, 이 정권들은 정말 나라를 대표하는 거냐?
셋째, 너희는 새 역사를 낳을 새 종교를
가졌느냐?
참 해방이 됐다면 참 자유하는 민족이 되었다면, 미․소 두 세력이 압박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섰을 것이다. 해방
전까지 없던 남북한의 대립이 두 나라 군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은 우리 국민정신이 진 공 상태였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형제
싸움은 일어났다. 남의 참견에 휘말려 동포가 서로 찌르고 죽인 다음에야 생각이 좀 나지 않을까? 이 정권들이 정말로 이 나라를 위한 정권이라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말 권세욕이 아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있다면, 전쟁에도 좀더 백성을 불 쌍히 여기지 않았을까?
이 민중에 참 종교가 있다면, 아무리 정치적 기술도 없고 경제의 힘도 군사 의 힘도 없다 하더라도 환란 속에서도 좀더 힘있게 견디고 넘어진 중에서도 또 기운차게 일어서지 않았을까? 아무 밑천을 못 가지고도 없는 데서 새 것을 지어내지 않았을까? 『바로 돌아 앞으로!』 하는 새 시대의 앞장을 아 니 섰을까? 어느 시대나 새 시대의 주인이 되는 것은 가진 것이 없는 자인데. 그런데 끔찍한 전쟁이 지나간, 지나간 것도 아니요 아직 목에 올가미로 목 구멍에 불덩이로 걸려 있지만, 이 오늘에 있어서 결과는 어떤가? 완전히 낙 제라 할 수밖에 없다.
남쪽 동포도 북쪽 동포도 동포라고는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 고 형이 동생에게 총을 내미는 이 싸움인 줄은 천이나 알고 만이나
알면서 도 쳐들어온다니 정말 대적으로 알고 같이 총칼을 들었지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 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 야 바꾸겠느냐? 참과야 바꾸겠느냐?』 한 사람은 없었다. 대항하지 않으면 그저 살겠다고 도망을 쳤을 뿐이다. 그것이 자유하는
혼일까? 사랑하는 마 음일까? 만일, 정말 그런 혼의 힘이 국민 전체는커녕 일부라도 있었다면 소 련, 중공이 감히 강제를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속에 참으로 인해 길러진 혼 의 힘이 도무지 없음이 남김 없이 드러났다. 해방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았 으니 해방이 될 리 없다. 이제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해방을 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북이 서로서로 상대방을 시비할 뿐이었다. 네 잘못이 내 잘못 아니냐 하는 태도가 없었다. 전쟁
터지자 나타난 것은 국민의 냉담한 태도였다. 즉 국민들이 정부를 신용하지 않았다. 전쟁을 정권 쥔 자들의 일로 알았지 국민의 일로 알지 않았다.
사실 국민이야 싸울 아무 이유가 없 지 않은가? 소련, 미국이 붙였다 하겠지만, 아무리 잘 붙여도 싸우지 않으 려는 형제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속아서 그 앞잡이 된 것은 정 권 쥔 자들이요, 속은 것은 욕심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렇게 큰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날 아침까지
몰랐으니 정말 몰랐던가? 알고도 일부러 두었는 가? 몰랐다면 성의 없고 어리석고, 알았다면 국민을 팔아넘긴 악질이다. 그러고는 밤이 깊도록
서울을 절대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 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저희들도 서로 살겠 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난한 것은 아니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 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 그저 나도 너도 피난가 서
다시 거기서 만났으니 또 사무라고 본 것뿐이었다. 민중이 신용 아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이 지나간 후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 은 진 것 아닌가? 어찌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어 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하고 떼어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노자는 전쟁에 이기면 喪禮(상례)로 처한다
했건만, 하기는 제2국민병 사건을 만들어내고 졸병의 옷․밥을 깎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과 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일까?
한 번 내리 밀리고 한 번 올려 밀고, 그리고는 다시 38선에 엉거주춤 전쟁 도 아니요 평화도 아니요, 그 뜻은 무엇인가? 힘은 비슷비슷한 힘, 힘으로 는 될 문제 아니란 말 아닌가? 이 군대 소용없단 말 아닌가? 전쟁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이었다. 피난을 가면 제 교도만 가려 하고 구호물자 나오면 서로 싸우고 썩 잘 쓴다는 것이 그것을 미끼로 교세 늘리려고나 하고, 그리고는 정부․군대의 하는 일, 그저 잘한다 잘한 다 하고 날씨라도 맑아 인민군 폭격이라도 좀더 잘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 대적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정치하는 자의 잘못을 책망하는 정말 義(의 )의 빛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핍박을 당한 일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 간난 중에서도 교회당은 굉장하게 짓고 예배 장소는 꽃처럼 단장한 사람으 로 차지, 어디 베옷 입고 재에 앉았다는 교회를 보지 못했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향락적인 생활은 마찬가지고 다른 나라 원조는 당 연히 받을 것으로 알아 부끄러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그것을 잘 얻어오는 것이 공로요 솜씨로 알고, 원조는 받는다면서, 사실 나라의 뿌리인 농촌은 나날이 말라들어가는데 도시에서는 한 집 건너 보석상, 두 집 건너 요리집 , 과자집, 그리고 다방, 댄스 홀, 연극장, 미장원이다. 아무것도 없던 사람 도 벼슬만 한번 하고 장교만 되면 큰 집을 턱턱 짓고 길거리에 넘치는 것은 오늘만을 알고 나만을 생각하는 먹자 놀자의 기분뿐이지 어느 모퉁이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먼 앞을 두고 계획을 세워 살자는 비장한 각오를 한 얼 굴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이 전쟁 치른 백성인가? 전쟁중에 있는 국민인가? 이것이 제 동포의 시체 깎아먹고 살아난 사람들인가?
그리고 선거를 하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고팔고 억지를 쓰고 내세우는 것 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칼은 있기는 있나? 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치들이 칼이 있을까? 정육점의 칼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낙제한 국민
국민 전체가 완전히 낙제를 했다. 그러나 여기 우리의 낙제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아니되는 커다란 일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6․25
싸움에 유엔 이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미래의 역사를 위해 크게 뜻이 있는 일이다. 역사상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 어느 한 나라의
문제로 인해 세 계 모든 나라가 단체적으로 간섭을 하여 국제군대를 보낸 일은 없었다. 만 일 유엔이 재빨리 그의 있는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일은 어찌 됐을지 알 수 없다. 아니다, 모르는 것 아니라 뻔하다. 우리나라 전체는 공산화됐을 것이다. 그렇게 됐으면 일본․필리핀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미국이 태평 양 저쪽에서 재즈 곡을 들으며 평화의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때의 일을 책임졌던 트루먼 대통령, 미국민의
여론, 그때 유엔 기관의 여러 사람들의 어진 결단에 감사를 하지만, 미국으로서도 유엔으로서도 그 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 利(이)는
義다. 유엔군의 충돌은 역사의 명령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밝 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德(덕)을 본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우리야 물론 덕을
입었다. 멸망을 면했으니 덕이요, 더구나 정신면에 있어서 영향은 크 다. 전쟁 후 무너져가는 민심을 이만큼이라도 거두고 우리나라의 썩고 썩은
관료정신을 가지고도 이만큼 나갈 수 있는 것은 유엔군이 출동해서 그 의 기가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야 물론 덕을 입었지만 그보다 뜻
깊은 것은 유엔 그 자체가 그것으로 인해 강해지고 그 걸음이 확실해졌다는 사실이다. 만일 유엔이 이때에 한국일을 모른다 했다면 미국의 신용은 물
론 유엔도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지경에 떨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유엔이 장 차 올 역사를 위해 아주 완전한 것으로는 보지 않으나 유엔이 내일의
세계 를 낳는 산파역을 할 것을 믿기를 서슴지 않는데, 처음 일어서는 자신은 6 ․25에서 얻었다.
6․25의 중심 되는 뜻은 하나 되는 세계로 달리는 한 걸음이란 데 있다. 국민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말고( 그것은 연극이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할 것이다.
누구를 나무라는 것 아니요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 자신을 보고 하는 말 이지. 죽지 못하고 부산까지 피난을 갔던 나는 완전히 비겁한 자요, 미워하 는 자요, 어리석은 자다. 거기에서 돌아와서도, 오늘까지 맛에 팔려 사는 나는, 평안을 탐하는 나는, 완전히 음란한 자요, 악한 자요, 속된 자요, 거 룩을 모르는 자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말을 하는 것은 말을 파는 자요, 진 리를 파는 자요, 하나님을 팔아 더럽히는 자다. 만 번 죽어 마땅한 나, 오 늘까지 살리신 것은 그 죄 속하라 함이 아닐까? 무슨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야 그 죄를 속할까?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국의 명문 (논설) - 志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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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志操論
◈志操論
편집자 注:이 글은 1962년 삼중당에서 나온 수필집 「지조론」에 실린 것이 다. 李光勳씨 추천.
趙 芝 薰
1920~1968. 시인국문학자. 본명은 東卓. 경북 영양 출생. 1941년 혜화전 문학교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 강사. 고려대 문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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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操(지조)란
것은 純一(순일:순수하고 완전함)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 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確執(확집:주장을 고집함)이요, 고 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威儀(위의:무게가 있어 외경할 만한 거동)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 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 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强度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 문이다. 자기의 名利(명리:명예와 이익)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 종자를 一朝(일조: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 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 를 존경 하고 그 困苦(곤고:곤란하고 고통스러움)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 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도 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警醒(경성:타일러 깨우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 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 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 가? 識見(식견:학식과 견문)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志士(지사)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 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 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을 위한 정책을 통해 서의 政商(정상:정치가와 결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꾀함)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口服(구복:먹고 마 심)과 名利(명리)를 위한 浮動(부동:떠서 움직임)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 땅하다고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 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權謀術數(권모술수)에 능한 직업 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衷情(충정: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마음)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廉潔(염결:강직하고 결백함)한 志士政治(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唾罵(타매:침을 뱉고 욕을 마구 퍼부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 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 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利慾(이욕 :사리를 탐하는 마음)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적인 이욕의 計巧(계 교:궁리해낸 꾀), 淫婦(음부)적 歡樂(환락)의 耽惑(탐혹:마음이 빠져 미혹 됨)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서 이미 시대착오의 잠 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 이기 때문이다.
과부와 홀아비가 改嫁(개가)하고 재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막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나 鰥夫(환부: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續絃(속현:아내를 여읜 뒤 아내를 다시 맞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 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보통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本能苦(본능고 )를 이성과 의지로서 超克(초극)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진작에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에도 붙어서 구복 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의 일이지 , 못나게 쪼를 부란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 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기술자․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 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은 것이 噴飯(분반:웃음을 참을 수 가 없음)한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된 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困辱(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 정신의 自尊自恃(자존자시:스스로 높여 자기의 능력을 믿음)를 위해서는 자 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奇癖(기벽:이상한 버릇)까지 도 지녔던 것이다.
申丹齊(신단재: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 꼿이 서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 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韓龍雲(한용운) 선생도 지조 때문에 여러 기벽 의 일화를 낳았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 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採根譚(채근 담:중국 명나라 말기 홍자성의 어록)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 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敎旨(교지:간사한 재주와 지혜)를 버리라는 말이다.
辱人(욕인:다른 사람을
욕되게 함)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 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마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의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 워놓은 主體(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改過遷善(개과천선:지나간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됨)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 이라고 욕하진 않는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 가지 않는다.
비난․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남 한산성의 치욕에 金尙憲(김상헌)이 찢은 降書(항서)를 도로 주워 모은 主和派(주화파) 崔鳴吉(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瀋陽(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혀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 진 얘기다.
변절자에게도 양심은 있다. 야당에서 권력에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失勢(실세)한 사람도 있고 지금 要樞(요추․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은 사 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 을 대하는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 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 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良家(양가)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 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하는 바를 포기하 는 것이다.
한국의 명문 (논설) - 일부 軍人들의 탈선행동에 警告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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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일부 軍人들의 탈선행동에 警告한다
◈일부 軍人들의 탈선행동에 警告한다
崔 錫 采
1917~1991. 언론인. 대구매일신문, 조선일보 주필 등 역임. 2000년 IPI 선 정 국제언론영웅 선정.
편집자 注:이 글은 1963년 3월1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설이다. 정진석 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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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군인
수십명이 최고회의로 몰려들어 「데모」를 했다 한다. 동기나 이 유를 따질 겨를이 없이 명색 공화국에서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 까.
국방장관을 위시해서 3군참모총장과 해병대총사령관이 국민 앞에 엄숙 히 「군의 정치적 중립」을 宣誓(선서)한 것이 바로 16일 전의 일이다. 그
런 선서가 없었다고 한들, 군인이 정치에 관여를 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를 고금의 역사가 昭然(소연)히 가르쳐 주고 있는 바이다. 하물며
5․16 혁명으로 軍이 통치를 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그 혁명정부의 예 하에 있는 젊은 장교들이 떼를 지어 統帥系統(통수계통)을 紊亂(문란)하고
정치적 행동을 내걸어 행동한다는 것도 下剋上(하극상)의 기풍이 그 극에 달했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요, 군율을 무시함이 이에 더할 바 없음을 통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에 가담한 수효가 기10명에 불과하나, 사려가 미숙한 혈기에서 온 소치라 할지라도 군인된 본령을 망각한 이들의
思考基底(사고기저)가 벌써 국가의 화근이니 국민된 자, 秋毫(추호)의 동정이 있 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猥濫(외람)하게도 『이나라
정치정세를 좌 시방관할 수 없어 全국민의 이름으로』 운운하여 국민의 의사를 僭稱(참칭 )했다. 우방의 막대한 원조로써 현대무기를 장비했고 국민의
피땀 어린 세 금으로 국방비를 부담하면서 막강 60만의 대군을 擁(옹)하고 있는 소이는 155리 전선을 지켜 외적에서부터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 재산을 수호 하라고 한 것이지 절대로 그들이 정치에 관여하라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정치에 눈을 떴거든 군복을 벗고 정치운동으로 나서라.
왜 비겁하게도 신성 한 군복을 걸치고, 무기를 지닌 특권을 향유한 채 군율을 어기고 국법을 짓 밟고, 국민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는가. 그들은
6개항목의 건의사항을 내 세워 「憂國衷情(우국충정)」이라는 自家陶醉(자가도취)를 자행했다. 하나 하나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지만, 혹 일부
군인이나마 그런 倒錯(도착 )된 사고방식에 오염되었다면 이야말로 큰 일이기에 지금 그 잘못을 깨우쳐 놓아야 하겠다.
첫째 『…현정부를 전복하고자 음모한 민족배반자인 쿠데타 분자들은 그 직 의 고하를 불문하고 嚴重索出(엄중색출), 극형에 처함으로써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을 안심시키고 정부의 권위를 확립하라』고 했다.
