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미술 음악

[스크랩] [친절한 디토씨의 문화여행 노트] Shall we Eataly? - 3월 그 세번째 이야기

半步 2013. 3. 24. 15:48


생명력의 시칠리아

‘아마도 나의 전성기는 올해부터가 아닐까?’ 글쎄, 시칠리아의 어느 시장 노점에서 송아지 내장버거(여기선 밀짜(milza)라고 부른다. 놀라운 맛이다.)를 베어 물다 문득 든 생각이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오페라 가수도 아니며, 전업 작가도 아니니 딱히 전성기라는 것이 필요한 인생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왜 그런 본능적인 감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뭔가 인생이 한없이 충만해지고, 거침없이 상승계단을 타고 오르는 듯한 그런 꽉 찬 느낌.

 

내게 그 계시(혹은 착각)는 바로 지중해의 이 섬,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어느 시장통에서 내려왔다.

아마 그건 순전히 음식 탓일 수도 있겠다.

송아지 내장을 푹 삶아서는 그 위에 오렌지즙을 스윽하고 뿌려서는 바로 먹는다. 그냥 먹어도 맛이 좋고 빵 사이에 끼워먹어도 간이 절묘하다.

시장음식하면 왠지 조미료 찜질이 된 눅진눅진한 단맛의 그런 것들만 생각나던 나였지만 여기서는 정말 ‘진짜’들만 보인다.

 

이건 사람을 격려하는 맛이다.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음식이다.

한 생명이 또 하나의 생명을 먹고 있는데 최소한 이 정도의 ‘진정성’은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것이 먹히는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표시’가 아닐까?

(시칠리아 노점에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맛봤던 송아지 내장버거)


(저 반짝거리는 가지를 올리브오일에 살짝만 굴리면 최고의 요리가 된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나는 가까운 피자집을 찾곤 한다.

하지만 다른 도시나 지역에 가면 박물관이나 교회를 방문하는 일보다 먼저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그 지역의 음식을 찾는 일이다.

다른 지역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만의 향취를 느끼고자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집, 거리의 쇼윈도 등을 눈여겨보며 걷곤 한다.

그리고 그곳의 음식을 찾는다.

 

무엇보다 그 지역의 음식을 맛봐야만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 음식을 만나는 것은 그 지역의 언어뿐만 아니라 맛, 정신, 영감,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등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그 지역만의 특징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즉, 시칠리아 사람과 피에몬테 사람, 베네토 사람과 사르데냐 사람을 구별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이탈리아 음식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곳 사람들의 영혼을 발견하는 작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

너 치즈 좋아하니?

내가 음식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마도 딱 한 가지다.

그게 ‘진짜’냐 아니냐다.

진짜가 주는 감동은 남다르다.

그건 시장통의 1유로짜리나 미슐랭 별이 잔뜩 붙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음식에서나 공히 느낄 수 있는 그런 감동이다.

팔레르모 어느 해변시장의 삶은 문어요리나 밀라노 사들러(Sadler)의 커피가루를 뿌려낸 조개관자 요리가 모두 엄청난 감동을 주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진짜들이 만든 진짜 음식 속에는 충만한 기(氣)가 느껴진다.

그걸 느끼는 데 대단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퀸(Queen)의 음악이나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를 만나게 되면 절로 그 깊은 내공을 감지하게 되는 것과 같다.

진짜에게서만 느껴지는 ‘날 선 감동’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이탈리아 여행은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사방천지에 ‘진짜’들이 널려 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이지 Italy는 Eataly(Eat+Italy)이다.


(폴렌타에 염장대구 바칼라를 넣은 베네토 지방의 요리)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다음 날은 레조-에밀리아로 갔다.

볼로냐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 파르마 방면으로 한 시간 가량만 가면 나오는 소도시.

예전에야 티토 곱비니 주세페 디 스테파노 같은 전설적인 오페라 가수들이 젊은 시절 이곳 시립극장에서 멋들어진 노래를 불렀다지만 그건 정말 호랑이 곰방대 물던 시절 이야기.

 

지금은 (거기 살고 있는 사람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조용하고 지루한 시골마을’이다.

여튼 이 동네에서 친구 프란체스코를 만났다.

홈그라운드에서 그를 조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우리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걸치고는 이 도시의 구시가지를 터벅터벅 걸었다.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와 유럽을 좋아하는 나는 아마도 환상의 복식조가 아닐까.

