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사, 내 사랑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둘러 앉아
곁눌질 한 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에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바람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도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갓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이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옛 벗이
화암사 안 마당에 먼저 와 앉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은 굳이 알려주지 않으렵니다.
안도현(시인)
완주에 있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암사를 찾았습니다.
이차선 도로에서 한참을 벗어난 곳, 조그만 빈터에 속세의 탈 것들을 버리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는 불명산 화암사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보입니다.
기꺼이 뗏목을 버리고 올라갑니다.
(중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설법 ‘뗏목의 비유’를 참고했습니다)
숲길을 걷다보면 쉬었다 가라고 의자도 준비해두었고, 개울을 쉽게 건너라고 다리도 만들어 두었어요.
비록 뗏목은 버리고 왔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길을 인도해주는군요.
길은 차츰 가파르고 좁은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데 나중에는 이게 길인지 계곡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비라도 많이 내리면 이 화암사 가는 길이 모두 계곡이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물 마른 계곡 곳곳에 조그만 웅덩이가 마치 옹달샘처럼 보입니다.
드디어 147계단이라는 쇠다리를 만납니다.
세상의 손때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을 것 같던 길 가운데 웬 쇠다리인가 하겠지만 그마저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이 다리가 없었을 적에는 얼마나 어렵게 절집을 찾았을까요?
참고로 화암사 중창비에 보면 원래 화암사로 가는 길에 대해 “바위 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 마리의 말을 갈무리할 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과 같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이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내 사랑>뿐만 아니라 이 화암사를 찾았던 많은 사람들의 속내를 꾸밈없이 엿볼 수 있는 패널들이 쇠다리 난간에 가득합니다.
두루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가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찾는다는 느낌.
올라가는 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올 때는 뭔가 맑고 투명한 느낌들을 다시 가득 채우고 오는 길.
화암사 가는 길은 그런 길인가 봅니다.
사람들마다 속세에서 오염된 마음의 때를 씻기 위해 이곳을 찾게 되나 봅니다.
이제 몇 계단만 올라가면 절집을 만나게 됩니다.
화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도, 천왕문도, 불이문도 없습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통나무 다리를 건너 보이는 건물이 화암사 입구의 우화루입니다.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이름의 이 누각이 화암사의 얼굴이지요.
굵직한 나무기둥을 세워 집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누각 바로 왼쪽에 절의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입구가 있습니다.
웬만한 절들에 있는 세 채의 문을 홀로 감당하는 참으로 소박하지만 야무진 문입니다.
안마당에 들어서면 좌우에 선방인 적묵당과 요사채가 있고 중앙에 이 절의 주불전인 극락전을 마주보게 됩니다.
이 건물은 아주 독특하고도 흔치 않은 현판을 가진 다포식 맞배지붕의 기와집입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 건물은 1606년(선조 39)에 건립하였고 1714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앙식 구조를 한 목조건물입니다.
이 구조는 우리나라 다른 목조건축물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현재 이와 같은 구조를 보여주는 유물은 부여 동남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탑 조각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백제시대 목조건축이 이 하앙 구조를 적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이 건물에서 백제시대 건축기술의 여운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앙이란 일종의 겹서까래로 처마 길이를 길게 뺄 수 있도록 고안한 건축부재인데 중국과 일본에는 이런 형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보기 드문 것입니다.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은 앞면과 뒷면의 모양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앞면 하앙은 장식적이고 뒷면은 구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앙의 부리 위에는 소로를 얹어 외목도리를 걸쳤으며 다시 그 위에 용머리를 조각하였습니다.
하앙의 부리는 자세히 보면 용의 발 모습인데, 끝부분은 화염이 이는 여의주를 발톱으로 움켜쥔 모습을 투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하앙 전체를 한 마리의 용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반면에 뒷면의 하항은 위치와 짜임은 앞면과 같지만 도리 위에 용머리도 없고 하앙의 부리도 길게 삼각형을 이루며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암사 극락전 앞면 하앙과 공포>
<화암사 극락전 뒷면 하앙과 공포>
하앙으로 처마를 길게 빼면서 공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순각판으로 마감을 하면서 판 위에 아름다운 비천을 그렸습니다.
지금은 색이 좀 옅어졌지만 참으로 복스럽고 예쁜 비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 안은 더욱 화려합니다.
불단의 위에는 화려한 공포의 짜임을 보여주는 닫집이 있고 중앙에는 용이 하늘을 휘저으며 날고 있으며 용의 앞에는 좌우에 하늘을 나는 비천이 있습니다.
내부의 단청도 다양한 문양이 중간 색조의 채색으로 은은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건물 내부 오른쪽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동종이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화암사를 잘 늙은 절로 표현하였습니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랍니다.
절을 내려오면서도 내내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암사는 그렇게 일부러라도 찾고 싶은 절이며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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