당연한 주장같지만 하급군인들이 새삼스럽게 그런 구호로 데모를 하지 않 더라도 혁명정부는 국가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표시하 고 있지 않은가. 국민들은 이에 발각된 그런 음모사건의 처단에 정부를 태 산같이 믿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중이며, 오히려 철없는 군인들의 이 번과 같은 망동이야말로 더 할 수 없이 「공포에 떨게」 하는 혼란과 불안 의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볼 때 自家撞着(자가당착)도 類萬不同(유 만부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둘째,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했다. 대관절 계엄의 본질을 알고 하는 소리인 가. 계엄령은 일반행정력으로써 도저히 국가치안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군대 의 일사불란한 명령계통과 무력을 동원하여 3권을 장악하고 비상사태에 대 처하는 수단인 것이다. 일반 국민은 눈이 빠지도록 질서와 안정을 갈구하고 있는데 반란을 기도한 것은 일부 몰지각한 군인들이요, 또한 이번 데모처 럼 상사에 불신을 표시하는 군기문란의 震源(진원)이 다름아닌 그들 자신인 데 무엇을 하겠다고 계엄령이 선포되어야 하는가.
셋째로 구태의연한 구정객들의 정치활동을 즉시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무엇이 구태의연이며 어떤 것이 新態(신태)인지 그들의 주장근거를 忖度(촌 도)할 수는 없으나 2․27 선서 이후의 정치 활동은 국민들이 보기에 憐憫( 연민)할 정도로 자숙의 빛이 현저한데 민주주의적 정치양식을 군대의 영내 처럼 혼동하는 천박한 견식을 버려야 한다. 넷째, 군정을 연장하거나 朴의 장의 민정 참여를 요구한 것은 더욱 불가해하다. 그런 것은 최고통치권자인 朴의장 자신이 국내외 정세를 통찰하여 취한 결단이지, 하급군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섯째, 더욱 강력한 시책을 감행하라는 요구는 「우유부단하고 미온적인 시책」을 전제로 하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위의 제4항과는 전연 모순되는 윤 리도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섯째,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부 득이 최후적인 수단을 講究(강구)할 것을 선언한다고 했다. 이 구절이야말 로 다른 어떤 사항보다도 可恐(가공)하고도 전율할 「반란의 예비」적 망발이다. 그래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최후적인 수단이라 했으니 실력에 호소한다 는 뜻이냐. 반란을 음모한 쿠데타분자를 규탄-극형에 처할 것을 불법데모로 써 육박한 그들이 목적은 다르다 할지라도 공공연히 최고통치기관을 향해서 軍의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위협적 언동을 취하는 것은 영락없이 똑 같은 「반란」의 수단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정녕코 이런 소아병적 혈기야말로 국가를 百尺竿頭(백척간두)의 위 기로 몰아 넣는 反민주적 군국주의의 濫動(남동)임을 개탄하면서 군법의 추 상같은 발동을 「全국민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한다. 당국은 이들의 엄 단을 발표한 바 있지만, 만의 일이라도 이번 사태와 같은 군대의 부하라 하 여 조금이라도 온정이나 撫摩(무마)가 가해진다면 일파만파로 연쇄반응은 그칠 줄을 모를 것을 우리는 深憂(심우)한다. 「울며 馬謖(마속)을 斬(참) 한」 제갈공명의 비장한 公心(공심)이 절실히 요청되며, 민주주의 만년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서 차제에 軍의 강철 같은 단결과 함께 軍책임자들 의 단호한 행동이 있어야 할 줄 안다.
한국의 명문 (논설) - 학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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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학문의 길
◈학문의 길
朴 鍾 鴻
1903~1976. 철학자. 평양 출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박사. 서울대
대학원장․대통령 교육문화 담당 특보 등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1965년 동양출판사에서 나온 현대사상강좌 제4권 「독서 와 학문의 길」에서 일부 발췌했다. 문순태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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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사람은 자연을 과학적으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태도를 바꾸 어 그것에서 도덕적인 교훈을 찾으려 하기도 하고, 심미적인 감상을 즐기려 하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虛空(허공)에 매달린 거미(蜘蛛)에게서 中間的 存在者(중간적 존재자)로서의 인생의 고뇌와 모험을 보았거니와, 동양 사람은
獅子奮迅(사자탈신)이라 하여 獅子의 勇往邁進(용왕매진)하는 氣象 (기상)을 본뜨기도 하고, 황소걸음이라 하여 느린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지 속하는
노력과 精進(정진)의 모습을 황소의 걸음걸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狐疑(호의)의 決斷性(결단성) 없음을 비웃는가 하면, 脫兎(탈토)의 날쌤을
신통하게 여기기도 한다. 松竹(송죽)에서 변함없는 節槪(절개)를 보았고 白鷺(백로)에서 티 없는 純潔(순결)을 읊었다. …
한국의 명문 (논설) - 韓國 近代文學의 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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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논설) - 韓國 近代文學의 理解
◈韓國 近代文學의 理解
편집자 注:이 글은 1973년 일지사에서 나온 「한국 근대문학의 이해」 머리 말이다. 이 머리말에는 「출발의
의미와 회귀의 의미」라는 제목이 붙어 있 다. 이만기 교사 추천.
金 允 植
1936~. 서울대 국문과 교수. 경남 김해 출생. 서울대 문학박사. 대한민국문 학상 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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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君,
君과 나와의 이러한 記號的 地平(기호적 지평) 內에서의 만남이 바람 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은 최소한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문자로서의 이 러한 記號란 너의 것도 아니지만 더구나 나의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이 신념 때문에 이 자리를 빌어 두 가지 이야기 를 해 두기로 하였다.
첫째 번 이야기는 출발에 관한 것이다. 출발이란 무릎이다. 무릎의 메타포 가 출발인 것이다. K君, 君은 傷處(상처) 없는 무릎을 보았는가. 우리가 미 지를 향할 때, 우리가 보다 멀리 손을 뻗치려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일어서 려 할 때, 피를 흘려야 하는 곳은 바로 이 무릎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뜀박질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산과 대지와 강의 흐름과 칸트의 星空(K ants Stenrnenhimmel)은 사정없이 우리를 막아선다. 그것은 가정이고 네 이 웃이고 친구이며 사회이다. 너를 에워싸는 이 감옥에서 너는 탈출해 나와야 한다. 이미 날 때부터 너는 그 탈출의 욕망의 씨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늘의 구름 때문에 네가 넋을 잃고 시무룩해 있을 때 아마도 어머니는 너의 건강을 근심할 것이고 심지어 강아지도 네 표정을 살필 것이다. 이 수 없는 거미줄 같은 人緣(인연)의 끈에서 君은 질식해 본 적이 없는가. 이 감 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번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너의 무릎을 사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번의 탈출은 보다 아픈 것이다. 그것은 미지를 향한 너의 理性的 本能(이성적 본능)이다. 내가 목마른 너에 게 물을 떠 준다면 너는 그 물을 마셔서는 안된다. 그것은 네 갈증의 욕망 을 無化(무화)시키기 때문이다. 너의 몸을 눕힐 자리를 내가 만들어 준다면 너는 거기서 잘 수가 없으리라. 너는 저 새벽의 광야, 청청한 호수, 태풍 속의 존재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헛된 소유가 아니라 욕망 자체여야 하 기 때문이다. 어떤 소유도 너를 죽이는 것이다. 안일한 나날보다도 비통한 나날을, 죽음 이외의 휴식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못다한 욕 망이 죽음 후에도 남지나 않을까 에 있을 뿐이다.
K君, 이 욕망이 바로 사랑의 의미이다. 그것은 同情(동정)이 아니라 사랑이 다. 설사 내가 「아홉 개의 교향곡」을 짓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中性子(중성자)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너는 영원히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오직 너만이 가진 순수한 욕망 때문인 것이다. 行爲(행위)의 선악 을 판단하기도 전에 행위하는 것, 그것이 바로 熱情(Passion)이며 아픔인 것이다. 그 아픔이 本能的 욕망의 순수라면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K君. 보 이지 않는 무릎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너는 모든 책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 너의 골방에서, 거리에서, 都市에서 탈출해 가라.
선언문기타
한국의 명문 (선언문) - 己未獨立宣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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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선언문) - 己未獨立宣言書
◈己未獨立宣言書
崔 南 善
1890~1957. 국학자. 서울 출생. 「소년」 창간.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 게 발표」. 독립선언서 기초.
편집자 注:원문은 국한문 혼용이나 여기서는 金東吉 박사가 1979년 3․1운 동 60주년 기념으로 現代한글 문장으로 고친 것을 싣는다.
徐基源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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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 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 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된
양심의 發露(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 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 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 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 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에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 은 지 여러 천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 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 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道義(도의)가 짓눌려 시 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 게 하려는 것이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속의 칼날을 품으니, 인류 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 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물러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丙子修好條約(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 인은 실생활에서,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 리 문화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낼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의 기틀과, 뛰어난 이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 한다 하여,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아니 하노라. 자기를 일깨우 기에 다급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여가를 갖지도 못하였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에게는 예부터의 잘못을 따져 볼 겨를도 없노라. 오 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나를 바로잡는 데 있을 뿐, 결코 남을 헐뜯는 데 있지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자기 집의 운명을 새롭게 개 척하는 일일 뿐,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의 감정을 가지고 남을 시기하고 배 척하는 일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爲政者(위 정자)의 공명심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 실을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合倂(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평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 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度量(도량)이 날이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 펴 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한 우호 적인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 운 길인 것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 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 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四億(사억) 중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 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 이 뻔한 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 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 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道義의 시대 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 흐로 새 문명의 瑞光(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 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 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때의 時勢(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 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 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 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 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森羅萬象(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 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 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한국의 명문 (선언문) - 4․19 혁명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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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선언문) - 4․19 혁명 선언문
◈4․19 혁명 선언문
서울대학교 학생회
편집자 注:이 선언문은 당시 정치학과 재학생이던 李秀正이 초안을 만든 것 으로
전해진다. 이원희 교사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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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조류에 자신을 참 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薄土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邪惡(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糾彈匡正(규탄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 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專橫(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 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 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설픈 것임을 敎示(교시)한다. 한국의 日淺(일천)한 대학사가 赤色專制(적색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巨劃 (거획)을 掌(장)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족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 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은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慧眼(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 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戰域(전 역)은 바야흐로 풍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家父長的(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 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壟斷(농단)되었다. 언론 출판 집 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과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慘屍(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裸像(나상)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威口赫(위하)와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學究(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 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一翼(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친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 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 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1960년 4월 19일
한국의 명문 (선언문) - 국민교육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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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선언문) -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
朴 鍾 鴻
1903~1976. 철학자. 평양 출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박사. 서울대
대학원장․대통령 교육문화 담당 특보 등 역임.
成在鳳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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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 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
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 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 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 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 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 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한국의 명문 (銘文)-李退溪銅像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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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銘文)-李退溪銅像銘文
◈李退溪銅像銘文
朴 鍾 鴻
편집자 注:이 글은 1970년 남산도서관 옆에 세워진 李退溪 동상 뒷면에 순 한글로 새겨져 있다. 최정호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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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숭깊고
정밀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분명하고 간곡한 것은 선생의 가르 침이다 앎도 행함도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공경의 자세 하나로 밑받침 하는 데
교학의 근본을 두셨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진실되어 제자들을 정성껏 이끌어 계발하시니 문하에 명현들이 뒤를 이어나왔다 고명한 이름 이 일찍부터
널리 들리었으되 70평생의 마지막까지 자기의 학설 속에 잘못 을 고백하고 고치기에 용감하였다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남겨주신 값진 본보 기다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았으나 국은에 보답하는 일념에서 심혈을 기울여 지은 글들을 임금께 올리니 나라를 근심한 경륜이요 유학의 진수이었다 품 격높은
선생의 글은 자자구구가 몸소 느끼고 깨친 참의 발로요 따사로운 마 음씨가 스며흘러 저절로 사람을 감복케 한다 선생은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 나
그곳에서 돌아가셨건만(1501~1570) 멀리 일본의 선비들마저 선생을 신명 같이 존숭하여 명치 시대에 까지 정신적 길잡이로 받들었다 선생은
동방의 빛이요 길이 우러러 본받을 스승이시다
한국의 명문 (법정진술) - 군사재판 법정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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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 (법정진술) - 군사재판 법정 최후진술
◈군사재판 법정 최후진술
金 大 中
편집자 注:이 글은 내란음모․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金大中씨가 1980년 9월13일 오전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행한 최 후 진술이다. 金光雄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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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진술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자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작년 11월 5일 朴대통령의 國葬(국장)을 집에서 단 1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는데
아직도 내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은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한 『 우리 모두에게 朴대통령의 죽음의 뜻을 하느님께서 깨닫게 해주십시오』라
는 말이었다. 朴대통령의 죽음은 그 개인으로 보자면 더 이상의 불행은 없 을 것이나 維新(유신)이 가고 새로운 민주시대가 다가오는 역사적인
계기였 다. 우리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희망이 봇물 터지듯 솟아올랐다. 그 러나 5․17 계엄령의 전국 확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상치
않은 시련을 맞이하였다.
나는 10․26 이후 많은 사람들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1980년대에 는 민주시대가 될 것은 틀림없으나 당장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있을 것 같 아 우려를 표명해 왔다. 우리나라는 18년간의 朴대통령 집권으로 무시 못할 유신 지지세력이 남아 있으나 이 세력으로는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도 없고 또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나는 유신세력의 제거를 주 장한 적은 한번도 없다. YWCA 「민족혼」 강연 때는 차관급 이하는 그냥 두 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도 있고 유신세력인 김종필씨와도 선거를 통해 정 정당당하게 싸워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0․26 사태가 없었으면 부마사태는 아마 전국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 러나 10․26이 나는 바람에 民主와 維新 간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와 결부시켜 생각하 는데 10․26은 곧 유신세력과 민주세력이 협력해서 이 나라를 이룩해 나가 라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보았다.
나는 10․26 이후 무엇보다도 국가안보, 경제안정, 민주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崔圭夏(최규하) 과도정부와도 협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는 일관되게 정치보복 없는 국민화해를 주장했으며 이런 의미 에서 崔정권에 대화도 요청하고 나의 납치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용서하겠 다고 말했다. 또한 정국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혼란을 통하 지 않고서도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과, 만일 계엄하에서 혼란이 일어날 경우 군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며 이렇게 되면 민주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에 역이용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나의 주장과 우려 에도 불구하고 5․17이라는 불행한 사태가 오고 말았는데 그 일차적인 책임 은 물론 정부에 있다.
10․26 이후 한국 국민은 세계적으로 칭찬받을 만큼 자제심을 발휘했다. 그 동안 많은 주한 외국대사와 만나 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우리 국민의 자제력 에 찬사를 보내 왔다.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용기와 함께 자제 할 수 있는 슬기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의 여망을 무시 하고 혼란을 자초하였다.