서울의 먹거리를 그리워하는 그 친구와 에밀리아-로마냐(볼로냐와 파르마 일대를 가르키는 말) 미식의 진수를 경험하겠다는 야심찬(?) 나의 생각이 엇갈리는 가운데 우리는 그 동네에서 제법 이름난 대중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대뜸 묻는다.

‘너, 치즈 좋아하니?’
‘치즈...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곧 그 기괴한 질문의 이유가 밝혀졌다.

나름 이탈리아 식문화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충격적이었던 비주얼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것이다.

파르미자노 레자노, 즉 최고의 파르마산 치즈를 덩어리로 뚝뚝 떼어내 그걸 접시째 서빙해줬다.

치즈만 먹기에 심심하면 크림 형태의 발사믹 식초를 곁들여도 좋다.

물론 이것도 인근 모데나에서 가져온 최상급의 발사미코다.

‘세상에는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구나.’



(세계 최고라는 파르마 치즈. 에밀리아-로마냐의 풍부한 물산과 수준 높은 식문화를 말해주는 중요한 상징 중의 하나)

우리는 곧 와인을 곁들여 메인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지역마다 마시는 와인이 다르다.

이 사람들은 대개 그 동네에서 나는 지역와인만 마신다.

그래서 와인만 봐도 지금 어느 동네 어디에 와 있는지 얼추 짐작이 가능하다.

 

피에몬테에 가면 바롤로가 잔뜩 보이고, 베로나의 슈퍼마켓엔 아마로네가 산처럼 쌓여있고, 알토-아디제엔 뭔가 오스트리아풍 와인만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에밀리아-로마냐라면 단연 람부르스코(Lambursco)다. 람부르스코는 탄산이 들어간 가벼운 와인이다.

에밀리아-로마냐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음식이 맛있는 미식의 본고장, 우리로 치면 호남과 같은 곳이다.

이 세계 미식의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놀라운 요리에 가벼운 기포와인인 람부르스코를 곁들인다.

게다가 오늘은 프란체스코가 자기 동네에서 최고라는 한 병을 특별히 골랐다.

 

가볍고, 달달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괜히 감격해서는 ‘에밀리아-로마냐의 신비!’라고 외쳤더니, ‘거 뭐, 우리 동네에선 콜라같은 건데’란다.


(그가 동네 최고라는 람부르스코를 직접 골라 보여주고 있다.)

시금치 토르텔리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와인이 또 있을까.

말하자면 우리네 막걸리 같은 술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한파인 그도 한마디 던진다.

‘한식하고 람부르스코는 꽤 잘 맞을 껄.

아는 와인업자 있으면 이 술 팔아보라고 그래.

서울에서도 히트치지 않을까?’

여기에 서울식 딴지로 응수해다. ‘우리나라는 음식따로 와인따로라서 말이지.

 

술하고 음식이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유럽이 아니란 말씀이지.

대체 음식 없이 람부르스코만 마시는 장면이 상상이나 가나?’

지난 주에 술자리를 같이 했던 요리사 선생님께서는 - 그러고보니 이 분도 시칠리아에서 요리를 공부했다 -, 이런 현실에 ‘비참함’까지 느껴진다고 하셨지만, 뭐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유럽에선 늘 테이블 위의 조연만 담당하던 녀석들이 한국에 와선 팔자에 없는 주연도 한번 차지해보고 있잖은가.

여튼, 이로써 에밀리아-로마냐 미식의 진정한 친구, 식탁 위의 완벽한 조연 람부르스코의 서울 상륙작전은 없던 일이 됐다는 뭐 그런 이야기.

 

우린 앞으로도 한참이나 와인과 음식의 절묘한 앙상블과는 상관없는 어떤 세계에서 조금 더 괴로워해야만 한다는 뭐 그런 스토리.


(남이탈리아의 아들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여 Casta Diva',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이번 주에는 프란체스코가 서울로 온다.

레조-에밀리아의 미식 내공을 몸소 보여준 그에게 나도 뭔가 비장의 카드를 내보여야 할 터.

 

그러나 그는 이미 ‘야, 난 평양식 만두 좋아해. 김치도 좋은데, 물김치와 오이김치는 썩 별로야’라는 참으로 이탈리아인다운 까다로운 요구를 먼저 날려왔다.

 

방배동 어느 자락에서 그와 슴슴한 이북식 만두를 뜯으며 밀린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오늘 미처 다 쓰지 못한 나폴리 피자와 밀라노 레스토랑 이야기들은 기회가 될 때 또 계속하리라.

출처 : 28도우회
글쓴이 : 半步 원글보기
메모 :