예를 들어 첫째, 계엄령의 경우 최규하 대행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그 존재 이유가 없어졌음에도 끝까지 이를 해제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의혹을 일 으켜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둘째, 정부는 과도내각이라 하면서도 분명한 정권이양 일정을 밝히지 않아 정치일정에 대한 국민의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셋째는, 헌법개정에 있어서 국민은 대통령 直選(직선)과 국회의원 소선구제를 원하고 국회에서 개헌안 을 마련중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별도로 개헌 심의 기구를 만들어 이원제 니 중선거구제니 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이러한 정부의 의심스러운 태 도 때문에 결국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들 의 가두진출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때 학생들은 崔내각의 태 도와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를 기다려 보았어야 옳았다고 여기고 있다. 나는 학생들이 5․17 교내 데모에 국한키로 결의해 놓고, 어째서 13일 가두 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고 그 배후에 무엇이 있었는지 의혹을 품고 있다. 어쨌든 과도정부가 국민의 의혹을 풀지 못하고 여야에 그렇게 국회 개최를 촉구했으나 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태를 빚고 만 것이다. 이 나라에는 분명히 全(전)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유신세력이 있는 반면, 민 주주의를 지향하는 다수의 민주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 어느 한쪽 세력도 다른 세력을 억누르고서는 이 나라를 이끌고 갈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 우리 국민은 이미 민주주의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 우리는 두 번 다시 불행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이 양대 세력이 서로 대화 하고 토론하고 관용해야 한다. 이것만이 공산주의에 이길 수 있는 길이다. 이번 사건을 김대중 일당 내란 음모사건이라 했는데 나 한 사람이 다수의 학생, 국민을 선동하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면 왜 정부는 학생의 자제를 요망한 나의 성명서나 「동아일보」의 요청에 따라 쓴 기고문을 보도조차 못하게 했는가? 그리고 왜 정부는 나의 대화요청에 응하지 않았는가?
내가 중요시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실현이었지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 니었다. 때문에 나는 우선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을 뿐 이다. 검찰에서는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어 학생 데모 를 통해 집권하려 했다고 공소장에서 말하고 있으나 나는 총 한 방 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바랐던 것은 선거였으며, 선거만 순조롭게 이 루어진다면 집권할 수 있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4년 후를 대비한 튼튼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란이 오면 집 권은커녕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처하게 되어 사실은 오늘날 같은 사태가 올 것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非폭력주의자이다. 그렇다고 무저항주의자는 아니므로 나는 비폭력 저 항주의자이다. 검찰은 내가 해방 후 좌익단체에 가입했었다는 것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공산사상을 保持(보지)해 왔던 것으로 몰아붙이는데 이는 극 히 유감이다.(중략)
당국이 나의 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으나 이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합당하여 민주 국가로서 옳은 일인가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관용을 바란다. 결국 이분들에 대한 혐의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全대통령이 국민총화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세력과 관용으로 토론해 나 가기를 바란다. 나는 그저께 구형을 받았을 때 의외로 차분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물론 공판정에 나왔기 때문도 있겠으나 평소보다 더욱 잘 잤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 신자로서 하느님이 원하시면 이 재판부를 통하여 나를 죽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재판부를 통하여 나를 살리실 것이라 고 믿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 계신 피고들에게 부탁드린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 어제 한 완상 박사가 예언자적인 사명과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 는 이를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으로 부르고 싶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서 민주 회복을 통한 사회구원 민족구원을 생각했다.
재판부, 국선․사선 변호인, 교도소 관계인, 내외신 기자의 노고에 감사드 린다. 그리고 검찰부에서 한 노고 그 자체에는 감사를 드린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 最高의 名文은 적중한 예언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亂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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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의
亂中日記
最高의 名文은 적중한 예언
三國史記에서 金賢姬까지
군인을 경멸하던 시대에 태어난 한 軍人의 悲壯한 삶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 mongol@chosun.com/ www.na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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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질
것을 의식하지 않고 쓴 日記 / 超人이 아닌 病弱했던 사람:신경성 위장병을 앓다
李舜臣의 일기를 亂中日記라고 부르게 된 것은 正祖가 李忠武公全書를 만들 도록 한 뒤였다. 편찬자가 亂中日記라고 붙인 것이지 李舜臣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李舜臣은 그의 死後에 자신의 日記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日記는 전란 속에서 가슴에 쌓아 둘 수 없었던 울분, 걱정, 한탄을 기록한 것이지 나중에 세상에 자신을 드 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일기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일이다. 李舜臣은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 에 알려질 일이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와 같은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서는 李舜臣의 그런 착각이 무척 다행이다. 솔직한 자기토로에 의 해서 드러나는 인간 李舜臣의 裸像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傳記작가들에 의해 신격화되고 박제품이 된 근엄하고 딱딱한 李舜臣과 달리 亂中日記 속 의 李舜臣은 피가 끓고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며 憂國과 분노가 뒤섞이고 비 통함과 집념이 뒤엉키는 격동하고 생동하는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 聖人도 아니고 聖雄도 아니다. 그의 傳記 10권을 읽는 것보다는 亂中日記 한 권을 읽는 것이 그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超人이 아닌 病弱했던 사람:신경성 위장병을 앓다
正祖 시대 난중일기를 처음 활자판으로 간행할 때 누락시킨 부분이 많은데 주로 조정을 비판하고 元均에 대해서 험한 이야기를 한 경우이다. 이 누락 부분이야말로 李舜臣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뇌물의 多少로 죄의 輕重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한 줄기 돈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넋 도 찾아온다는 것인가>(丁酉年 5월21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 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丁酉年 5월8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무치고 슬픈 마음에 눈물은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 득한 저 하늘은 어찌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 (丁酉年 5월6일)
1998년에 서울대학교 朴惠一 명예교수(원자력공학)와 崔熙東 원자핵공학과 교수, 裵永德-金明燮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이 같이 쓴 「李舜臣의 일기-親筆草本에서 國譯本에 이르기까지」에는 난중일기를 분석하여 李舜臣의 행동 을 엿보게 한 대목이 있다.
李舜臣이 자신의 일기에서 몸이 불편하다든지 병에 걸린 것을 언급한 대목 이 180여 회에 이른다.
▲1597년 8월21일자 일기:「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 했다가 人事不省에 빠져 거의
구하지 못할 뻔 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고통을 겪었다」
▲8월22일:「곽란으로 인사불성, 기운이 없고 또 뒤도 보지
못하였다」
▲8월23일:「병세가 몹시 위급하여 배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하고 또 실상 전 쟁터도 아니므로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묵었다」
이 기사를 본 내과전문의의 소견은 「극심한 신체적 과로와 정신적 압박에 서 비롯된 일종의 신경성 위장반응이며 급성 위염의 증상군에 속하는 病狀 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엔 술마신 기록이 140여 회나 나온다. 그 는 속앓이를 하면서도 술을 즐겨 했다. 나라가 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울분 ,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 걱정,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元均에 대한 경 멸과 미움, 倭敵에 대한 증오, 民草의 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李舜臣은 몸을 돌보지 않고 술로써 시름을 달랬던 것 같 다. 토사곽란을 소주로 치료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위장병을 술로 다스리려고 한 사람 / 기록문학
신경성 위장병의 원인은 과도한 걱정과 울분이었을 것이다. 李舜臣 일기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수십 차례나 나온다. 그는 꿈자리가 어지러웠던
사람 이다. 꿈의 내용도 주로 가족들과 나라 걱정이다.
<丙申 정월12일:새벽 2시쯤, 꿈에 어떤 곳에 이르러 영의정(柳成龍)과
함께 이야기했다. 잠시 함께 속 아랫도리를 끄르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가슴이 막히어 그만두었다.
이 윽고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 디로 다시 가시랴」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가슴이 막힐 만큼 나라 걱정을 하는 李舜臣
은 元均에 대해서만은 아주 경멸스러운 용어를 쓰고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를 元凶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의 元均 인물평으로 해서 임
진왜란 뒤 3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다른 두 사람은 李舜臣과 權慄)으로 선정되었음에도 元均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 알려진 억울한 면도 있다.
난 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李舜臣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과 恨 을 가슴속에 묻고 지낸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기록문학
李舜臣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 다시피한 朝鮮水軍에서 겨우 13척의 戰船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 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 이 鳴梁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 리 나 오 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 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총통)을 폭풍과 우레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이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 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 을 본 즉, 먼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 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 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 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 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 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 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 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 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 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 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 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 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 송여종과 평산포대 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 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 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無上(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 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요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 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 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1594년 5월9일 일기:「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 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 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 못 이루는 밤 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수루에 혼자 앉아/큰 칼 옆에 차고/깊은 시름 하는 차에/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 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 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 속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 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 후 종 順花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 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 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 놓아 울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 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쌀에 그는 心身이 곯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 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땐 李舜臣이 억울 한 옥중생활에서 풀려나 죄인의 신분으로 白衣從軍중이었기 때문에 문상만 하고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戰線으로 떠나야 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 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 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 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 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 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 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 싶 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 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 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 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 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脫營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을 빌려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이 110여 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 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 이 많고 軍需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한 상황에서 軍紀를 엄정하게 잡 아가자니 강력한 體罰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 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 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武將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능한 王朝,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군 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 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270여회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徐廷柱 시인이 쓴 李承晩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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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廷柱
시인이 쓴 李承晩 전기:大人이 쓴 巨人 이야기
여기 그의 70여의 생애를 한거찬 意志로써만 貫徹하였고, 또 관철하면서 있는 한 朝鮮사람이
있다. 舊한국 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世紀에 가가운 이 민족의 변화 많은 세월 속에 있어,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사람으로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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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판매금지시킨 이유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인물에 대해 가장 위대한 문장가가 쓴 傳記 는 가장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이 되고 말았다. 대시인 徐廷柱의 「雩南 李承晩傳」이 그 책이다. 이 책은 1947년 여름에서 겨울에 걸쳐, 아직 대한민 국이 출범하기 전에
徐廷柱씨가 「전기의 집필자로 위촉되어 매주 두 차례 씩 (雩南을) 만나뵙고 그분 생애의 이야기들을 그분에게서 직접 口授(구수 )받아 노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에서 다른 전기와 크게 다르다. 「李承晩이 말한 李承晩의 생애」란 밀도와 實感을 느낄 수 있다 는 점에서 이
책의 정보가치는 매우 무겁다. 더구나 大詩人의 안목에 잡힌 巨人의 초상이란 점에서 이 散文의 깊이는 남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이 傳記는
출간되자마자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로 판매금지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여름에 三八社에서 출판된 徐廷柱 著의 전기를 받
아보고는 경무대에 근무하던 金珖燮 시인에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徐廷柱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
『좋은 시인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
徐廷柱씨는 「서양에서 반세기 이상을 사시며 공부도 많이 하신 우남 선생
이시니 잘 이해해 주실 걸로 알고 이분의 이름 밑이나 딴 누구의 이름 밑에 도 두루 존칭 붙이는 걸 생략했던 것인데, 이분의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전 통적인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李대통령은 특히 아버지 李敬善의 이름 앞뒤로 경칭을 생략한 데 대하여
대단히 화가 나서 직접 경찰에 지시하여 서점에 깔린 책들도 압수해 버렸다.
글쓰는 사람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자신의 글이 세상에 알려 지는 것을 저지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럼에도 徐廷柱는 이 전기의 재간 행(1995년)에 붙인 머리글에서 「나는 내 일생에서 나를 낳게 하신 내 親父 외에 두 분의 정신적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왔다」면서 「한 분은 내 교육 을 바로 이끌어주신 朴漢永 스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徹天(철천)의 民族自主獨立魂을 각성시켜 주신 우남 이승만 어른 바로 그분이시다」라고 썼다.
가장 朝鮮的인 사람
기자는 徐廷柱씨의 初版自序(초판자서)의 첫 문장을 명문으로 꼽는다. <여기 그의 70여의 생애를 한 거찬 意志로써만 貫徹하였고, 또
관철하면서 있는 한 朝鮮사람이 있다. 舊한국 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世紀에 가까운 이 민족의 변화 많은 세월 속에 있어,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 사람으로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一生을 이야 기하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일생쯤 소비된대도 아까울
게 없다. 그만큼 그는 저 뭇 묏부리와 丘陵들을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한 峻嶺이 되기 때 문이다>
약 40년간 미국생활을 했고
미국의 일류대학들만 골라서 공부를 했지만 李承晩의 魂은 가장 조선적인 것으로 남아 있더란 徐廷柱의 이 말은 인간 李承晩을 논할 때 결론으로 삼을
만하다.
徐廷柱씨가 왜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1995년 3월호 月刊朝鮮 에 그가 쓴 글(雩南과 나)이 답해 준다. 이 글에 따르면 李承晩은 매주 찾 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 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 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 갔나/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데만/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 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내 가슴속이 문득 북받쳐 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李朝 말기부터 이 나라 자 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도 록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 지 그 가슴속에 못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漢南山! 그 漢南山!>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徐廷柱씨의 속에서도 어느 사이인지 그를 한 민족 의 아버지로서 확인하는 『아버지!』하는 감동이 안 솟아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承晩은 광복된 뒤 돌아와 추억의 남산을 찾아 이런 漢詩를
남겼다.
도원고구산여연(桃源故舊散如煙)
분주풍진오십년(奔走風塵五十年)
백수귀래상해변(白首歸來桑海變)
사향휘루고사전(斜向揮淚故祠前)
(복사골의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져/어수선히 지나간 오십 년이여/모두 변 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뿌리다니)
박수를 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기자는 1996~97년간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 대학에서 머물면서 李承晩이 이
곳 대학원을 다닐 때 하숙했던 집(在美동포가 살고 있다)에 가 보았다. 기 자는 徐廷柱씨가 가졌던 경탄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후진국에서 온
망 명객 李承晩은 선진국 미국에서 살면서 어떻게 조선인의 魂을 그대로 간직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미국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기자의 결론은 다음 세 가지였다. 李承晩의 타고난 인간의 그릇, 미국의 일 류대학(조지 워싱턴 대학-하버드 대학-프린스턴 대학)을
다닌 학력,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詩心이 그를 으뜸가는 조선인으로 남아 있게 하였던 것이리라. 反面에 徐載弼은 미국 생활 속으로 들어가
정착하면서 점차 조 국과 멀어져 갔고 한국어도 서툴게 되어갔다. 徐廷柱의 傳記에 李承晩과 서 재필을 비교한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徐載弼이 일시 귀국하 여 協成會 모임에서 강의할 때였다. 서재필이 토론 도중에 문득
생각난 듯 이 청중들에게 박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 잘하면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 한다고
생각되거든 그 렇게 해보시오』
그러나 이때 李承晩에게는 「아무리 미국이 좋다 하여도 이런 것까지는 흉 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또 한번 徐박사를
고쳐 보면서 『자, 그럼 우리 박수 합시다』라고 큰소리를 내어버렸다. 李承晩은 못마땅한 생각에서 그런 식으로 반발한 것이다.
이를 두고
徐廷柱씨는 傳記에서 「이 두 사람의 그 뒤 생애는 『손뼉을 칠 수 있는 사람』과 『칠 수 없는 사람』의 사이와 같은 차이가 없지 않았다 」고
썼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웁스!(oops!)』라는 말은 어색하여 『아!』라고 하 고 아무리 일본어를 잘해도 『하이』라는 말은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 , 한국인의 습관과 미풍양속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 이런 토착성을 李承晩 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의 혼을 가장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이 土種 조선인됨에서 李承晩의 무서운 주체성이 우러나온 것 이다.
대전환:守舊에서 開化로
徐廷柱씨의 전기는 李承晩의 거대한 생애 중 굵은 매듭들을 정확히 잡아낸 다. 李承晩이 여섯 살 때(그때 그의
이름은 承龍)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 로 눈이 먼 적이 있었다. 이 소년의 눈을 틔어준 것은 서울 진고개의 일본 인 의사였다. 이 병원으로 업혀
들어간 이승만 소년은 이제껏 맡아보지 못 했던 쌩긋한 내음새에 코를 찡그리고는 『왜내 난다. 가자』라고 했다고 한 다. 「왜(倭)내」는 李承晩이
처음으로 접한 개화의 문명이었다. 李承晩은 일본문명을 통해서 近代로 나아간다. 그는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 로 마감되면서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리기 전에는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 화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守舊세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골수 양 반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번 낙방하면서도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그가 1894 년의 갑오경장으로 科擧가 폐지되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서당 친구 신긍우 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파의 길을 걷게 되는 대전환이다. 이때 李承晩은 이미 결혼한 나이 스물의
청년이었다. 李承晩의 급제에 모든 희 망을 걸고 있으면서 無爲徒食하던 아버지 李敬善은 낙담한다. <『새로 된 시험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마는…』 승만은 자기의 침묵이 하도 딱하여 거의 억지로 한 마디 되뇌어 본다. 그러 자 아버지의 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워지며 『뭐?
시험제도라니? 그깐놈들에 게 붙어서 그래 개화당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선비는 죽어도 군색해선 안되느니라. 가령, 백이숙제같이 산채를
씹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그 까짓 왜놈배들에게 부동한단 말이냐?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에라도 너는 그따 위 시험제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이 난세에 性命을 보존할 생각을 해라 . 고르지 못한 때에 묻혀서 사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길이다. 알겠느냐?』> 李承晩의 漢學 실력은
과거를 재수, 삼수, 四修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것 이다. 배재학당에서 일단 서양문물에 접하자마자 순식간에 李承晩은 가장 급진적인 개화파로
돌변한다. 그의 漢字실력이 바탕이 된 덕분인지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영어도 빨리 배웠다.
가을밤에 잠 못 이루다
1899년 만 24세의 中樞院 議官 이승만은 고종을 협박, 李堈(이강)에게 讓位 시키고 일본에 망명중이던 개화파 朴泳孝를 맞아들여
혁신내각을 수립한다 는 일종의 쿠데타 계획에 관계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까지 갔 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救命운동 덕분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 뒤 약 6년간 한성감옥에서 생활. 이 獄中이야말로 그 뒤의 李承晩을 만들어 낸 단련과 극기의 교육장이었다. 여기서
남긴 잡문, 詩, 번역문 등은 獄中雜記로 불리는데 최근 연세대 柳永益 교수에 의해 정리 발표되었다. 그 가 운데는 142首의 漢詩가 있다.
秋夜不寐(추야불매)란 제목의 산문은 李承晩 의 뛰어난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 글의 번역문은 이러하다.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책을 본다. 저녁 종소리가 그치 자마자 작은 창살에 어둠이 깃든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등에 불을 켜니 새 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니 고요하기가 僧房 (승방)에서 參禪(참선)에 들어간 스님과 같다.
창살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니 뜰에 있는 나무가 침침하게 보인다. 약한 바 람이 서서히 불어와 볼을 스쳐가니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호소나 하듯 이 귓가에
요란하다. 어느 집에선가 시름에 잠긴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담장 너머에선 순시하는 야경꾼의 징소리가 멀어 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성긴 버들가지가 서늘함을 보내오고 그윽한 난초가 향기를 풍긴다.
밤은 어찌하여 이리도 깊어가기만 하는가? 종소리 북소리 멀리서 들리는데 누구의 시름인가? 날은 추워지는데 편지는 늦어지고 임금의 교사(사면장) 도 다소 더디나 보다. 작년이고 금년이고 백발은 늙어감을 재촉하니 남은 날이 며칠이던가? 皇家(황가)에 일은 많은데 이 한 몸 王獄(왕옥)에 갇혔구 나. 그만두어라. 말해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아! 命(명)이로다. 운수에 달렸구나. 무릇 선비로서 혼란한 나라에 처한 자 가 참으로 능통한 權道(권도)로 헤쳐나가지 못할 바에는 다만 자기 한 몸이 라도 잘 가누어 機微(기미)를 살피고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걱정해서 무엇 하리오. 나도 이제부터 쉬리로다>
조선 사람의 배타적 자세를 비판함
1899년 5월27일 서울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던 電車회사가 어린이를 치어 죽 였다. 都下의 신문들이 민심을 격발시키는 논설을 쓰고 있는 데
반대하여 李承晩이 옥중에서 쓴 논설이 전한다. 지금 읽어보아도 상당히 개방적인 입 장에서 自重을 권고하는 성숙된 내용이다.
<우리
한국이 외국과 通商(통상)한 이래 지금까지 외국과 修好(수호)하고 交隣(교린)함에 있어 외국을 공경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으니, 이는 억지 로
힘쓰고 억지로 행한 것이다. 우리 한국은 세상과 더불어 우호를 닦는 것 이 公益(공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옳다는 偏見(편견)을 고집하였다. 일을 당하면 매양 배척하고 억압할 것만 생각하고, 사건이 생기면 번번이 얼버무려 彌縫(미봉)하였다.
바람이 잠잠 해지고 물결이 가라앉는 것을 보면, 바로 다시 사건을 일으켜 세상에서 신 의를 잃고 이웃 나라와 원수가 되었다.
(결국) 오늘날과 같은 처지가 되자 세상 사람이 마침내 우리를 신의도 없고 조리도 없는 사람들이라 지목하고, 우리로 하여금 만국의 공회(公會)에 참 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우리에게 만국의 공익에 끼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찍이 외국 신문을 읽어보니, 『한국 정 부는 신의를 지키지 않고 스스로 버티고 있으니 각국은 마땅히 위세와 무력 을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衆論(중론)이 하나로 모아지면, 우리의 형세는 고립되게 마련이다. 하나라도 부강함을 믿고 약한 나라를 능멸하는 나라가 있어 정의를 저버리고 우리에게 事端(사단)을 벌인다면, 누가 그 일의 잘 잘못을 가려주려고 하겠는가?(중략)
또 지금 세상에서 通商하고 수교하는 까닭은, 어느 한 두 강국만이 이익을 독점하고 기회를 포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萬邦(만방)과 萬人(만 인)이 이익을 같이 하고 우호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어찌 한국만이 홀로 向隅之嘆(향우지탄, 상대할 사람이 없어 구석을 향해 탄식함)을 지닌 채 쇠 미하고 궁핍하여 그 폐해를 모두 받아서 오늘날과 같은 극한지경에 다다르 게 되었는가?
제군, 제군이여! 시험삼아 일본과 청국, 이 두 이웃 나라를 보라. 하나는 조그마한 섬나라로서 제도를 바꾸고 自强(자강)을 힘쓴 지 30년 만에 大東 (대동)의 한 지역에서 무력을 드날리며 영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다른 하 나는 영토 넓은 큰 나라로서 스스로를 높이고 스스로를 위대하게 여기며, 망연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않다가 이러저런 패배를 겪어 누차 영토를 떼 어주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스스로의 생존도 기약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두 나라를 살펴보면,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어찌 스스로를 버리고 스스로를 취하는 차이가 아니겠으며, 어찌 열국이 일본에게 은혜를 베풀고 청국에게 원수처럼 대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 찌 외국과의 통상이 일본에서는 이익을 주고 청국에게는 원수처럼 대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찌 외국과의 통상이 일본에게는 이익을 주고 청국에 게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 이토록 현격하게 다를 수 있겠는가?>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李秉衡의 「전쟁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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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
李秉衡의 「전쟁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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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에 대한 체험적 관찰기 / 『이전의 너는 이미 죽었다』
李秉衡 장군은 육사 4기 출신으로서 6․25동란 때는
대대장, 연대장, 그 이 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합참본부장, 마지막으로 2군 사령관을 역임한 분이다. 그 뒤 전쟁기념사업회장으로서 서울
용산의 옛 육군본부 자리에 전 쟁기념관 건립을 지휘했다. 그를 6․25 때 實戰을 가장 많이 치렀고 가장 잘 싸운 중견 지휘관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수도사단 18연대 대대장으로서 치러낸 6․25 전투 이야기는 「大隊長」(兵學社. 1980년)이란 책에 실려 있다. 대대장은
兵들과 함께 뒹굴면서 전투를 지휘한다. 약 600명을 거느린 대대장은 격전지에 붙어 직접 전투를 지휘한다. 그만큼 그의 著書에는 전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전 쟁이란 것이 무엇이며 군인들은 전투를 어떤 심리상태에서 하는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가슴 뭉클한 감동과 조직경영에
활용할 만한 지도력 연구 사례도 많이 들어 있다. 이 책은 일반인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장 교들에겐 必讀書의 하나로 꼽힌다. 몇 대목을
인용한다.
『이전의 너는 이미 죽었다』
수도사단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전 성공 이후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북 진하고 있을 때의 단편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오대산 부근의 창촌을 바라보는 어떤 산골에서 나는 행군대열을 멈추고 중 식을 마쳤다. 막 출발하려는데 40代의 촌부 한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동네에 악질적인 부역자 한 사람이 있으니 군에서 처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直訴를 듣고 동네에 들어가 어떤 놈이냐고 물었다. 동네 청년들 이 모여서 30세 가량의 한 사나이를 땅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집단 린치를 加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들을 제지하고 무슨 사유냐고 물었더니 그가 義勇軍(의용군) 징모와 부락민의 監視(감시) 및 密告(밀고) 그리고 곡식의 약탈 등 자기들을 괴롭 혔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 자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니 나에게 맡겨 줄 것을 요구 하고 나를 동행했던 사병들로 하여금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이미 半죽 음 상태에서 보기에도 초라할 정도로 비참한 상태였다.
우리가 부락에서 나오자 부락민들은 그와 우리를 번갈아 지켜보았으며 뭔지
모를 숙연한 공기가 흘렀다.
부대를 출발시키고 나는 그를 데리고 같이 걷기 시작했다. 1km쯤 가서 도로 가 커브를 이루고 부락은 시야에서 떠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작정 어디 까지나 그를 데리고 갈 수도 없어서 이쯤에서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를 도로에 세우고 왜 동네 사람들을 그렇게 못살게 굴었느냐고 따졌 다. 그는 人民軍(인민군)의 강요에 못 이겨 했노라고 극구 변명을 했다. 이 미 죽음을 각오했는지 얼굴은 몹시 창백했으나 비교적 또박또박 대답했다. 共産主義(공산주의)를 알 리도 없고 보기에도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 같은 그의 모습이 하도 가련하고 직접적인 人命殺傷(인명살상)을 한 일이 없음을 감안하여 그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죽고 사는 것은 팔자소관이라 하더라도 생각과 판단착오는 전적으로 너의 잘못이니 너는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권총을 들이댔다. 그는 너무 공포에 질려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얼굴을 지었다. 나는 그의 머리 위를 겨냥한 채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고요한 계곡은 온통 나의 총성이 뒤덮었고 나는 그가 살던 부락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사 격을 했다.
그는 자기가 총에 맞은 줄 알았는지 총성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를 한참 쳐다보다가 혹시 쇼크死로 정말 죽은 것이 아닌가 싶어 일으켜 세 워 보았다. 그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조용히 그에게 『이전의 너는 이미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네가 탄생한 것이니 大韓民國(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길 바라는데 어떠냐 』고 물었더니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면서 회개 와 뉘우침이 엿보였고 『기회를 주신다면 조국을 위해 죽겠습니다』고 하면 서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 헤어졌다>
인간이 인간을 도륙한다는 것
李秉衡 대대는 함경도의 山中에서 중공군 포로들을 붙들었다. 그들은 200명 분의 밥을 해놓고 本隊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李대대장은
이들 본대가 오는 길목에 매복을 하고 기다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간혹 원풍리 쪽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덧 어두움은 시야 를
가렸고 아무런 변화도 보여주지를 않았다. 마음속으로 얼마 있으면 이곳 이 곧 인간을 도살하는 처참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대 가
중국인이어서 그런지 마음은 비교적 가벼웠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지 오래되었고 모두들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들의 運命(운명)을 우
리가 쥐고 있는 듯싶었고 運命이란 과연 이런 것일까 느꼈다. 退路(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배치한 매복부대는 前哨(전초) 역할을 겸하 고
있었다. 전방에서 행군부대의 이동이 감지된다는 첫 보고가 왔다. 얼른 시계를 쳐다보고 매복부대가 500m 정도 추진되어 있으니 10분 후면
이곳에 도착하리라 생각되었다. 최초사격은 대대장이 직접 통제한다는 지시는 이 미 철저하게 시달되어 있었다. 조용히 다시 한번 수류탄과 조명탄을
비롯한 모든 사격준비를 재확인시키면서 긴장을 달랬다.
드디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戰(전), 平時(평시)를 막론하고
행군시 정숙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군에서는 상식인데도 그들의 말소리는 몇 백m씩 들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기습을 할 우리에게는 정말 다
행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며 오니 우 리도 다소 긴장이 풀리는 듯싶었고 행군대열의 길이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보이는 듯싶었다. 어둠이 완전히 시야를 가려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물 체 식별이 뚜렷하지 못했다.
中共軍(중공군)들은 4열 종대로 무언가 지껄이면서 내 앞을 지나서 종대의 선두가 애로의 끝에 도달했다. 과연 중대병력이었다. 나는 주의 깊게 신호 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고요가 드디어 깨지고 말았다. 300정의 小銃(소총) 과 수십 정의 自動火器(자동화기)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고 수류탄과 조명 탄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20~30발의 조명탄은 주위를 대낮같이 밝혔으며 戰鬪(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사거리 30m 죽은 자와 부상자, 엎드린 자의 구별없이 몽땅 다 쓰러지고 말 았다. 生存者(생존자)의 탈출을 염려했으나 조명탄이 너무 밝아서 그럴 여 유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살아 있는 자를 색출해서 포로로 할 것을 지시하 고 그 자리를 떠났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崔秉宇 기자의 휴전 조인식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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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崔秉宇 기자의 휴전 조인식 보도
◈崔秉宇 기자의 휴전 조인식 보도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협정 조인식에 李承晩 대통령은 대 한민국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의 비겁한 기 습남침으로 국토가 난장판이 되고 3년1개월간 피 터지게 싸운 결과는 거의 原位置로의 복귀였다.
李承晩 대통령은 다 이겨놓은 전쟁을 미국이 망쳤 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휴전협정 조인식을
보도한 1953년 7월29일자 조선일보의 사회면 머릿기 사 제목은 「오고야 만 休戰의 날. 統一爭取는 이제부터」였다. 그 아래 에는 「五列봉쇄에
主眼」이란 제목으로 서울 주변의 검문검색 강화 조치가 보도되었다. 원치 않던 휴전은 6․25 전쟁이 이제부터는 모습을 바꾸어 계 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열전에서 냉전으로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한국전쟁. 열전에서 300만명이 죽고, 냉전에선 북한에서 300만명이 餓死의 형태로
戰死했다. 도발은 북한이 먼저 했지만 최종승리는 남한에서 거둘 것임이 거의 확실해진 오늘날, 전쟁 반세기 기념일에 즈음하여 읽어볼 만한 名文이
바로 7월2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에 실린 崔秉宇 기자의 휴전협정 조인식 참관기이다.
단순한 보도 기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순간을 서정적인 수필처럼 잡아내 萬感 이 교차하게 만드는 名文이다. 崔秉宇 기자는 그 뒤 한국일보로 옮겨
대만 해협 위기를 취재하다가 타고 있던 함정이 침몰할 때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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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전쟁의 終幕다운 기이한 장면
<(板門店 調印式場에서 崔秉宇 特派員發) 白晝夢과 같은 11分間의 休戰協定調印式은 모든 것이
象徵的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悲劇的이며 象徵的이 었다. 學敎講堂보다도 넓은 調印式場에 割當된 韓國人 記者席은 둘뿐이었다 . 「유엔」側
記者團만 하여도 約百名이 되고 參戰하지 않은 日本人 記者席 도 十名을 넘는데 休戰會談에 韓國을 公的으로 代表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韓國의 運命은 또 한번 韓國人의 參與없이 決定되 는 것이다.
二十七日 上午十時 正刻 東便入口로부터 「유엔」側 首席代表 「해리슨」 將軍 以下 代表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西便入口로부터 공산측 수석대표 南日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目禮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終幕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배 치된 두 개의 탁자 위에 놓여진 각 18통의 협정문서에 교전쌍방의 대표는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서명을 계속할 뿐이었다. 당구대 같이 퍼런 絨(융)에 덮인 두 개의 탁자 위에는 「유엔」기와 인공기가 둥그런 鍮器基盤(유기기 반)에 꽂혀 있었다. 이 두 개의 旗 너머로 휴전회담 대표는 2년 이상을 두 고 총계 1000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한국어 영 어 중국어의 세 가지 말로 된 협정문서 正本 9통 副本 9통에 각각 서명을 마치면 쌍방의 선임 참모 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으로 준다.
그러면 상대편 대표가 서명한 밑에 이쪽 이름을 서명한다. 丁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의 東翼에는 참전 「유엔」 13개국의 군사대표들이 정 장으로 일렬로 착석하고 있으며 그 뒤에 참모장교와 기자들이 앉아 있다. 西翼에는 북쪽에 괴뢰군 장교들, 남쪽에 제복에 몸을 싼 중공군 장교의 一團이 정연하게 착석하고 있다. 양편의 수석대표는 北面하여 조인하고 멀리 떨어져 좌우에 착석한 양측 장교단은 동서로 대면하고 조인하는 것을 주목 하고 있다.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유엔」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陣地에 쏟고 있는 폭탄의 炸裂音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원수끼 리의 증오에 찬 政略 결혼식은 서로 동석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하듯이, 또 빨리 이 억지로 강요된 의무를 마치고 싶다는 듯이 산문적으로 진행한다. 해리슨 장군과 南日은 쉴새없이 펜을 움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 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劇的 요소도 없이 講和에서 豫期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停戰」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 었다. 각기 자기측 구미에 맞추어 가죽으로 裝幀하고 金字로 표제를 박은 협정부도 각 3권이 퍽 크게 보인다.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 이 울긋불긋 우리의 疆土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이렇게 의아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것밖에 없다 고 순간적으로 自答하였다. 10시12분 정각 조인 작업은 필하였다. 해리슨 장군과 南日은 최후의 서명을 마치자 마치 최후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는 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 버린다. 南日은 훈장을 가슴에 대여섯 개 차고 있 는데 반하여 해리슨 장군은 앞젖힌 여름 군복의 경쾌한 차림이라는 것이 다 를 뿐이었다. 관례적인 합동기념 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것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自答하였다」는 표현은 보도기사에선 좀처럼 쓰지 않는 주관식 記述이다. 그 럼에도 이 귀절이 名文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상황이 객관적 記述의 원칙만 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하고 벅찼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의 무게가 崔기자로 하여금 正道를 벗어나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기 사의 장점이 되고 있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崔南善의 韓國海洋史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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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崔南善의 韓國海洋史 서문
◈崔南善의 韓國海洋史 서문-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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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者
해군본부에서 1954년에 펴낸 「韓國海洋史」는 우리 민족이 바다와 어떤 관 련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다룬 책이다. 해군, 海運(해운), 수산, 造船(조선 ), 무역 등 해양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선 많이 읽히고 인용되며 참고되는 名著이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은 六堂 崔南善이다. 200자 원고지로 약 2 00장 되는 긴 글이다.
이 序文만 읽고 이 책은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잘 쓰여진 글이 란 反證이겠다. 이 서문의 맨 마지막에서 崔南善은 한국인이 해양화의 길을 걸어가야 國運을 개척할 수 있다는 예언적인 충고를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국토의 자연적 약속에 눈을 뜨고 역사적 사명에 정신을 차리고 또 우리 사회의 병들었던 원인을 바로 알고 우리 인민의 살게 될 방향을 옳게 깨달아서 국가민족 百年大計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하는 것 이다. 거기 있어서 우리가 반도국민 臨海국민으로서 잊어버린 바다를 다시 생각하여 잃어버렸던 바다를 도로 찾아서 그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自覺 을 깊이 하고 또 그 가치를 발휘하고 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첫걸음 이요 또 큰일이 된다. 바다를 안고 바다에 서고 바다와 더불어서 우리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今後의 영 광스러운 임무이다. 一望無邊한 남방 大洋을 항하여 불쑥불쑥 내민 반도 南岸의 무수한 팔뚝이 낱낱이 國民意氣의 發揚과 국가경제의 培養上(배양상) 에 보람있게 활동함으로써 우리가 다시 한번 우리 역사를 변모시켜서 우리 민족의 총명과 용감함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 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者가 그일 것이다. 어떻게 한국을 구원하겠느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들기 그것일 것이다. 이 정신을 고취하며 이 사업을 실천함이야말로 가장 근본적 또 영원성의 건 국과업임을 우리는 확신하는 者이다. 경제의 寶庫, 교통의 중심, 문화수입 의 첩경, 물자교류의 大路 내지 국가발전의 원천, 국민훈련의 道場(도량)인 이 바다를 내어놓고 더 큰 기대를 어디다가 부칠 것이냐. 우리는 모름지기 바다를 외워두었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바다를 붙잡음으로써만큼 찾아가지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진실로 引導하기를 옳게 할 것 같으면 일 찍 바다의 위에서 有能有爲한 많은 증거를 보인 우리 국민은 금후에 있어서 도 반드시 이 장단에 크게 춤을 추어서 다함께 救國의 大願을 이룰 것이다> 바다처럼 거창한 스케일 감각을 지닌 崔南善의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을 바 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者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다」고 예언했다. 이 글이 쓰여진 1954년은 戰亂의 폐허 속에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崔南善은 그 현실을 딛고 멀리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貿易立國 시대, 海外개 척時代, 개발연대, 朴正熙와 근대화 주체세력의 등장을 예언․확신하고 있 다. 그는 또 「(바다를 가까이 하도록 자연으로부터 명령받은 한국인이 그 바다를 멀리함으로써, 즉 자연적 약속과 역사적 사명을 배신함으로써 가난 과 文弱에 찌들었던 과오를 청산하고 우리가 외워두었던 그 바다의 기억을 되살려)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들기 하는 일이야말로 영원한 건국사 업」이라고 단정했다.
개방되고 국제화된 방향으로 나라를 改造해 가는 것, 그 일이 나라를 구원 하는 길이란 崔南善의 이 先覺은 오늘도 유효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넓고 넓은 바다의 장단에 맞추어 추는 한민족의 춤!」-이 얼마나 壯大한 상 상력인가.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李洛善의 군사문화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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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李洛善의 군사문화 옹호
◈李洛善의 군사문화 옹호-지식인은 국가를 긍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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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응변의
요행성엔 주도면밀한 계획성으로
통일신라 이후 문민․유교문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쪽을 펴지 못했던 군 사문화의 본격적인 再生은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던 국군의 장교단이 군사혁명으로써 권력을 잡고 우리 역사의 主役으로 등장한 때부 터이다. 미국에 유학하여 先進 조직경영법을 공부했던 이들 장교단은 자부 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지식인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朴正熙, 金鍾泌,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李洛善(당시 최고회의 의장 공보비서관, 육군중령) 같은 이들은 文民的인 지식에 있어서 민간인들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현역 장교가 언론을 통해서 咸錫憲 같은 당대의 論客을 상대로 당당 하게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李洛善 중령이 이 무렵 「最高會議報」에 기고 한 「행동하는 지식인」이란 글에는 군사문화를 옹호하고 지식인들의 위선 과 무능을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5․16 주체세력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한국적 군사문화의 原點을 돌아보는 데 참고가 될 것 같아서 李洛善의 글 중 일부를 뽑아보았다.
<인텔리가 그들의 희박한 지식을 과시할 때 우리 군인은 主見 있는 총명으 로 답할 것이다. 그들이 言術의 기교를 앞세운다면 우리는 근면한 정열과 相殺(상쇄)를 꾀할 것이다. 뇌 조직의 발달에는 건전한 심신을 대치케 하고 개인적 유능에 의한 공격에 대하여는 단체적 협동력의 위력으로 방패 삼을 것이다. 만약에 인텔리가 그들의 유구한 행정적 경험으로 압박한다면 우리 는 짧은 시간 내에 고도로 훈련되고 조직화되고 숙련되고 통일된 기계적인 행정 역량으로 반발할 것이다. 영감적인 재치, 임기응변의 요행성 등으로 견준다면 우리는 假想할 수 있는 각종의 상황에 대비하는 「주도한 계획성 」과 생각하여 평가하고 다시 숙고하고 또다시 평가하여 결론짓는 「반복된 연구가 주는 완전성」의 습성화로 대할 것이다. 문제는 애국심의 색채와 强度(강도)에 의한 국가적 기여의 多少에 차이를 둘 수밖에 없다>
인텔리들이여! 가슴을 열고 국가를 받아들여라
<과거에 군은 많은 비난을 받아 왔고 따라서 군은 비난받는 데 단련이 되어 있다. 문제는 혁명정부가 군인 주동이라는 이유만으로써 유달리 받는 비난 에 관한 것이다. 文尊武卑(문존무비)의 역사적 사조의 철쇄(鐵鎖)에 얽매여 이유 없이 사람과 군인을 구분하려 든다. 인텔리들이 군인과 민간인이 마 치 전혀 색다른 천성을 가진 것인 양 兩者間(양자간)에 특수한 문제에 대한 견해가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위험하고 해로운 허위인 것이다. 영어의 인민(People)이라는 단어의 語源(어원)인 「Populu s」라는 말의 참다운 의미는 고대 로마시대의 武裝軍(무장군)이라는 뜻이다 . 군을 구성하는 개인은 국민 또는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와 인권이라는 정신과 합치되게 무기를 행사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학원 과정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비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지성인의 외침을 들어 보자. 「자유-그것 이 그립거든 그 행사에 책임을 느끼는 습성을 확립하자」 자유-그것이 그립 거든 빈곤이 주는 고통을 연대적으로 느끼는 박애심과 동포애를 확립하자. 혁명정부의 武威(무위) 행사는 「누려서는 안될 자유」를 억압하여 「누려 야 될 자유」를 보호 조장하는 경우와 범위에 한정되며 「필요한 최소한」 을 벗어날까 항상 신경을 쓰고 있다>
<밀폐된 연구실에도 세기의 파동은 파급한다. 인텔리들이여! 가슴을 열어 사회와 민족, 그리고 국가를 받아들여라. 棄兒(기아)가 된 사회, 설사 그가 버림받을 이유가 충만하다 하자. 半(반)부랑자가 된 사회, 걸인과 절도가 된 민족, 瀕死(빈사)의 중태에 빠져 지금 당장에라도 죽을 조국이 길손에 업히어 여러분의 門前(문전)에 다다랐다>
다음은 1963년 동아일보에 실린 咸錫憲 대 李洛善의 紙上論戰 가운데 李洛善이 군사문화와 지식인을 비교하여 쓴 공격적인 대목이다.
<선생님은 군에서 부정 선거에 항거한 일, 整軍(정군)운동, 소위 下剋上(하 극상)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 까닭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해박한 지식을 과시할 때 우리는 主見(주견)있는 총명으로 답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뇌 조 직의 발달을 뽐내신다면 우리는 건전한 心身(심신)으로 맞세우겠습니다. 선 생님이 개인적 재간으로 덤비신다면 우리는 단체적 협동력으로써 막을 겁니 다. 만일에 오랜 경험을 앞세운다면 우리는 오히려 짧은 기간 내에 고도로 훈련되고 조직화되고 숙련되고 기계적인 행정 역량으로 반발할 것이고, 선 생님이 그럴 듯한 종교적인 啓示(계시), 임기응변의 잔꾀로 견주신다면, 우 리는 언제나 생각하고 평가하고 다시 숙고하여 결론짓는, 反復(반복)이 주 는 周到한 계획성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즐겨 돌리시는 혓바 닥 운동이나 자랑으로 하시는 狂筆(광필)에 대해서는 묵묵한 실천으로 답하 렵니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朴正熙의 연설-「철부지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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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의
연설-「철부지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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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아,
머리를 들 수 없구나
朴正熙는 군사 쿠데타의 지휘관답지 않게 부끄럼타고 겸손하며 남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面前에서의 칭찬에 대해서는 계면쩍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무미건조하고 드라마틱한 점이 없다. 호탕한 말로써 座中을 휘 어잡고 才談을 잘하는 것을 말 잘한다고 한다면 그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
들 축에 든다. 朴正熙의 글은 다르다. 간결 투박하게 핵심을 파고 든다. 꾸 밈이 없는 것만큼 믿음직하다. 그런 점에서 朴正熙는 「말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글의 인간」이었다.
1934년 5월 朴正熙는 만 17세. 대구사범 3학년 학생이던 그는 금강산에 수 학여행을 갔다
온 소감을 이렇게 썼다. 친구 李貞粲이 만든 스탬프集에 써 넣은 것이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 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여 너와 함께 天下에 찬란하게…>
금강산의 경치를 보면서도 그 경치에 취하지 않고 조국의 현실을 생각한 문 제의식. 이 글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最古의 朴正熙 글이다. 2년 뒤 「대구사범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5학년생 朴正熙의 大自然이란 제목의 詩가 있다. 일본어로 쓰여진 것을 번역하면 이렇다.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황야의 한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 는/이름없는 한송이 들꽃이/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태양을 등 에 지고 大地를 일구는 농부가/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느긋하 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서민의 人情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
들꽃과 농부를 장미․귀부인․영웅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朴正熙의 소 박성이 더욱 잘 드러난 문장은 1963년에 나온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맨 끝 부분이다.
<경상북도 선산군, 이곳이 본인이 태어난 곳이다. 20여 년간의 군대생활, 그리고 소년 시절에도 본인은
자립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환경이 본인으로 하 여금 깨우쳐준 바
많았고, 결의를 굳게 하여주기도 하였다. 이같이 「가난 」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 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生理(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 를 부정하고 君臨社會(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 이라 생각된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 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서민의 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 朴正熙의 최후 모습에 대해 서는 이런 진술이 있다.
절명한 뒤 金桂元 비서실장에게 업혀 軍병원으로 온 朴대통령을 맡았던 군 의관 정규형 대위는 合搜部(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 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수사기록에서 인용).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치 중 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 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 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朴正熙가 쓰고 말한 것들을 많이 읽어본 기자로서는 「국가와 혁명과 나」 의
머리말 중 앞부분이 가장 박정희적 文章이라 생각한다. 민족 전체가 다 같이 가난에서 헤어나 보자는 그의 간절한, 求道者的인 집념이 잘 서려 있
기 때문이다.
<1963년 7월 하순. 폭우가 쏟아지는 夜半 0시. 그때 나는 서재의 一隅(일우 )에 앉아 붓을 멈추고, 멍하니 비에 젖어가는 밤의 街路를 내다보고 있었다 . 문득 저 거리로 뛰어나가, 내 재주로 저 비를 막거나, 아니면 저 비 때문 에 수없이 울고 있을 동포와 더불어, 이 밤을 지새워보고 싶은 격정을 느꼈 다. 오천년을 하루같이 시달려온, 이 피곤한 민족이 모처럼 일어서려는 비 장한 마당에, 다시금 하늘은 시련을 내리다니-. 그러나 우리는 일어서야 했 고, 이 고비를 싸워 넘어서야 했다(下略)>
朴正熙 대통령의 1965년 5월2일 연설은 진해 제4비료공장 준공식 致辭이다 . 이 연설녹음을 듣고 있으면 젊은 대통령(당시 48세)의 분노와 稚氣(치기 )를 느낄 수 있다. 연설은 중간에서 엇길로 나아가 준공식과 관계 없는 대 목, 한일회담 반대 시위 학생들에 대한 직격탄으로 변한다. 『오늘 이 자리 에 학생들도 좀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내 좀더 얘기를 하려 합니다』라면서 쏟아붓는 말은 준비되지 않는 연설이므로 그만큼 솔직하고 진실되게 들린 다. 녹음테이프를 들으면 朴대통령이 주먹으로 단상을 쾅쾅 치는 소리도 들 린다. 名文의 한 조건은 솔직함인데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 연설의 그 부분 을 추천하는 것이다.
「철부지 학생들에게」
<지금 흔히 우리나라 國民들 가운데 政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잔 소리를 많이 합니다. 무슨 工場을 만든다는데 거기에 不正이
있었다. 무슨 挾雜이 있었다. 무슨 「댐」을 만들었는데 무엇이 잘되었다 못되었다 등. 물론 政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잘못이 있을 때 國民
여러분들이 비판해 주 시고, 忠告를 해 주시고, 질책을 해 주신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는 얼마든지 달갑게 받을 그러한 아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中略)
책임 없는 사람들이 제각기 무책임한 소리로 뭐라고 떠든다고 해서 정부가 무슨 부정을 하지 않느냐, 협잡을 하지 않느냐,
또는 요즈음에 언론기관에 서 책임 없는 사람들이 신문이나 언론기관에 무책임한 소리를 했다 해서 이 것이 정말 사실인 양 해가지고 부화뇌동하는
이러한 경솔한 행동을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 우리는 확실히 못사는 국민이다. 뒤떨어져 있는 국민이다. 후진국 사람이다 .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다른 선진국가에 못지 않게끔 우리도 自力으로써 自立해서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잘살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되겠다는 그러한 꿈과 우리의 自信과 그러한 勇氣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든지 남한테 원조를 받아야 되고 남한테 동냥을 해야 되 고 남한테 얻어 먹어야 산다는 그런 「거지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우리 는 또 해봐도 안된다 하는 이러한 용기와 자신이 없는 국민이라면, 영원히 우리는 自立할 수 없는 것입니다.(中略)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분들의 정부인 것입니다. 대통령은 여러 분들이 뽑은 대통령이요, 정부는 여러분이 세운 정부인 것입니다. 과거 일제시대에 우리가 일제와 싸우던 것과 마찬가지인 정신자세, 즉 왜적 이 와서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우리가 남의 노예가 되어 있 을 때 우리가 일제에 대항하던 이러한 정신자세는 (이제는) 근본적으로 뜯 어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中略)
한 이틀 전에, 어떤 대학의 교수가 나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다가 한일회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나서 『선생님, 저는 한일회담을 결코 반대합니다』 하고 상당히 흥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학 생에게 다시 묻기를 『그러면 너는 어떤 점이 반대냐』 『저는 다른 건 모 르지만 旗國主義는 절대반대입니다』 『그래, 그런 자네 旗國主義란 무엇인 가』 『저는 旗國主義가 무엇인가 모르지만 모두 旗國主義가 나쁘다고 하기 때문에 저는 旗國主義만은 결사반대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의 지식층들 가운데, 인텔리들 가운데는, 政府가 하는 일은 無條件 반대해야만 그 사람 아주 인텔리고 지식인이고 애국자然(연)합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그네가 아무리 생각해도 옳다 옳다고 여럿이 있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가는 저 사람은 정부에 아부하는 사람이며, 소위 요즘 말하는 사쿠라요, 저 사람은 무슨 정부의 앞잡이다 하는 이런 식으로는 우리 한국 의 근대화라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학생들도 좀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내 좀더 얘기를 하려 합 니다. 학생들! 지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뭐라고 떠들면 내용도 모르고 덮 어놓고 거리에 나와서 플래카드를 들고, 무슨 학교에서 성토대회도 하고,
『무슨 정부 물러가라, 매국하는 정부 물러가라』 하는 등 이러한 철없는 짓도 하는데, 나는 학생 제군들에게 솔직히 이 자리에서 얘기해 두거니와, 제군들이 앞으로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자면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후에 라야만 제군들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제군들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때에는 우리들 기성세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여러분들 못지않게 나라에 대한 것을 걱정을 하고 근심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분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학생 여러분들을 무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도 여러분들과 같이 한 20代 젊은 시절 학생시절의 생각을 해보건대,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공부를 하고 배워야 되고, 모든 것을 수양해야 되고 자기의 실력을 배양해 야 되고, 여러분들이 직접 정부가 하는 일,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를 낱낱이 직접 간섭하거나 여기에 참여하거나 직접 행동에 옮길 그런 시기 도 아니고 또 그런 것이 여러분들의 책임이 아닌 것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4․19 정신을 운운하고 뛰어나옵니다. 여러분들의 선 배가 4․19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뛰어나 온 그 정신은 그야말로 백년에 한번 수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런 숭 고한 정신입니다.
어떠한 사소한 정치적인 문제가 국회나 사회에서 논의될 때에 그 문제 하나 하나를 들고 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서 그것이 4․19 정신이라고 떠든다 면, 그야말로 4․19 정신을 그 이상 더 모독하는 무엇이 없을뿐더러 4․19 정신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년 연말에 내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 대통령 뤼브케氏가 제일 첫날 저녁에 나를 만나서 한 얘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왜 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 정치문제에 대해서 자꾸 干涉(간 섭)하길 좋아합니까?』
나한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나는 다소 창피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한국의 학생들은 일부 그 런 학생도 있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다 건실하고, 거리에 나와서 하는 것은 일부 학생들이다. 당신의 나라에도 그런 학생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 냐』고 답변을 하였더니, 뤼브케 대통령이 하는 말이 『내가 알기에는 학생 들이 거리에 나와서 정치문제를 가지고 데모를 하고 떠드는 나라치고 잘 되 는 나라가 없습니다』
나보고 이렇게 얘기합디다. 자기 나라 독일은 1차 대전 이후 그동안에 전쟁을 두 번 했고 정권이 몇 번 바뀌고 사회에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지만, 1919年에 한번 함부르크港에서 미국 배와 독일 배가 충돌했을 때 학생 데모 사건이 있은 연후에는 그 뒤 에 학생들은 한번도 거리에 나온 일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들은 이 시기에는 공부를 해가지고 배우는 시간이고 실력을 양성해 둘 시간 이지, 자기들이 직접 이런 일에 참여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의 학생들은 거리에 나오기를 좋아합니까?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떠든다고 해서 나는 절대로 그 사람들이 애국적인 학생이라고 보지 는 않습니다.
혹 대통령이 이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일부 학생들이 불만을 품을지 모르지 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한국의 일부 철부지한 학생들에게 확실히 해둡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한일문제를 가지고 거리에 나와서 떠든다는 것은 그야말 로 일부 정치인들의 앞잡이 노릇밖에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됩니다. 한일회담의 내용이 어떻게 됐는지, 어떤 점이 지금 여야간에 싸우고 있는 쟁점인지 내용이라도 알고 떠들어야지, 덮어놓고 뭐라고 요즘에 바깥 세상 이 뒤숭숭하니까 학생들이 거리에 좀 나서서 기분풀기 위해서 나가보자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이 만약 있다면, 이것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 조국의 앞날을 위해서 대단히 걱정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後略)>
『데모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기자가 처음으로 朴대통령이 존경스러워졌던 것은 1965년 8월25일 「학생 데모에 대한 특별담화문」 방송을 라디오로 들었을 때였다. 당시
대학 1학 년생이던 필자는 『데모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 서 이 시각부터는 철저하게 단호히 단속할 것을 선언한다』는
朴대통령의 카랑카랑한 금속성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 이런 사람이 바로 지도자이구 나』하는 感想이 들었다. 이 연설은 歷代 어느 대통령도
사용하지 않은 단 어를 동원하여 격식을 무시한 채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경고하고 다짐한다. 民選 대통령이란 자신감과 패기를 바탕으로 한 이런
생동하는 語法은 197 2년 이후의 유신시대에는 거의 사라진다.
<공부하기 싫고 시험치기 싫어서 한일회담 반대를 핑계삼아 선량한
학생까 지 폭력으로 협박하여 거리로 끌고 나오는 이러한 무법과 폭력이 횡행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불한학생들은 言必稱(언필칭)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고 학원의 자치를 운운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니냐? 이러한 부조리가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깡패 정치에 抗拒(항거)하여 그것을 무찌른
학생들이 바로 그 깡패의 위치에 대신 들어서서 불법과 파괴를 일삼음으로써 사회의 빈축 을 사고 있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개인이나 학교의 조그마한 자존심 때문에, 他(타)학교가 데모를 했으니 까 우리도 안하면 학교의 名譽(명예)가 손상된다, 지난번에는 어느 학교가 먼저 했으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해야 체면이 선다 운운하는 이 따위 사고방식이 과연 지성인을 자부하는 학생들이 할 행동이라고 보십니까? 또 교직자들은 어떻습니까?
학생 데모를 英雄視(영웅시)하고 그들을 煽動(선동)함으로써 자기가 立身出世(입신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機會主義者(기회 주의자), 학생의 주장에 아부하고 그 감정에 迎合(영합)하여 값싼 인기를 얻지 않고서는 자기의 무식과 무능을 감출 수 없는
似以非學者(사이비학자 ), 신분이 보장됨을 奇貨(기화)로 삼아 책임도 지지 못할 妄言(망언)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무책임한 학자, 이러한 엉터리
학자가 제거되지 않는 한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민주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도되어야 할 학생, 제거되어야 할 교직자,
掃蕩(소탕)되어야 할 정치인, 이들의 수는 엄격히 따져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흐리는 것은
언제나 이 極少數(극 소수)의 일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대다수 학생, 대다수 정치인 그리고 대다수 교직자의 명예를
추락시키 고, 크게는 국가 민족의 정상적인 발전을 沮害(저해)하는 이 일부 암적 존 재를 뿌리뽑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講究(강구)할
것입니다. 한 정권의 운명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민주 한국의 百年大計(백년대계)를 위 해서, 조국의 근대화 작업을 完遂(완수)하기 위해서, 또
정권의 평화적 교 체라는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서, 데모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大小(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데모를 이
담화를 발표하는 이 시각부터는 철저하게 단호히 단속할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吳之湖
화백의 한글전용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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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吳之湖 화백의 한글전용 비판
◈吳之湖 화백의 한글전용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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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용은
언어의 암호화 초래
吳之湖 화백이 1971년에 쓴 「國語에 대한 重大한 오해」란 70쪽 남짓한 소 책자는 67세에 쓴 글답지 않게 힘있는 내용이다. 筆力은 體力이기도 한데 그(1982년에 작고)의 글은 대단한 기백을 느끼게 한다. 그 힘은 그의 울분 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다섯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다만 몇 사람 한글주의자의 그릇 된 애국심이 禍가 되어 지금 이 時刻, 한민족의 아들 딸들 모두가 일제히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이 무서운 현실을 보다 못하여 나는 여기 또다시 이 글을 草하는 것이다>
이 글은 한글전용론의 허구성을 언어학적으로, 또 문명사의 입장에서 정확 히 지적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한글전용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강력한 논리의 무기를 갖게 된다. 吳之湖는 우리 國語가 한글로 표기될 수 있는 바람, 눈물, 하늘 같은 固有語와 주로 고급 개념어가 많은 漢字語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실히 하여 한자가 결코 외국어가 아니라 국어의 일부임 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한글로써는 한자의 발음부호를 달 수는 있지만 뜻 을 제대로 전할 수 없으므로 한자의 도움을 받지 않은 國語는 언어가 아닌 소리, 또는 암호화한다고 밝힌다.
<국어에 있어서의 고유어와 한자어와의 관계는 척추동물에 있어서의 근육과 骨格과의 관계와 같다. 우리말은 한자어라는 골격을 얻음으로써 軟體동물 에서 척추동물로 진화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말에서 한자어를 제거하 자는 말은 우리 몸에서 척추를 제거하자는 말과 같다>
吳之湖는 우리 낱말 가운데 70%나 되는 한자어의 약 80%는 異義同音語이기 때문에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는 그 뜻을 외울 수 없어 언어가 아니라 소리 로 전락한다고 주장한다. 吳之湖씨의 글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통계의 적절 한 활용 덕분이다. 기자는 통계는 가장 짧은 名文이라는 소신을 펴고 있다 . 吳씨는 「우리나라의 한자 字典엔 한자음이 480여 개가 있다. 이 자전에 수록된 한자가 1만3000여 字이니 1音 평균 30자 가까운 異義同音字가 있는 셈이 된다」고 썼다.
漢字의 위대성 강조
기자는 서울 종로 1가를 지나가다가 한 음식점의 간판에 「가연」이라 쓰여 진 것을 보았다.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뜻을 알 수는 없으니 이건 말이 아니 라 소리이다. 「佳緣」의 한글표기인 것 같은데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이 처럼 읽어서 그 의미가 그 자리에서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는 언어는 암호이 든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吳之湖씨의 되풀이되는 주장이다. 한글의 한 계를 분명히 한 吳之湖씨는 한자의 위대성을 강조한다. 「漢字造語의 만능 성」이란 대목에서 吳씨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한자로는 이것을 완전무결하게 바꿔놓을 수 있다. Philosophy를 哲學, Sociology를 社會學, Ethics를 倫理學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번역된 언어가 原語보다도 오히려 더 정확하게 그 語彙가 갖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더 분명히 말하면, 언어 자체가 바로 그 언어의 定義다. 그런 까닭으로, 한자어휘는 漢字만 알면 물을 필요도 없고 , 배울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한자는 1. 그 의미의 정확성에 있어, 2. 그 意味解得의 자동성에 있어, 3. 그 의미 인식의 신속성에 있어, 4. 소수의 문자로 다수의 언어를 만들 수 있다는 그 경제성에 있어 인간이 문자에게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여준 文字다>
吳씨는 한자가 배우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도 異義를 제기한다. <영어는 우리나라에 있어 대학입시를 치르려면 단어 5000개는 알아야 하고 歐美에 있어서 사회생활을 하자면 최소한 단어 1만개가 필요하고 학술을 연구하자면 단어 3,4만개는 있어야 하는데 한자는 3000자 정도만 알면 족하다> 그 이유는 한자의 거의 무제한 造語 능력이란 것이다. 그는 「漢字 3000자 를 알게 되면 서로 연결하여 60만 자를 不學而解(불학이해․배우지 않아도 안다)하게 된다」는 것이다. 吳씨는 한글전용을 주장한 정부가 人口調査라 고 하면 될 것을 「센서스」라고 쓰고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식민지가 인 구조사 결과를 미국이나 俄羅斯에게 보고하려고 만든 것이면 모르되 국민들 절대다수가 모르는 외국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 底意가 奈邊(나변)에 있는 것인가.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대사상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주체사상이라는 말인가?」라고 痛駁(통박)했다. 한자어를 추방한 그 자리 에다가 영어를 가져와 쓰고 있는 오늘날의 허구적인 한글전용을 예언한 말 이기도 하다. 이 소책자의 결론 부분에는 어두운 예언이 실려 있다. 이 대 목을 기자는 稀代의 명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한자가 깨끗이 소멸한 다음에는 어떤 사태가 惹起될 것인가. 1. 少數의 특수 지식인을 제외한 일반 국민은 언어능력의 원시화에 의한 사 고능력의 퇴화로 말미암아 국민의 정신상태는 한자 수입 이전의 저급한 단 계로 환원될 것이다. 젊은 세대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사태가 이미 진행중 에 있다.
2. 학술을 연구하는 자는 필리핀이나 인도처럼 순전히 유럽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은 白人化한 소수의 지식귀족과 한글밖에 모르는 다수의 원주민 低知識族의 두 가지 계층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3. 우리의 민족문화는 黃人文明의 일환으로서 한자와 한자어를 바탕으로 생 성하고 발전되어 왔다. 우리는 한자를 없앰으로써 이 강토에서 수천년 동안 連綿히 계속되어 온 우리의 고유문화는 그 전통이 단절될 것이다. 그 불가 피한 결과로 국민의 생활감정과 사고방식은 외형적, 또 말초적 면에서 歐美化할 것이다.
4. 아시아대륙의 10억의 황인종이 향유하고 있는 동양문화권으로부터 스스 로 이탈함으로써 한민족은 天涯無依의 문화적 고아가 될 것이다> 29년 전 吳之湖 화백의 예언은 상당 부분 적중하여 지금 우리 눈앞에서 진 행중에 있다. 최고의 名文은 그 내용의 예언적인 능력으로 더욱 빛난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李御寧의 「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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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李御寧의 「벽을 넘어서」
◈李御寧의 「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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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도
名文
名文이 꼭 길어야 하는 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짧을수록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申翼熙 대통령 후 보를 내세워 자유당의 李承晩 대통령에 도전했을 때의 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정치구호 가운데 지금껏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기자는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구호 「벽을 넘어서」, 역시 1980년대 우리의 耳目을 집중시켰던 서울올림픽 구호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1970년대의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 그리고 1990년대를 대 표하는 朝鮮日報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구호, 1960년 대의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를 , 시대정신을 담은 명문으로 꼽는다.
이들 구호는 구호로만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을 憤起시켜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역사를 굴러가게 만들었다. 인간의 실천을 유도한 구호들인 것이 다. 이들 명문 구호는 예언적인 면도 갖추고 있다. 서울올림픽은 세계를 서 울로 불러들여 서울을 세계로 알렸다. 이 올림픽은 또 인종과 종교와 이념 의 「벽을 넘어서」 동서화합을 달성했고 그 1년 뒤엔 드디어 베를린 장벽 을 무너뜨리는 한 계기가 되었다.
베를린 장벽과 동구권 붕괴의 동력원이었던 시위 현장에서 데모송으로 울려 퍼진 노래가 서울올림픽의 주제가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였다.
이 노 래 가사 가운데 있는 「브레이킹 다운 더 월」(Breaking down the wall)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그 현장에서
울려퍼졌다. 코리아나 그룹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동양인이 부른 노래 가운데서 가장 많이 팔린 노래가 된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1990년 4월 체코 무용단이 金日成 생일에 맞추어 평양에 가서 공연할 때 배경음악으로 연주되었고, 金日成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주제가는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주제가를 작곡했던 조지 모로데가 작곡하 고 토머스 R 휘트록이 작사했다. 국내에선 주제가는 한국인
작곡가가 맡아 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朴世直 조직위원장이 『우리 취향이 아니라 손 님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세계 일류 작곡가 작사가를
고른 것이 적중 했다.
언어가 역사의 動力
원래 서울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좀 딱딱한 이 개념을 개 ․폐회식의 기본철학으로 구체화시키면서 아주 역동적인 「벽을
넘어서」란 말로 풀어놓은 것은 개․폐회식 상임위원 李御寧 교수였다.
역대 올림픽 개회식 가운데서도 最高로 꼽히는 서울올림픽의 개회식은
「벽 을 넘어서」란 분명한 주제의식으로써 모든 공연과 상징과 동작을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기 때문에 그토록 힘찼고 예언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 언어가 바로 역사의 動力이란 것을 실감케 한 구호였다.
문장력은 어떤 조직의 정신력과 교양, 그리고 총체적인 실력을 나타낼 때가 많다. 서울올림픽 이후에 한국에서 있었던 큰 행사, 예컨대 1993년의 대전 엑스포나 2000년 1월1일 0시의 광화문 축제는 추억이 될 만한 구호도 명문 도 그리고 이미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올림픽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명 문이 없었기에 명작도 없었던 것인가.
李御寧 교수는 「벽을 넘어서」란 명문을 만들어낸 서울올림픽 준비과정에 대해서 이런 감회를 밝힌 적이 있다.
『단군 이래로 춤추는 사람, 철학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 음악인 등등이 이렇게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 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인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 인이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은 서로의 능력을 보태준 것이 아니라 서로 깎아내렸기 때문이지요. 부정적 思考를 가진 사람들의 논리는 질서정연한데 , 된다는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래서 안된다는 사람이 지식인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안된다는 쪽보다는 좀 구름잡는 얘기 같아도 된 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지요』
써놓고 보니 이 말 또한 名文이다. 서울올림픽 성공의 한 요인은 군사문화 를 대표하는 朴世直 조직위원장(육군소장 출신)의 추진력과 文民을 대표하 는 지식인 李御寧 교수의 만남과 협력이다. 朴世直 위원장은 부하직원들의 관료주의나 무사안일, 그리고 반발을 눌러가면서 李御寧 교수의 천재적이 고 때론 기발한 상상력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지식인의 꿈 과 군인의 힘이 빚어낸 文武의 합작품이 바로 서울올림픽이었던 것이다. 이 성공비결은 많은 암시와 예언을 담고 있다. 理와 氣, 武와 文, 정신과 육체, 명분과 실제 같은 상반된 요소를 어떻게 통합하고 조화시키느냐, 여 기에 우리 사회의 발전과 퇴보가 달려 있다는 암시이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金賢姬와 申相玉의 名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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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History, 북한의 Hi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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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賢姬의
名言
『남한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치고 북한에선 히즈 스토리(His St ory)를 가르친다』
이 말은 대한항공 폭파범
金賢姬가 1989년 기자에게 한 말이다. 남한의 교과서를 읽고 밝힌 소감이다. 기자가 金賢姬를 최초로 인터뷰하면서 놀란 것 은 우리 역사에 대한
그녀의 무식과 金日成 家系 역사에 대한 有識이었다. 반대로 그녀가 나에 대해서 놀란 것은 북한의 실정에 대한 고참 기자의 無識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史實도 남한에 와 서야 알았다. 金庾信, 王建, 李成桂도 몰랐다. 「金日成 父子 이외에 인민 들이 감동할
만한 역사적 인물을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北 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히스토리」가 아니라 金日成 그의 이야기, 즉 「히 즈
스토리」일 뿐이란 것이었다. 金賢姬는 日蝕, 月蝕의 의미도 몰랐다. 그 녀는 『우주의 신비를 가르쳐주면 金日成이가 죽으니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민을 무식하게 만들어놓고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기자가 북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金賢姬와 닷새 간 인터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기자가 북한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고 무식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정부측에서 알려온 북한의 실상이 거의 사실 이란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金日成은 金賢姬의 하느님이며 북 한정권은 근대국가라기보다는 그 본질이 神政體制의 종교집단이란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시각으로 북한을 분석하니 적중률이 높았다.
金賢姬가 마지막 본 機內의 노동자들
金賢姬가 죽인 사람들은 북한정권의 적인 자본가 계급도 아니고 「민족의 원쑤」도 아닌 노동자들이었다. 그것도 2~3년간 가족과 헤어져 中東 건설현 장에서 고생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었다.金賢姬는 안기부 수사관 앞에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진술했다.
『바그다드 출발 KAL 858기에 올라 김승일이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폭약이 들어 있는 비닐 쇼핑 백을 좌석 위 선반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보고 사업결과 총화시 보고할 목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탑승객은 100여 명 정도 되는데 거의가 중동 근로자들로서, 중동에서 일하기가 힘들 다면서 소속 회사에 대한 불만을 많이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귀국하 는 것이 좋은지 즐거워하다가 機內食이 끝난 뒤에는 거의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부다비에 도착하여 내릴 때, 이 근로자들이 죽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적으 로 양심의 가책이 왔습니다만 金日成이 지시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마음먹고 내렸습니다』
이 폭탄이 미얀마 근해 상공 11km에서 터짐으로써 115명이 죽었다. 1987년 11월29일 일어난 이 폭파사건은 金正日의 지시에 의해서 서울올림픽 을 저지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정부는 남북한 정상회담에서도 이 테 러사건의 책임문제를 제기할 것 같지 않고, 미국에 대해선 북한에 대한 경 제봉쇄를 완화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이유 가운데 중요한 사건은 1983년 10월의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 폭파이다. 우리 정부는 이 두 사건이 외국 정부의 수사(바레인과 미얀마)에 의해서 북 한 정권의 테러로 밝혀졌음을 강조하면서 북한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고 많은 우방국들이 동조해 주었다.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정 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사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自國民 132명을 죽인 북한 정권의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면 국가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태이다
申相玉의 마적단論
『그들은 마적단이죠』
申相玉 감독은 아주 쉽게 설명했다. 申相玉․崔銀姬 부부는 金正日의 직접 지시에 의해 납치된 다음(申감독 부부가 녹음해 온 테이프엔 金正日이 두 사람을 납치했다고 고백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金正日의 비호 속에서 영 화를 만들고 金正日 측근들의 해괴한 파티에도 참석하여 북한 지배집단의 행태를 목격했다. 그들이 녹음해 온 金正日의 육성은 그를 연구하는 데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자료였다. 기자는 1989년 申감독에게 물었다.
『인민들을 그렇게 굶겨놓고서는 호화방탕한 변태적인 파티를 벌이는 지배 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들은 마적단이에요. 북한을 노획한 마을쯤으로 생각하지 주민들의 참상 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없어요』
인간의 심리를 간파하는 데 뛰어난 申감독의 이 한 마디는 몇 권의 책보다 도 金正日 정권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인민들에 대한
동정심 을 전혀 느껴볼 수 없는 金正日 정권의 마적단적 속성은 그 뒤 자신의 안녕 을 위해서 300만명이 굶어죽는 것을 방치한 행태에서 사실로
입증되었다.
농업기술자 李佑泓의 예언적인 북한 관찰
1989년 동구 공산주의가 최후의 호흡을 몰아쉬고 있을 무렵, 기자는 金賢姬 와 申相玉에 이어 아주 훌륭한 引導者를 만나 北韓을 탐험하고
있었다. 19 89년 8월에 新紀元社에서 펴낸 「元山農大 講師가 본 實像-北韓 四年 體驗的 報告」란 딱딱한 제목의 이 책을 쓴 이는 재일동포
李佑泓. 농업기술자 인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인민생활의 향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원산농대에 특수온실 농법을
연구하는 시설을 私財 로 지어 1980년대의 4년간 운영해 본 뒤의 절망 체험을 기술자의 꼼꼼한 필 체로 기록했다. 정직한 老기술자의 분노와
한탄이 스며 있지만 이 책은 아 주 냉정하고 실증적으로 북한 농업과 공업, 그리고 거대한 工事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공화국에서
보통 사용되고 있는 못은 두꺼운 철판을 길이 약 10㎝ 정도로 잘라낸 것이다. 그 끝은 가늘고 머리 부분은 L자 모양으로 구부려서 못 비 슷하게
만들어놓았는데, 우리나라의 이조시대나 일본의 에도시대에 사용된 것과 같은 못이었다. 박물관 같은 데 전시해 두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실 용적인
물건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원산농대의 백 副학장에 게 다시 보통 못을 소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자 그런 못은 『우리 나
라에서는 귀중품이기 때문에 신청해서 배급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대로 했지만 나한테 대한 못 배급은 실현되지 않아, 나
는 도리없이 개인적으로 일본으로 수배를 해 보내주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李佑泓씨는 金日成의 교시로 북한 全域에 걸쳐 이루어진, 산기슭에
다락밭 만들기가 산림 황폐, 토사 유출, 河床 상승, 홍수, 댐에 토사 축적, 水力 발전의 마비 등의 연쇄 반응을 유발하여 북한농업을 망치고
있다고 진단했 다. 이 진단은 1995년의 대홍수와 그 뒤의 飢饉사태를 정확히 예언한 것이 다. 李씨의 책을 읽으면서 기자는 북한사람들은
부지런하다는 선입감이 엉 터리임을 깨달았다.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북한사람들의 수동적 태도, 나태, 이로 인한 생산성의 低下에 대해 李씨는 자세하게 쓰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 생산제도에선 절 대로 부지런한 人間像이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電壓이 고르지 않아 電氣器機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현실, 放水路가 없는 댐, 사과를 자갈처럼 수송하는 기차, 송․배전선 地下매몰의 부작용, 허위보고의 습관화 등 李씨 가 지적하는 사례는 모두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책만큼 일찍이 북한체제의 붕괴를 과학적으로 예언한 글은 없었다. 무미 건조한 글일 수밖에 없는 보고서 간간이 스며 나오는 한탄과 분노는 읽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그런 생각은 자연히 金日成 부자에 대한 책 임 추궁으로 연결된다. 著者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 는 父子 두 명의 천재적 지도자가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공화국의 인민대 중이 매일 空腹을 채우기 위해 먹고 있는 옥수수밥이나 죽이 어떤 맛인지도 내 입으로 맛볼 수 있었다」고 했다.
기자에게 있어서 金賢姬, 申相玉, 李佑泓씨의 체험기와 증언은 北韓과 그 지배층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1991년 1월호 月刊朝鮮 부록 「북한, 그 충격의 실상 - 살아본 사람과 가본 사람의 이야기」는 月刊朝鮮의 事實主義的 對北 접근법에 근거하여 쓰여진 책이었다. 이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 어 講談社에서 출판되었고 지금까지도 북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古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의 産婆 역할을 한 분들이 위의 3人인 것이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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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예언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예언:조선인은 조선을 떠나야 위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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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의 감동
<1894년 겨울, 내가 막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관심을 가진 많은 친구들은 한국의 위치에 대해 과감한 추측들을 했다. 한국은 적도에 있다, 아니다, 지중해에 있다, 아니 흑해에 있다 하는 식의 별의별 말들이었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번역, 살림)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1832년 영국 요크샤州 보로브릿지 홀에서 출생 했다. 23세 때부터 작가이자 지리학자로 활동했다. 1904년에 사망할 때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조사하고 연구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 영국 여성들의 우상적 존재였다. 그녀는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다. 11개월간은 한국과 한국인들이 이주한 시베리아 지 방까지 찾아가는 답사여행을 했다.
버드 여사가 돌아가서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 ours)은 1898년에 나왔고 미국에서도 출판되었다. 11판까지 찍었다고 한다 . 머리글에서 버드 여사는 「나는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내가 여행 한 나라들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곧 청일 전쟁 동안 한국의 운명들을 깨달으면서 이 나라에 대해 참으로 강렬한 흥미 를 갖게 되었다. 또 시베리아의 러시아 정부 아래 있는 한국인 이주자들의 현황을 보았을 때 나는 미래에 있을 이 나라의 더욱 큰 가능성에 대해 눈 을 크게 뜨게 되었다. 한국에 머무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이 나라가 처음에 안겨주는 찝찝한 인상들을 잊어 버리게 할 만큼 강렬한 매력을 지 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썼다.
버드 여사는 이 책의 맨 마지막 文段에서 한국을 떠날 때의 기분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 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 스러운 한국의 겨울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 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영국 정부의 작은기선인 상 하이行 헨릭 호를 타고 무자비하고 엄혹한 북풍에 실려 제물포를 떠났다. 헨릭 호가 강 위로 천천히 증기를 발산하며 움직일 때, 예스러워 흥취 있는 한국의 國旗(국기)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의문들을 자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도 서울에 살면서 사람들의 무례함과 도시의 번잡함에 짜증내어 온 많은 서양인들이 떠날 때는 100년 전 버드 여사가 느꼈던 식의 아쉬움을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첫인상과 마지막 인상 사이의 이런 괴리는 아마도 한국인들의 人情과 재미있는 성품, 즉 한마디로 定義할 수 없는 생 동하고 이중적인 면에 매료된 때문일 것이다.
시베리아 한국인의 놀라운 가능성
비숍의 취재기는 기자와 작가의 능력을 겸비한 결과물이다. 100년 전의 한 국인 모습을 이 책만큼 사실적으로, 또 사례 중심으로 생생하게 전해 주는 책은 달리 없다. 철저한 체험과 관찰 및 실증주의에 기초한 위대한 기록정 신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사실을 기초로 한 분석과 예언이니 만큼 신뢰가 가는 것이다. 그녀가 한국의 절망적인 수탈구조를 고발할 때는 분노와 동정 을 동시에 표출한다.
「艱難(간난)에 견딜 줄 아는 강인하고 공손한 민족이 살고 있고, 거지 같 은 극빈계층도 없으며 풍요한 연안 자원도 있는」 한국의 잠재력이 관공서 의 부패와 부정으로 해서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데 대해서 비숍은 안타까워 한다. 그녀는 한국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제도의 문제로 본 것이다. 민중속 으로 깊게 들어가 본 비숍은 점차 한국민이 가진 저력을 깨닫게 된다. <불행히도 한국 국민의 잠재된 에너지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산층이 진 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 않다. 중산층이 그들의 에너지를 쏟을 숙련된 직업이 없다.
한국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不在(부 재), 모든 벌이의 불안정, 대부분의 동양 정부가 기반하고 있는 가장 나쁜 전통인 非(비)개혁적인 정책 수행,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 , 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 가장 타락한 제국 중 의 한 국가와의 가까운 동맹, 흥미 있는 외국인들의 서로의 질투, 그리고 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미신, 자원 없고 음울 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국의 첫인상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한국의 바다에 땅에 가난에 견딜 수 있는 국민 속에 있음을 보았다.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단지 두 계급, 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5분의 4인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시베리아 韓人들의 의연함
비숍은 한국인들이 이주해 가서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遠東(원동 )지방의 한국인 정착촌도 방문했다. 여기서 비숍은 새로운 한국인을 만난다. <나는 여행자들이 내가 이곳의 한국 가정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온화한 친 절과 더 깨끗하고 더 안락한 편의시설을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 각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한국 남자들의 기풍이 미묘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 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 죽은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 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富農(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 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 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했다 .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 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한국인이 朝鮮朝的(조선조적)인 정치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원래 가진 잠재력대로 크게 발전하게 될 것이란 비숍 여사의 예언은 1945년 이 후 대한민국에서 결실되었다. 한국인의 야성을 짓누르고 있던 조선조와 日帝의 압력이 해제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자 한국사람들의 에 너지가 대폭발했다. 특히 해외로 뻗어나가는 민족의 힘이 이 발전을 先導(선도)했다. 가장 뛰어난 名文은 예견력을 가진 글이다. 지나간 일을 근사한 문장으로
그리기는 쉽다. 과거는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정확히 豫見하는 데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자가 소개한 대표적인 대예언-崔南善의 해양화론과 비숍의 여행기가 바로 그런 작업 끝에 나온 글이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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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김유신의
名言과 文武王의 名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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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仁宗시대의 權臣이기도 했던
金富軾(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 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 속으로, 또 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三國史記는 申采浩 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 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 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 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
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正史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正色을 하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다른 正史 高麗史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 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鼓動(고동)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金春秋, 金庾信, 文武王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신 장수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人間像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 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 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戰國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 통일기의 主役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視角, 武人으 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신라가 唐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 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列傳 부분의 金庾信傳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 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方術을 가르쳐주십시오>(17세 때 中嶽(중악)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難勝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 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金庾信의 決戰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蘇定方은 그냥 돌아간다 .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부분 은 전하고 있다.
<高宗:『어찌하여 新羅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蘇定方:『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 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감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로써 똘똘 뭉친 나라-이것이 新羅가 삼 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 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군인의 길 /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손톱과 어금니) 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시석․화살과 돌) 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 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 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 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唐軍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 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 신 聖上(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 어 三韓이 한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小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 어 累代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 하께서는 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을 멀리 하고 君子를 가 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基業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 야 할 것이나 元述 같은 자는 이미 先君(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 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 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자가 만난 인물이 金庾信이다.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統一大業에 精進할 수 있었던 비 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共存 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 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刑場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 金庾信은 至誠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金富軾은 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庾信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金庾信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 된 것인가. 金庾信은 꾀를 부려 누이 文姬를 金春秋에게 시집보냈고 金春秋 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近親결혼 풍습이 있었다) . 문무왕은 金庾信의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金庾信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安心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金庾信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典型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이 있듯이 金庾信이 순 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金庾信은 권모술수에 통 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定義하는 것이다
文武王의 遺書
통일대왕 文武王도 우리 민족사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太宗이 만들어준 온실 속에서 문명을 꽃피운 세종대왕과는 달리 문무왕은 矢石이
오고가는 전쟁터에서 단련되고 결단하여 백제, 고구려, 唐을 잇달아 꺾고 통일을 완수했다. 金庾信이 장엄한 생애라면 문무왕은 담백하고 깔끔한 인
물이란 느낌을 받는데 아마도 그가 남긴 유언 때문이리라.
<(前略) 宗廟(종묘)의 主(주)는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되는 것이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토록 하라. 山谷(산곡)은 변천되고 세대는 바뀌게 마련이다. 오왕〔吳王:손권(孫權)〕의 西陵(서릉)의 望(망)도 오직
銅雀( 동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다. 옛날 萬機(만기)의 영웅도 마침내 한덩이의 흙이 되고 초동 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 으니, 한갓 資財(자재)를 허비하여 기평을 남기고 헛되이 인력만 수고롭게 할 뿐 유혼을 머물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 을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즐겨할 것이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庫門(고문)의 바깥 뜰에서
西國(인도)식에 의하여 불에 태워 장사지 내고 服(복)의 경중은 정하여 있지만 喪(상)의 제도는 검약을 따를 것이며 ,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주․현의 課稅(과세)도 일에 필요한 것이 아 니면 마땅히 헤아려서 폐하고, 律令(율령)과 격식도 불편함이 있으면 곧 개 신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니 소속 관원은 시행하라>
요사이도 火葬하기가 어려운데(특히 富貴를 누린 사람들은)
우리의 통일대 왕은 자신의 偉業을 구태여 호화분묘로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통일 전쟁을 하면서 치러야 했던 민중의 고통, 거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느껴지는 유 언이다. 무덤을 장대하게 만드는 것의 허망함을 간파한 文武王의 합리정신 , 이것이 통일을 가능케 했던 신라정신의 한 핵심일
것이다. 文武王이란 諡號(시호)는 또 얼마나 잘 지은 이름인가. 신라통일, 그리고 다가오는 남북 통일의 조건은 文武의 통합과 조화, 상호견제와
경쟁에 있다는 암시가 아닌 가.
『당신들의 피와 살은 신라 것이다』
三國史記 문무왕 편에 실려 있는 天下의 명문이 있다. 문무왕 11년에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속국으로 만들려는 唐과 결전하기로 작심하고 唐의 보호를 받고 있던 舊 백제 지역을 공격하고, 백제군을 응원 하러 온 唐軍을 공격하여 대승했다. 唐은 薛仁貴 장군을 현지에 파견했고 그는 문무왕에게 문책조의 서한을 보낸다. 이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한 내용 이 삼국사기에 全文이 실려 있다. 唐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슬기롭고 당당하며 주체적이되 오만하지 않은 문장이다. 文武王은 唐이 신라와 손잡고 百濟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오히려 百濟에 괴 뢰정권을 세워 신라를 견제해 온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뒤 그럼에도 신라는 웅진에 주둔한 唐軍과 평양을 치는 唐의 원정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임무 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썼다.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 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우마)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 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唐軍)은 양식의 여 유가 있었소. 또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난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 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에게 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주 었소. 都護(도호) 유인원이 멀리 와서 외로운 城을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의식)하였으니, 유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 과 뼈는 비록 한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唐)의 은택은 비록 무한하나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애닯 다 할 것이오>
신라가 唐 원정군에 대해 軍需물자를 대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설명 한 뒤에 한 말 - 「당신네들 만 명이 4년간 우리 신라한테서 먹을 것과 입 을 것을 가져갔으니 귀하들이 비록 중국 땅에서 나 뼈와 가죽은 중국 것이 지만 살과 피는 우리 신라 것이다」란 문장은 匕首(비수)처럼 가슴에 박히 는 글이다.
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金正日 물러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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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名文․名言 편력記- 「金正日 물러나야」
◈조선일보 社說:「金正日 물러나야」
언어의 힘을 느끼게 하는 또다른 비수 같은 글은 1997년 6월24일자 조선일 보 사설이다.
너무나 당연한, 그러나 남한에선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金正日 퇴진」을 정면에서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 사설에 북한 정권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그만큼 急所(급소)를 맞았다는 뜻이리라.
〈1997년 6월22일 방영된 KBS 「일요 스페셜」은 北의 지옥 같은 참상을 충 격적으로 전했다. 그곳은 「노동자의 천국」이 아니라 당 간부와 상층부 2 0%를 제외한 80% 인민의 죽음의 현장이었다. 굶는 사람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굶어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떠도는 생지옥- 이것이 金正日이 만들어 놓은 北의 현실이다. 이 기막힌 영상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가 느끼는 것은 가엾은 일반 주민들에 대한 연민과, 北을 그 모양으로 만들 어 놓은 金日成-金正日 체제 지배자들에 대한 끝없는 분노다.
결론부터 앞세워 김정일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물러나야 한다. 金正日 정권은 사태의 모든 책임을 지고 정권을 새로운 개혁․개방 잠재그룹에 이 양해야 하며 지금까지의 주체사상 체제를 북한판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 제로 전환해야 한다. 北을 지금 같은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은 수해 도 아니고 「제국주의자」도 아니고 남한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金正日 과 그 핵심 실세들의 잘못된 국가경영 탓이며, 오늘의 생지옥상 하나로 金正日정권의 존재이유와 정당성의 근거는 100% 소멸했다. 이런 정권 또는 그 10분의 1만 닮은 정권이 만약 남한에 있었다면 운동권과 진보적 지식인과 일부 종교인들은 아마 벌써 「타도」를 외치고 분신소동들을 벌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같은 「정당성 없는 정권에 대한 퇴진 요구」의 보편타당 성에 근거해서, 결코 「외국」일 수 없는 우리 땅 북녘을 그 지경으로 만들 어버린 金正日 정권이 자의든 타의든 퇴진할 것을 요구한다. 일부 논자들은 KBS 화면을 보고서도 그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들을 비판할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오직 우리 남한 국민과 정부가 인색한 탓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해소되지 않는 양 논리를 왜곡하고 있다. 우리 역시 우리 형편에 맞는 긴급 식량지원을 하자는 쪽에 서 있다.
그러나 남․북간의 원만한 공식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는 그럴 수 없다 치더라도 시민운동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그리고 당연히 『주민 굶 겨 죽이고 인권 압살하는 金正日 정권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적십자사를 통해 민간 차원의 식량지원을 해서 북한 주민을 죽지 않게 만드는 일과, 그들을 그렇게 만든 북의 김정일 정권 을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 차원의 문제다.
혹자는 그렇게 하다가 金正日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느냐 하지만 공 산당은 기가 센 상대방이 아닌 겁먹은 상대방만 만만하게 가지고 논다는 사 실을 알아야 한다. 식량은 주되 할 말은 하고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왜 남한에 나쁜 정부가 나올 때만 분노해서 「타도」를 외치고 북에 나쁜 정부 가 있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덮어놓고 화해」만 역설해야 하는가? 金正日 은 최근에도 자책은커녕 식량지원을 「제국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매도한 논문을 발표했을 정도로 파렴치한 인물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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